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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Feb 02. 2024

[11월] 7. 한때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안녕하세요, 오늘의 당신. 오픈을 이틀 앞두고 마음이 조급한 정란입니다. 토요일에는 친구가 방문하기로 했기 때문에 오늘 많은 일을 해 두어야 합니다. “나는 벼락치기 전문가거든” 호언장담하고 신나게 논 대가를 오늘의 정란이 치르고 있네요. 오늘의 정란이 거울 앞에 섭니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신났던 과거 정란의 모습 위로,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입꼬리가 조금 쳐진 오늘의 정란이 겹칩니다. ‘으휴, 정란아’ 옅은 한숨이 새어 나오지만, 한편 애처로워 격려해 주고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신났지?’ ‘그럼 됐다’ ‘앞으로는 노는 데 쓰는 힘을 아껴서 잘 쉬고, 부지런히 할 일을 해 나가자’ 나라는 인간 하나를 아주 잠깐 보는데도 이렇게 다양한 감정이 스치네요. 오늘의 당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그 얼굴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나요?


(라고 아침에 쓰고 밤 10시 36분에 이어서 쓰기 시작합니다. 지각할 위기라는 생각이 들자 임기응변의 대가인 정란은, 몇 년 전에 ‘지각’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아침에는 과거의 정란이 현재의 정란을 피곤하게 했으니, 밤에는 과거의 정란에게 현재의 정란을 위해 뭐라도 해 보라고 멱살을 잡고 흔들어 봅니다. 2019년 5월의 정란이 썼던 「지각」을 공유합니다. 아, 과거의 정란에게 도움은 받고 있지만 약간 쑥스럽네요. 과거의 글들은 너무, 너무, 너무… 예, 그렇습니다.)


/

우리는 때때로 늦는다. 출근이나 등교만이 아니라 시험 접수일, 각종 마감, 약속 시간 등에도 늦는 때가 있다. 나는 고3 때 정시 원서 접수일을 놓친 적이 있다. 대학생 때는 기숙사 신청 마감일을 놓쳐 어쩔 수 없이 한 학기 동안 자취를 했다. 인턴 영문 지원서를 제때 작성하지 못해 접수조차 못한 적이 있으며, 길을 헤매느라 면접 대기 시간에 늦은 적도 있다. 비행기 탑승 시간에 늦어 보안검색대를 뛰어 통과하다 붙잡힌 적이 있다. 매번 스스로가 한심해 셀프 꿀밤을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유가 하나같이 딱해 속상한 한편 짠한 마음이 들었다.


고3 시절이 끝나고는 길을 걸어도 붕붕 떠다니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공부를 한 것도 아니면서 그랬다. 그 기분에 취해 수영도 배우고 유흥도 즐기고 책도 열심히 읽었는데, 그러다 정시 원서 접수일을 놓쳐버렸다. 대학을 휴학한 동안에는 기숙사 일정 안내 문자를 받지 못했고, 복학 전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쳤다. 면접을 위해 여유 시간을 한 시간이나 두고 출발했으나, 낯선 곳의 지리는 작정하고 만든 미로처럼 어지럽고 어려웠다. 스리랑카에서는 현지 동료에게 들은 대로 버스를 갈아타고 갈아타고 공항으로 가다 비행기를 놓쳤다. 트리윌을 타면 집에서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음은 나중에야 알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지각遲刻을 한다는 건 결국 지각知覺이 늦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딱한 일이 되고 마는 것 아닐까. 지각으로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과오는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돌아오니까. 무언가에 늦으면 결국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 시험을 볼 기회, 조금 더 편안하게 생활할 기회, 좋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할 기회, 돈을 절약할 기회. 하지만 이런 건 얼마든지 회복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 어떤 일은 늦으면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고 되찾을 수도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그 또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지만, 어쨌든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사람 마음의 방향과 깊이를 알고 싶어 늘 고민에 잠겨 있을 때가 있었다. '아까 그 눈빛은 뭐였을까' '좀 전에 내게 건넨 말의 의미는 뭘까' '그 사람 저 표정, 날 좋아해서 나오는 표정일까?' '저 사람의 저 행동, 호의일까 관심일까 사랑일까' 그렇게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 앞에서 방황할 때가 있었다. 나의 불안은 그에게 전해지고, 그의 불안은 다시 나의 불안이 되어 애매한 선택지만 하나 더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다. 엇갈린 것은 타이밍이었을까 마음이었을까. 확실한 것은 그렇게 사람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기억은 어느 날 문득 수면 위로 떠오른다. 샤워를 하며 노래를 듣다가, 책을 읽다가, 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곳의 사진을 보다가 문득문득. 실타래처럼 느껴졌던 그의 마음이 실은 잘 떠진 털실 공이었음을, 언제든 내게 굴러올 수 있는 따뜻한 공이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돌이키려 애쓸수록 엉키고 되찾으려 할수록 멀어진다. 한 번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은 바람 든 배처럼 푸석해진다. 여전히 달지만 그 맛이 전과 같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과육의 색마저도 완전히 변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절망의 뒤편에는 거의 그렇듯 고요한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한 번 지각을 하면 다음에 더 서두르게 되듯, 한 번 늦은 마음은 조금 더 예민한 마음으로 상대를 살핀다. 그가 이전의 그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린 비행기처럼 그가 떠났다.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닦을 겨를도 없이 공항에 섰으나 주위는 고요하다. 날려버린 티켓값에 대한 걱정보다도 당장 내가 설 곳을 찾지 못한 데서 기인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돌아가야 할까?'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할까?' '무엇을 기다려야 할까?' 바로 그때다. 둘러보면 내 주위엔 아직 떠나지 않은 비행기가 많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조용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다행이다. 지각이 아니다. 그 마음들과 함께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대신 이제는 놓치지 말아야지. 다시는 흘려보내지 말아야지. 그 마음, 그 사람.


지각5

「명사」  

정해진 시각보다 늦게 출근하거나 등교함.


/

지각 위기에서 이걸 보내기는 보내지만, 저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손가락이 0.1mm 정도 짧아진 것 같습니다. 어깨는 자꾸만 올라가고 원인 모를 수치심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글자 ‘그 마음, 그 사람’에서 모니터를 부술 뻔했습니다. ‘지각으로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과오는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돌아오니까.’ 부메랑에 맞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때로부터 4년 후의 정란인 현재의 정란은 놓치지 않았을까요? 지각하지 않았을까요? 아주 소중한 것들을 놓쳤습니다. 잃었고 잊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흘려보내는 것의 미덕을 이제는 압니다. 우리에게 ‘한때’라는 것이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한때 우리 사랑했고,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평안하길 바랍니다. 


추신.

책방하리의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오늘 책방을 정돈하느라 밤 9시가 넘도록 책방에 있었는데요, 밤의 책방이 너무 예쁩니다. 도란도란 대화 나누기 너무 좋을 것 같은 분위기예요. 밤의 책방에서 뭘 하면 좋을까요?


-내일은 주말인데 오늘도 책을 주문해야 하는 거북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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