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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un 20. 2022

고향길   도보  여행(1)

 도보 여행 / 비슬산  등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고향길 도보여행을 떠났다.


   첫날 일정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태어난 동네를 거쳐 부모님 산소를 찾아뵙는 것으로 했다. 둘째 날은 어릴 적 보고 자란 큰 산(비슬산)을 난생처음으로 올라가 보는 일이었다. 어릴 적 그곳은 나의 좁은 보폭과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가기 불가능한 산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았기 때문이었다. 커서는 먹고 사느라 도회지로 한번 튕겨져 벗어난 인생 궤도는 좀처럼 그곳에 돌아갈 줄 모르고 회귀할 수 없었다. 유배된 인생이 운 좋게도 그곳에 올라갈 기회를 포착하였던 것이다.


   이십 대에 객지로 올라와 그 두배의 유배 생활을 했으니, 그곳은 분명 꿈에도 그리던 고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몇 해 전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1990년도 구입한 차마저 2010년경 정리하였다. 오래 세워두고 가끔 운행하니 배터리 방전, 미션 교체 등 잔고장이 자잤다. 한국의 빠른 교통흐름에 덜컥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다소 불편하더라도 시간을 좀 더 투자하고 인내하면, 느리지만 목적지까지는 곡절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어디든지 갈 수는 있다.      


<첫째 날(20220601)>

   수서역에서 06:30분 SRT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08:11분 내렸다. 1시간 41분 걸렸다. 옛날 5시간 30분 소요되던 지루한 시간 거리가 이렇게 단축되었다니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주변 환경이 내가 알고 있던 그 동대구역이 아니었다. 대구에는 지하철 3개 노선이 운행 중이었다. 지하철로 월배역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목적지까지는 아니었다.  버스 편만 이용하여 목적지인 우포늪 위 달성 끄트머리까지 가기로 했다. 지상의 현재 고향 모습이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동대구역 구내식당에서 메뉴판에서 비빔밥을 주문했다. 구수한 대구 사투리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대구 억양이 약간 섞여 있었지만, 50대 아주머니의 세련된 친절한 응답에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잠깐 기다리세요"였다. 나갈 때는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였다.  내가 기대하고 있던 “잠시 기다리이소~” “잘 가입시데이~ 또 오이소”는 아니었다.


   다음은 방향감각 상실이 문제였다. 버스정류장을 찾기 위하여 휴대폰 교통 지도 앱을 켜서 화면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동서남북 구분을 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었던 나만의 랜드마크, 예를 들면 키 큰  메타스콰이어 나무 가로수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역 밖에 나와서 한참을 헤매다가 거리 청소하는 분에게 버스 타는 곳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지방 선거 당일이라 곳곳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모두가 낯선 얼굴들이었다.     


   버스 창을 통하여 본 고층아파트군 사이사이로 내가 자취생활을 하던 시절의 옛 단독 주택 택지들이 그나마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지명으로만 그곳을 추측할 수 있는 곳도 많았다. 내가 좋아하고 자주 가 보던 북적이던 장소에서는 1시간 동안 마주친 사람이 고작 10명 남짓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월배역 정류장에서 내려 우포늪 방향 버스를 탔다. 버스 배차 간격이 옛날과 비슷함에 놀랐다. 띄음 띄음 배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고 이용자가 현저히 줄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상황이었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지방 자치회에서 자가용 없는 사람을 위해서 콜택시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근거리 이동하는 노인들의 택시비를 지원해 준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면소재지에 내렸다. 근처에 이름이 알려진 곳으로는 임진왜란의 영웅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묘소, 소래 곽 씨 12 정려각, 한훤당 김굉필의 도동서원이 반경 약 5km 내에 있다. (곽재우 장군과 한훤당 김굉필에 대하여는 저의 지난 주제 '중학생들의 반란'(20211119)에서 말씀드렸다)

   면사무소에서 투표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서, 우체국, 농협, 한약방, 종묘상, 전파사 그리고  전통 5일 시장 등을 둘러보았다. 4일과 9일이 개장하는 날, 즉  오늘은 휴장이라 썰렁했다. 어릴 적 보았던 장소들이 협소하고 적게 보이는 것이 묘했다. 초등학교 입구에 있었던 옛날 경찰서가 크고 무섭게 느껴졌었는데, 파출소 정도의 규모라니 믿기지 않았다. 시장기가 있어 테이블 3개로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7,000원 간짜장 한 그릇 먹었다.

  

   기운을 차리고 경찰서 옆 약간 오르막길 초등학교 정문을 통과하여 운동장 벤치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다행히 교실 건물과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는 그대로였다. 경비 아저씨는 휴일 유일한 방문객인 나에게 무관심한 듯 경비실 옆 화분에 물주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등산화, 마스크, 등산 모자를 눌러썼다. 이제부터 약 세 시간 10km를 걷는다. 초중학교 때 걸어 보고 처음으로 걷는 길이다. 걷는 방향은 옛날 기준으로 보면 학교 수업 후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면지역 전체가 국가산업공단으로 지정 개발되어 상전벽해가 일어난 것이다. 옛날 집으로 가는 귀갓길 입구를 찾지 못한 것이다. 옛 추억의 통학길을 걷기로 한 계획에 차질 났다. 공원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들에게 내가 살았던 동네 방향을 물어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내가 알고 있던 길도 산도 사람도 모두 사라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등하교하던 옛길 일부와 초등학교 때 친구들 동네 몇몇이 없어졌다. 그 대신 높은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옛날의 고갯길과 무시무시한 상엿집, 대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던 6.25 공동묘지 지역은 비교적 높은 지대라서, 그 고지대의 흙을 깎아 다른 낮은 지역으로 옮겼다. 옛날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넓은 광폭의 편도 2차선 낯선 길을 1km 정도 가다가 응암1동의 비각을 만났다.

    

1) 응암 1동 (제갈 남학의 효자비)

   내가 가보고 싶었던 응암1동은 일부는 사라졌다. 다행히 마을 일부와 제갈 남학의 효자비는 건재하였다. 그리고 두 멋진 친구가 생각났다. 키가 큰 친구와 키가 작은 친구가 그 마을에 살았는데, 어릴 때 아옹다옹하는 맞수 사이였다. 라이벌 관계였다. 개관적으로 보면 키 큰 친구가 이길 것 같지만, 승패 결과는 비슷했다. 이유는 서로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대적이 되었다.     


    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여러 자연부락이 통째로 사라졌다. 이 옛 길 덕곡마을 입구에 작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효자비각이다. 1937년에 기와를 얹은 방형 흙돌담에 둘러싸인 형태로 세워졌다. 제갈 남학(諸葛南鶴·1847-1903) 효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고을에서 ‘갈효자’로 이름이 났다. 그가 어릴 적에 아버지 제갈영이 기이한 질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다. 그가 아버지의 변을 맛보며 질병을 살피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자 아버지 질병에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어 했다. 엄동설한이었음에도 그가 물가로 나가 얼음을 깨자 잉어가 홀연히 꼬리 치며 올라왔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잉어를 드리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 (제갈 남학 효자비각 기문 중에서)
 

2) 용산

   저만치에서 컴바인으로 보리를 수확하는 농부가 보였다. 용산(84.6m) 위에서 벌판을 내려다보면 바람골이 보였다. 봄날 산 위에서 보는 들판의 바람이 그리는 살아 있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벌판 저 멀리서 봄바람이 불어오면 보리밭의 보리들이 바람에 골을 터주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왔다. 바람이 미세한 초록색깔의 차이로, 연초록에서 진초록 사이의 빛의 산란을 보여준다. 빛의 향연을 볼 수 있었다. 이맘때면 누렇게 익은 보리밭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6월 초입이라 보리 수확, 양파 수확, 모심기로 농부가 가장 바쁜 시기였다. 어릴 적 밤새 놀았던 친구의 옛날 집 사랑방이 쓰러질 듯한 담장 너머로 보였다. 나무 대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었다. 언제 다녀갔는지 모를 정도로 방치된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감지했다.  모심기와 보리 수확은 기계로 수월하게 해결하고 있었다.

옛날 모심던 논에는 농부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못줄을 기준으로 허리를 굽혀 빠른 손을 놀렸었다. 이제 그런 모습은 간데없다. 어릴 적 몇 번 경험해 보았지만 허리가 끊어질 듯한 노동의 고통과 감내해 내야 할 인내심이 떠올랐다. 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이 절로 생각났다.


   들판에는 양파를 수확하는 농부들과 붉은색 양파망이 눈에 들어왔다. 양파 주산지라서, 그 수확한 양파가 우리들 학교 등록금이었다. 보리는 베어서 타작 후에 쨍쨍 내리쬐는 한여름 마당에서 바짝 말려야 높은 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여름 방학 때 말리는 도중에 소나기라도 갑자기 내리면 그야말로 전 식구에게 비상이 걸렸다. 즉, 방학 끝무렵에 돈이 된다. 모심기한 벼는 가을에 수확이 가능한 작물이다. 그러나 양파는 바로 현금이 되고, 연필 공책을 살 수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 떠올라 울컥했다. 줄지어 세워 놓은 붉은 양파망 속의 양파들이 게의 알들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부모의 역할이 그런 ‘꽃게’의 마음이 아닐까? 후세를 위하여 ‘꽃게 간장 속의 알’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어미 게 같은 마음으로 양파를 심고 물 주고 키워서, 나의 뒷바라지를 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자식들에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본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 2008년  


3) 평촌

   길옆에 계란과 주스를 팔던 가게가 쓰러질 듯 폐허가 되어 있었다. 가게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면 커다란 양푼이 물속에 손바닥 크기의 빵빵한 삼각형 비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 비닐 안에는 노랑 빨강 파랑 색소를 넣은 달달한 주스가 들어 있었다.   


   여름이면 마을 어른들이 부채를 부치며 보내던 커다란 느티나무와 바위는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녹이 슬고 구멍이 난 함석지붕을 씌운 정미소 건물터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몇 세대 참새 후손들 아직도 정미소 부근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4) 대견 교회

   달창저수지 밑의 꽤 넓은 평야 한편에 30여 가구의 마을이 있다. 벌판을 바라보며 교회가 세워져 있다. 첨탑과 스테인글라스와 종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에 정류소가 하나 있다. 건너편에 다방이라는 간판과 식당 그리고 부동산업소가 하나가 있었다.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막 기계식 모심기한 모, 양파, 보리, 마늘, 콩이 넓은  들판에 있었다. 한 고랑에는 땅콩이 자라고 있었다. 내가 화가라면, 밀레의 작품이 생각나는 그런 그림을 그려 보고 싶은 그런 장소였다.

5) 선산

   몇 년 전에 선산이 산업공단 지역으로 지정되어 이곳으로 옮겨 왔다. 잔디 위에 부부별로 모셔져 있다. 건너편 야산에 절이 있다. 불경 읽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 여동생이 다녀간 흔적, 꽃이 놓여 있었다. 언제나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 못한 못난 자식임을 뉘우친다.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실 것을 빌었다.


   바로 옆에 외가 친척의 선산이 있다. 운 좋게도 자기가 좋아하는 농사와 목축업이 적성에 잘 맞아 고향에 눌러앉은 외갓집 외육촌 친척이자 친구가 잘 보살펴 드리고 있다.  아버지와 외 오촌 아저씨는 죽마고우였다. 죽어서도 마주 바라보는 고마운 친구사이다. 그 아들들은 상대방 아버지의 사투리 섞인 이름으로 장난스럽게 서로를 불렀다. ‘어이 이바구 아들!‘하면 ’어이 태기 아들!


   들판 보리 베어낸 곳에 병충해 방재 차 태우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릴 적 들로 산으로 부모님 따라다니던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빨갛게 익은 뽕나무밭 오디 사이로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꿩 소리가 청아하게 울러 퍼다.

     

6) 달창저수지

   선산에서 고개를 들면, 멀리 달창저수지가 보인다. 비슬산 기슭 경사면에서 흘러 내린 물을 저장한다. 비슬산이 우리들의 젓줄, 어머니 역할을 했다. 달창저수지의 명칭은 달성군의 ''과 창녕군의 ''하여 만들었다. 이곳은 대구 달성군 유가읍과 경남 창녕군 성산면 일원에 위치한다. 4월이면 저수지 주변에 벚꽃이 만발해 있다.      


   어릴 적 달창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길(차천) 뚝을 만든다고 마을 아저씨들이 뚝 건설현장에서 일했다. 지게 바지게에 흙을 담아서 뚝 부근에 부리면, 감독하는 아저씨가 동그란 동전 크기의 양철을 주었다. 월에 몇 번 정산하는 노임 지급 확인 징표였다.


   저수지 물은 차천이라는 하천을 통하여 창녕군 북쪽과 유가읍, 현풍·구지, 한정리 버들밭들과 평촌리 평촌들 등에 수분을 공급하고는 낙동강으로 흘러갔다. 지류로 흐른 물을 양수기로 산을 넘겨 고봉 못에 저장한다. 또한 땅속 터널을 통하여 용연 못에 담아 계단식 논에도 물을 공급한다. 개구쟁이 시절 하굣길에 300m 길이쯤 되는 컴컴한 터널 안을 통과했다. 천정에는 박쥐, 바닥에는 발목 높이의 물속에서 붕어, 메기, 미꾸라지등이 헤엄치고 있었다.


   어릴 적 어느 해 여름 긴장마 끝에 계속되는 집중 폭우로 달창저수지 뚝이 터진다고 난리가 났다. 비슬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댐을 넘쳐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소 돼지 등 가축들을 대동한 뚝 바로 아래 마을 사람들의 긴  피난 행열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특명으로 열 살 아래 어린 여동생을 내등에 업혔다. 여차하면,  높은 곳으로 냅다 내달는 것이었다. 평화의 댐 건설 비용 모금 당시의 엄습해오는 공포 분위기와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날 한 밤중에 ’쾅‘하는 큰 소리가 났다. 나는 여동생을 덜 쳐 업고 죽자 사자 높은 지대 윗마을로 뛰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별 대응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군가가 빈 드럼통을 쇠망치로 '쾅'두드린 것이었다.  


   달창저수지 위쪽 비슬산 방향에 구례(求禮) 마을이 있다. 구례에는 서원이 있다. 임진왜란의 영웅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존재(存齋) 곽준(郭逡)을 모시고 있는 예연 서원(禮淵書院)이 있다.

 

7) 삼거리

   옛날에는 어느 지역이나 삼거리는 교통의 요충이고 시장터, 가게, 식당, 술집이 있었다. 삼거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봐도 버스가 올 낌새가 없었다. 슈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과 물 한 병을 샀다. 아주머니에게 버스 차 시간을 물어보니, 버스 타 본 적이 없어서 버스 오는 시간을 정확히 모른다고 했다. 하루 5회 정도 지나간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차천을 가로지르는 지금은 폐교가 된 한정초등학교 쪽으로 콘크리트 물길 막이 위로 걸어서 건너갔다. 옛날 한정교 장터 근처에 버스 정류장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스프링클러가 살수하고 있는 잔디가 있는 게이트볼장에서 젊은 노인들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선산 참배 후 두 시간을 헤매다가,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운 좋게도 6번 버스가 나타났다. 버스 기사가 타라고 손짓을 했다. 한참 달리고 나서야 겨우 한 사람이 승했다. 그 버스가 꼬불꼬불 몇 동네를 거처 마침내 현풍읍에 도착했다. 예약했던 숙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오늘 걸은 거리는 약 12km이고, 총 4시간이었다.  도보로 고향길을 고 싶은 소원을 풀었으니, 그것으로 대만족이었다. 내일의 비슬산 등산을 위해서 푹 쉬어야 한다. 내일 난생처음으로 비슬산을 등산한다. 바라만 보았던 큰 산 비슬산을 오를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잘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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