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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Dec 27. 2023

가마쿠라(鎌倉) 구석구석(6)

오이소와 사이다마의 고려(高麗), 제3-2일 차(최종회)

   고구려 패망 당시 보장왕의 왕자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와 있던 왕자 약광 이야기입니다.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고려(고래) 신사와 사이다마현 고려(고마) 신사의 신이 된 스토리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오이소와 사이다마현 고려(고마 신사) 위치
약광 도착 장면(고마 신사 경내 판화)

3-1일 차  (굵은 선이 3-2일 차 일정)   

에노시마 (江ノ島) > 오이소 (大磯) > 고마산 공원(고려산공원, 高麗山公園)      


고려신사(고래신사) / 마을 안내도 (고려로 도배됨)
고려 신사 입구 / 고려 신사 주변도

오이소 (大磯)

   오이소는 가마쿠라에서 동쪽으로 약 20km 거리에 있다. 고마신사 주변 지번은 고려(高麗)로 시작된다. 


   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함락 시 고구려의 마지막 왕 28대 보장왕의 아들 약광(若光)은 일본에 사신으로 와 있었다.

고려(고래)사 약력

   백제는 이미 660년에 백강전투에서 막강한 나당 연합군에 의해, 일본왕의 특명에 의해 출병된 일본의 지원군 정예 3만 명이 괴멸되었다. 일본 통치자 여왕의 절망과 원통함을 일본기에 기록하였다.


   당시 한반도 도래인에 대한 일본의 대우는 극진하였다. 이미 왕인박사 등이 문자, 불교 등을 전해 주어 선진 문화에 대한 갈망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한반도로부터의 새로운 눈물에 대한 환호는 대단하였다.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도 일본에는 '구다라 나이’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백제(구다라)가 아니다(나이)는 뜻이다.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유입된 높은 학식과 지식을 가진 유민들은 일본 각 지방의 호족들의 자녀들 교육을 담당하였다. 문, 무분등 각 분야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오이소 해변 약광 왕자 환영, 마쯔리

오이소의 고려         

    약광(若光) 왕자 일행을 태운 배가 가나가와현 사가미 앞바다에 도착하자,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고구려 백제유민들과 현지인들이 바닷가에 나와서 열렬히 환영하였다. 특히 약광은 고구려의 왕자가 아니던가. 그들은 일제히 이렇게 외쳤다. “어서 오이소! 서 오이소!” 그 후 그 지역명이 ‘오이소’로 불려졌다.


   약광일행은 광활한 고구려의 만주 벌판을 누비던 사람들이라, 말 타는 솜씨와 활, 칼 다루는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목초지에서 말 키우는 육마사업을 잘했다.  이를 근거로 확고한 지위와 세력을 확장했다.

고려(고래) 신사
고려(고래) 신사

고려(고래) 신사

    약광 왕자는 고구려 조국을 잊지 말자는 결의를 다지고, 그 일대를 고려(高麗, 고래)라 이름 붙였다. 그의 후손들이 신사를 지어 그를 배향하고 있다. 

고려산 설명판
고려산 주변
고려산 안내도

고마산 공원(고려산공원, 高麗山公園)  

   고려신사 경내에서 안내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올라 가면 고려산공원(高麗山公園, 고마산 공원, 167.3m)이 나온다.

고려산 정상
고려산에서 본 사가미 오이소 해안 / 후지산

    일본은 망명자 집단의 수장인 약광을 인정하고 환대했다. 고려(다카쿠) 신사에서는 봄과 여름에 큰제사를 지내는데 이때는 고려산 정상에 올라가 상궁(上宮)이 있던 자리에서 제사(春季大祭山神輿·4월 17일)를 지낸다. 한반도계 신, 즉 약광 왕자를 섬기는 것이다.          

향토자료관 (박물관) / 오이소 해안

   여름철 역시 어선제(御船祭)라고 해서 오이소 앞바다에서 지내는 제례 의식은 마치 한국의 전통시대에 행하던 동제(洞祭) 의식을 연상케 한다. 사자춤도 등장한다. 향토자료관 내부에 배 모형을 제작 전시하고 있다     

    

   작가 이와이(岩井國臣)는 그의 누리집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이소는 조선반도로부터 온 도래인들이 상륙한 지점으로 그들의 활동 무대는 사마천의 고마에 지역과 이리마의 고려향까지 뻗쳐있다. 도래인들은 관동 평야 개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야마토 조정은 왕족 일족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이들을 도왔으며 그것은 무사의 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도래인의 활약을 언급하지 않고 관동의 역사는 기술할 수 없다."

향토자료관

   "가나가와현 오이소의 고려(다카쿠) 신사와 사이타마의 고려(고마) 신사 그리고 하코네의 하코네 신사는 모두 연관이 있다. 이는 다시 이즈 신사와 연결되고 더 나아가서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과도 연결고리를 갖는다. 오이소를 빼고 관동 무사(板東武士)를 논할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오이소는 일본 무가 사회의 원류이다.” 즉, 관동에 터를 잡은 고구려인들이 사무라이 정권의 뼈대 역할을 했다.        

       

오이소와 사이다마현 고려(고마) 신사 위치

무사시의 고려 (高麗)

   오이소의 고려인들의 세력이 점점 커졌다. 오이소 거주 한반도인 일부를 도쿄 근처 무사시노(사이다마현)옮겨 갔다. 관동지방 무사시노(도쿄 북동쪽 지방)가 오이소 지역보다 더 광활한 평야다. 일본 정부는 그곳에 고려군을 설치하고 고구려인 1799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 유민들이 말의 종자 번식, 군용 육아 훈련에 탁월한 소질을 발휘했다. 무사시국의 너른 평야는 대규모 준마 목장이 있었으며 이들 말은 군사용으로 쓰였다. 이러한 말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서 무사단이 생겨났다고 일본 사서들은 전한다.           

고려천역(사이다마 무사시, 고려신사앞) 지도

신이 된 고구려 왕자 약광(若光)

    고구려 출신의 약광왕(若光王)을 제신으로 모신 무사시 지방의 고려신사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한이 배어 있는 곳이다. 

도리 (고려신사 입구)
고려신사 경내
천하대장군/천하여장군

   몇 년 전 이 신사에서 궁사(宮司: 우리나라 절의 주지와 같은 직책)를 맡고 있는 고마 스미오(高麗澄雄)가 학계의 초청으로 내한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의 후손으로 고려향의 개척자인 약광의 59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광 석상 (신사 경내)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아직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 오고 있다. 고구려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신사를 지키고 있다.

고려 신사(사이다마 무사시)

   고려신사 입구에는 이 신사의 내력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이렇게 씌어 있다.

고려신사는 고구려국의 왕족인 고려왕 약광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중국 대륙의 송화강 유역에 살았던 기마민족으로 조선반도에 진출하여 중국 대륙 동북 부로부터 조선반도의 북부를 영유하고 약 몇 백 년간 군림했다. 그 후 당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서기 668년에 멸망했다.          

 

   이때의 난을 피해 고구려의 귀족과 승려들이 다 수 일본으로 건너와 주로 동국(東國)에 살았으나, 레이키(靈龜) 2년(716년)에 그중의 1천7백99명이 무사 시국(武藏國)에 옮겨져 새롭게 고려군이 설치되었다. 고려 약광왕은 고려군의 군사(郡司)로 임명되어 무사시노(武藏野) 개발에 힘썼으며, 다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여기에 묻혔다. 군민(郡民)은 그의 유덕을 기리고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명신(高麗明神)이라고 하며 숭배해 왔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려왕 약광의 직계 자손에 의해 신사가 지켜져 왔으며 지금도 많은 참배객들이 방문하고 있다.          


   고려 약광(若光)의 존재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 신사의 약광왕은 출세 개운(出世開運)의 신이다. 신사 안에는 「출세 명신의 신」에 대한 안내판이 또 세워져 있다.   

        

하토야마 총리 기념식수(신사 경내) /출세명신의 유래

    이 신사는 기원(祈願)을 잘 들어주는 영험한 신사로 알려져 있다. 특히 오늘날에 와서는 미즈노(水野), 하마구치(浜口), 하토야마 등 5명이 이곳에 참배한 후 계속해서 총리대신(總理大臣) 또는 국무대신에 취임하는 등 출세를 함으로써 출세 관련 신으로 신봉(信奉)됐다. 이 신사는 정계, 재계를 시작으로 해 각계각층의 숭배와 공경을 받아 전국적으로 숭배자들이 널리 퍼져 있다.

신사 유래 / 신사 신축 예상도

   특히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을 방문하여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 임진왜란에 대하여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 2023년 전남 순천 일대를 방문하여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실(귀와 코를 베어 간 패악)에 대하여 수차례 사과를 하였다. 사이다마현 고마 신사 도리를 지나 진입로 왼쪽에 하토야마의 기념식수가 심어져 있다.  그의 진정성이 보인다.        

고마신사 도리 입구 일왕 부부와 약광 후손

   아키히토(明仁) 일왕 부부가 2017년 9월 20일 사이타마(埼玉) 현 히다카(日高) 시에 있는 고마(高麗·고구려를 의미) 신사를 참배했다. 일왕 부부가 고마 신사를 참배한 것은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약광의 후손인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 궁사(宮司)의 설명과 함께 신사를 둘러본 뒤 참배를 마쳤다.  일왕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당시 아키히토 일왕은 “무령왕의 아들인 성명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과의 교류는 이것만이 아니었다”며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朝香宮誠彦王)가 충남 공주시의 무령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고려천 (한국의 어느 하천과 매우 흡사함)

   고려신사옆의 하천(고려천)에서 가족들과 물놀이를 하며 담소를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그 분위기가  흡사 한국의 어느 냇가로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고려천

   갑자기 유프라테스강 바빌론에 유배된 유대인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사유로  일본에 정착하게 된 조선인 선조들의 후손이란 생각을 하자, 뭔가 측은하면서도 친근감이 생겼다.


고구려 약광왕자 그는 끝내, 그의 조국 고구려를 잊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신이 되어 한반도 후손들을 돌보고 있다.                    


이것으로 가마쿠라 구석구석 편은 마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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