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처음, 처음, 처음
네덜란드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랬지만, 수업이 시작된 이후 내가 겪게 된 모든 건 다 처음이었다. 한 단어를 여러 번 읽고 말하면 어느 순간 그 단어가 낯설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에겐 그 당시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느껴질 정도로 반복되던 순간이었다. 그중 내가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세 가지의 처음은 바로, 처음 사귄 외국인 친구, 처음 들은 영어 수업, 그리고 처음 하게 된 영어 과제였다.
파운데이션 과정이 시작되기 전 날부터 같이 살게 된 한국인들과 함께 학교 가는 길을 미리 알아두려고 학교까지 걸어가 보기도 하고, 학교 경비원을 마주쳐 내일부터 수업을 한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야기도 나누고, 밤에는 내일 가서 만나게 될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잠도 설쳤었다. 그리고 파운데이션 과정이 시작되는 날, 학교로 걸어가며 다 함께 외국인 친구를 어떻게 사귈지에 대해 고민했었다. 사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외국인 친구라고 특별할 것 없고 고등학교에서 갔던 여행에서도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던걸 보면 그렇게 긴장할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내가 앞으로 살게 될 '외국'에서 함께 할 '외국인 친구'를 처음! 사귄다는 게 정말이지 긴장되고 그 자체를 어렵게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꼭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강박감 같은 것을 느껴 나도 모르게 아무 외국인이나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친구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갑자기 모르는 애가 다가와서 말을 거는 게. 물론 친구를 사귈 때의 시작은 먼저 말 거는 용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 친구 입장에서는 매우 놀래고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지금에 와서는 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다를 거 없이 다 같은 사람이고 대화 주제도 비슷하고 그냥 다 친구로 느껴지지만 당시에 외국인 친구를 만들어야 해!!!라는 강박과도 같은 생각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크게 남는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외국인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냥 외국인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있다 보면 친구가 될 거예요 라고 말해주고 싶다. 오히려 외국인 친구를 만나야 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모든 게 다 어려워지게 되는 것 같다.
파운데이션에서 처음 들은 수업의 내용에서 선생님의 두 마디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는다. "생각도 영어로 하세요", 그리고 "할 수 있다". 파운데이션은 더치 애들 없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듣는 수업이었고 그중 대다수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영어의 중요성에 대해, 영어가 어떻게 하면 빨리 늘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는데 그중에서 "생각도 영어로 하세요"란 말은 처음에는 정말이지 어려운 말이었다. 물론 생각도 영어로 한다면 영어가 빨리 늘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소리겠지만 대체 영어로 하는 생각이 뭐지? 생각을 어떻게 영어로 하지? 수많은 의문점들이 생겨났다. 어느 순간 꿈을 꿀 때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걸 듣다가 깬 적이 있는데 아, 진짜 영어로만 생각하면 꿈도 영어로 꾸게 되는구나 하고 느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영어로만 생각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말들이 있을 때, 영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이 말이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또 기억에 남는 할 수 있다는 말은, 너무 흔한 말이지만 당시에 선생님이 약간 머릿속에 입력하듯이 너는 할 수 있어!!라고 반복해서 말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며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이 듣는 말이지만 또 그래서 와 닿는 말이기도 하다. 유학 생활하다 종종 힘들 때 첫 수업이 문득 기억나면 할 수 있다, 할 수 있겠다,라고 혼자서 주문처럼 외우게 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수업을 하다가 첫 과제를 받게 되었을 때, 과제의 주제가 뭐였는지, 얼마 큼의 양이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절망스러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읽고 풀었던 수많은 수능 지문들은 읽을 때는 그저 하나의 읽을거리였지만 그 문제를 만들기 위해 영어로 작문을 해야 할 때의 기분은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지 살면서 영작을 해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을 다양하게 써야 했었던 적은 유학을 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영어로 문장을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쓰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유치원생도 이것보단 잘 쓰겠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들었다. 내가 한국어로도 글을 잘 쓰는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영어로 쓰는 나의 글은 정말 처참할 뿐이었다. 유학을 와서 첫 과제를 받기 전까지 모든 게 다 즐겁고 여유로웠다면, 과제를 받은 그 순간부터 내 유학생활이 순탄치만은 않겠구나를 강렬하게 깨닫게 되었다.
나의 유학생활의 처음, 처음, 처음은 조금은 잘해야겠다는 마음에 강박도 느끼고 좌절도 느끼게 된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