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주제는 순천만 습지, 팔마비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의 길과 수군재건의 길을 난중일기를 통하여 살펴보았다. 당일 옥천 서원을 찾았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어 제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마침 추석을 맞이하여 내려온 김에 옆지기의 고향 순천을 방문하여 옥천 서원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옥천서원 현판
1. 옥천 서원(玉川書院)
아무리 둘러봐도 쓸쓸하고 외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타향살이 귀양살이가 어디 쉽겠는가? 귀양살이 끝에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으니 더욱 숙연해진다. 대꼬챙이같이 꼿꼿한 삶을 살다 간 선비를 추모하여 본다. 본인대에는 못 이루었지만 후대 제자 선비들이 미완성이지만 그의 꿈의 일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옥천 서원(玉川書院)은 1564년(명종 19년)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년)의 학덕을 기려 순천부사(順天府使) 이정(李楨)이 짓고 이황(李滉)이 편액을 쓴 경현당(景賢堂)이 그 뿌리다. 뒤에 옥천 정사가 되었다가 선조 1년(1568) 전라도에서는 처음으로 옥천 서원(玉川書院)이라는 편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옥천서원 내부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4칸의 경현당(景賢堂), 4칸의 지도재(志道齋), 4칸의 의인재(依仁齋), 1칸의 전사청(典祀廳),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직사(雇直舍) 등이 있다. 사우(祠宇)에는 김굉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서원의 강당인 경현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지도재와 의인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수학 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두는 곳이다.
옥천 서원은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 변(籩) 4두(豆)이다. ‘변’이란 마른 음식을 담는 대나무로 된 그릇이고, ‘두’는 젖은 제수를 담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라고 한다. 마른 음식을 담은 4개의 변에는 밤·육포·소금·대추를 담고, 젖은 음식을 담은 4개의 두에는 조기·소고기·미나리·열무를 담았다. 서책은 선조가 내린 사서(四書)를 비롯하여 200여 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8,000평이 있다.
도동서원(출처 : 달성군청)
김굉필 선생의 대구 달성 도동서원은 1568년에 세워져, 대원군 서원 철폐 때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곳이다. 순천의 옥천 서원과 마찬가지로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였다. 그의 무덤이 도동서원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순천에서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사형으로 숨을 거두고, 대구 달성에 묻혔다. 참고로 선생은 순천 옥천 서원, 현풍 도동서원, 아산 인사 서원, 서흥 화곡 서원, 화천 상현서원 등에도 모셔져 있다.
그가 순천과 인연을 맺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연산군 4년(1498년) 무오사화에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갔다. 그의 모친의 간절한 계속된 상소로 그나마 고향 달성과 비교적 가까운 순천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순천 동천 북촌에서 4년 살았다. 그것도 잠시,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순천 저잣거리(철물 시장)에서 한양에서 내려온 집행관인 금부도사의 형 집행으로 사형을 당하였다.
그는 지사형 선비였다. 선비 정신으로 속물근성에 이기적 사욕에 경종과 경각심을 주었다. 당시의 중소 지주층인 사대부와 군주의 독재와 권문세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 사화기의 양심세력이었다. 유학 본래의 덕치, 예치에 의한 이상적 정치 목표, 민본 위민으로 향한 자기희생적 봉공 정신을 실현하고자 했다. 사림 정신, 도학 정신, 처사형의 선비였다.
1610년(광해군 2년)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후손과 제자들에게 대단한 사회적, 학문적 명예가 더해지는 것이었다. 서울의 성균관 및 지방의 향교 서원 등에 모셔지는 것이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 동자'라 일컬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런 시도 남겼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호미를 들고, 산으로 들어가 밭을 바삐 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 누웠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기본을 중시했다. 《소학》의 핵심은 ‘쇄소응대’. 즉 청소 잘하고 방을 잘 정돈하고 사람들을 잘 응대하는 것, 이 기본 매너를 잘 실천하게 이끄는 것이《소학》 공부다. 《소학》은 유교 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유학 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했다. 주자에 의하면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고 비유해 《소학》이 인간교육의 바탕이 됨을 강조했다.
소학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다.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다.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며, 경신은 몸을 공경히 닦는 것이고,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명륜·경신을 설명한 것이다. 가언은 옛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하고, 선행은 선인들의 착한 행실을 모아 입교·명륜·경신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 즉,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 등 어린아이의 처신하는 절차부터 인간의 기본 도리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다.
조광조 선생
그는 솔직했다. 무오사화로 귀양지 평안도 희천에서 있었던 제자 조광조와의 일화가 있다.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모부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먹었다. 이를 안 김굉필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화를 냈다. 이에 제자 조광조가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김굉필은 어린 제자의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다.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실천적인 지성인으로서 선비 정신을 추구하였다.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오히려, 소극적인 행위로 비판한 의리 정신의 소유자였다.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그의 정신이 이어져 왔다.
임청대 누각
2. 임청대(臨淸臺)
옥천 서원 바로 옆에는 김굉필(金宏弼)과 조위(曺偉)를 기리는 금석각 비, 임청대가 있다. 두 분이 순천 귀양살이 때 돌을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임청이란 항상 마음을 깨끗이 가지라는 뜻으로 조위가 지었다고 한다. 주변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옥천변에는 임청정이란정자가 있다. 옥천의 물소리가 선비의 목소리를 닮은 듯 나지막이 흘러간다. 임청정 내부 천장 쪽에는 나무판에 김굉필의 글이 음각으로 세겨져 있다. 데크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옥천변을 거닐 수 있는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옥천을 따라가면 순천만 습지와 연결되는 동천과 만날 수 있다.
매계(梅溪) 조위(曺偉, 1454~1503년)는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이다. 1475년(성종 6)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차례 시제에서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고, 성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검토관·시독관 등으로 경연에 나갔다. 그 후 노모 봉양을 위해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491년 검상·장령 등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도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 대사성으로 지춘추관사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사초에 수록하여 올리자 원문대로 받아들여 편찬하게 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498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때마침 일어난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시고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의주에서 체포·투옥되었다. 오랫동안 유배되었다가, 순천에서 유배생활 중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임청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함경도 희천으로 유배됐던 김굉필은 희천에서 조광조를 제자로 받아들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천으로 이배 된다. 두 분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리고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의 당사자로 외로운 귀양살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는가? ‘임청대(臨淸臺)’라는 글자는 1565년(명종 20) 이황(李湟)이 썼다. 음기는 진사 정소(鄭沼), 공사를 맡은 사람은 진사 배숙(裵璹), 비는 당시 순천부사 이정(李楨)이 세웠다. 임청대에는 조선 전기 사화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으며 당시 유배되었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참조 : 다음)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산두, 김인후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하면서 호남지역 사림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 순천에서는 서원 근처 '임청대(臨淸臺)'에서 허염, 배숙, 정소, 정사익 등과 이학(理學)을 논하였는데 이들을 '승평 사은(昇平四隱)'이라고 부른다. 승평은 순천의 옛 이름이다.
김굉필 선생
3. 김굉필은 누구인가?
김굉필은 서울 정릉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대구 달성에서 자랐다. 어려서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남의 유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던 중 '소학'을 읽고 크게 감동하여 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남들보다 학업이 늦었는데 "학문에 늦고 빠른 것은 없다"면서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세수하고 앉아 책을 읽으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다면 나중에는 크게 발전할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 동자(小學童子)'라 불리었다. 그의 스승 김종직은 일찍이 그의 됨됨이를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학문을 할 수 없다면서 평생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고 한다. 주자는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라고 비유했다. 남들은 8세에 시작하여 10세에 놓는다는 '소학'을 그는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니, 그 토대와 심지가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다.
김굉필은 1480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의 천거로 남부 참봉에 제수되었고,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조직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제자로 맞아 학문을 전수했다. 조광조에 대하여는 아래 후기의 기묘사화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2년 뒤 순천으로 이배 되었다.
그는 순천에서 4년을 머물고 1504년 갑자사화로 극형을 당해 숨졌다. 향년 51세. 1575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경현록(景賢錄)』『한훤당 집(寒暄堂集)』『가범(家範)』 등이 있다.
전라도 순천(順天) 승평(昇平)에 있던 친한 후배 정여해는 병으로 항상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한 번은 정여해가 그를 찾아와 김굉필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문(上疏文) 초(草) 한 것을 보이고 그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그 상소문으로 자기 주변 인물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수령 약 500년 느티나무와 임청대 임청정 정자(임청정에서 옥천 시냇물 감상 가능)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다.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탄핵을 받고 1504년 10월 7일 순천 철물 시(鐵物市)에서 한양 금부도사는 효수(梟首)하라는 연산군의 명을 받고 사형을 집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죽은 뒤 그의 수급은 효수(梟首)되어 순천부의 철물 시장에 걸렸다. (위키백과)
갑자사화로 사형을 선고받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손질하여 낯빛을 변하지 않은 채,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었다. ”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하면서 초연히 참수를 당하였다.
그의 부인은 모든 원인이 책에서 출발했다고 통곡하면서, 집안에 있던 모든 책을 불사르고, 식구들을 거느리고 경남 창녕으로 귀향했다고 한다.
그는 옳지 못한 것을 참지 못했다. 학문 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무오사화 때 많은 동료들이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나, 다행히 그는 곤장 80대에 희천으로 귀양 갔다. 그 이유는 그의 스승 점필재 김종직이 그와의 인연을 스스로 끊었다고 한 것에 있었다. 개혁에 미온적인 김종직을 김굉필이 계속 종용하고 비난하자, 김종직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
김종직, 김굉필과 관련해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김굉필은 후일 스승과 소원해졌다고 한다. 그 사건이 김굉필의 형량이 사형 대신에 곤장 80대로 끝난 이유이다. 아래의 詩로서 스승을 비난하고, 스승은 詩로서 해명하였다.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스승 김종직이 시로 답했다. ‘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 했다. 이로부터 김종직과 갈라섰다.
무오사화를 촉발시킨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시말은 다음과 같다.
"정축(丁丑) 10월. 내(김종직)가 밀양에서 출발해 성주를 지나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묵었다.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훤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살해되어 침(郴) 땅의 강에 잠겨 있다’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꿈에서 깨어 놀라고 의아하다. 역사를 상고해도 강물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보내 그를 비밀리에 시해하고 시신을 강물에 던진 것인가. 이것은 알 수가 없구나.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위(弔慰)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필화(筆禍) 사건’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항우에게 시해당한 중국 초나라 의제(義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이 지었다. 여기서 정축은 1457년(세조 3) 그의 나이 27세 시기다. 김종직은 그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했다.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김굉필이 귀양살이 끝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두 건의 사화와 조광조가 연루된 기묘사화를 잠깐 살펴보자.
1) 무오사화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 부도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인 일이 있는데(남이의 옥사) 김종직은 평소 유자광을 혐오하고 경멸하였다.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유자광이 지은 시가 학사루 현판으로 걸린 것을 보고 떼도록 지시하고 불태웠다. 서자로 출신성분에 열등감을 가진 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을 증오하게 되었다. 후일의 '무오사화'의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연산군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다(부관참시).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김굉필도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경현문 (옥천서원 출입문)
2)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이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 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1479년(성종 10) 윤 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 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그 뒤 사건은 더욱 확대되어 윤 씨 폐위 및 사사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거나 방관한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죄를 묻게 되었다. 그 결과, 윤 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김굉필(金宏弼)등 10여 명 사형되었다.
임청정 정자
3) 기묘사화
1519년(중종 14) 11월에 일어 났다. 1506년 9월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조광조는 도학 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중종의 신임을 받은 조광조는 성리학으로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고대 중국 3대(하·은·주시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과거제 폐단을 혁신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사류를 등용해 유교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인 왕도정치는 구현 과정에서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많아 도리어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게다가 철인 군주(哲人君主)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강요의 인상을 주어 왕마저도 그의 도학적 언동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반정 중신으로서 조광조 등의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에 조광조 일파에 대한 기성 훈구세력의 불평불만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삭제 사건(反正功臣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즉 이 사건은 중종반정 공신 가운데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공신호를 박탈해야 한다고 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가 삭퇴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한 조처였다.
훈구세력의 남곤과 훈적(勳籍)에서 삭제당한 심정 등은 조광조의 탄핵을 받은 바 있는 희빈 홍 씨(熙嬪洪氏)의 아버지인 남양군 홍경주(洪景舟)와 손을 잡고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궁중의 나뭇잎에다가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 走肖는 趙의 破字)’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 그 문자의 흔적을 왕에게 보여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1519년 11월 조광조 등 일파가 붕당(朋黨)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이며 국정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를 밝혀 바로잡아주도록 하는 계를 올렸다.
이때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이라 홍경주 등의 상계를 받아들여 조광조 일파를 치죄하게 하였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곧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실패한 원인을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수단의 과격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뒷받침해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이상이 무산된 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앞의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김굉필 선생 글(임청정)
4. 마지막으로 김굉필 선생의 독서비법 7가지를 소개한다.
1) 기본이 되는 책을 먼저 읽어라 김굉필은 조선시대에 《소학》을 무려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학문의 기본을 익히고 나아가 학문의 참뜻을 깨우친 사람이다. 학문을 하기에 앞서 기본, 즉 좋은 습관을 만들고 부모에게 예를 다하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덕목을 함양하는 《소학》을 공부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2) 읽은 대로 실천하는 생활 실천형 독서를 하라 김굉필은 “글공부를 하여도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에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 다 하련다.”라고 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소학》은 거창한 학문이나 이론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와 행동에 대해 알려준다.
3) 독서의 밑바탕이 되는 인성 공부를 먼저 하라 김굉필은 기본 공부, 인성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학》을 공부의 시작이자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소학 공부는 모든 학문의 입문이요, 기초이며, 출발로 인간교육에 있어서 절대적인 원리가 된다.”라며 그 자신이 소학 공부에 매진했던 것이다.
4) 많이 빨리 읽기보다 숙독하라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하여 읽고 뜻을 음미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이치가 나타나면 곧 육미가 입맛에 좋은 것과 같을 것이니, 단단히 씹어서 소화시킨 뒤에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이렇듯 김굉필은 책을 읽는 법으로 정독과 숙독을 권장했다.
5) 개인의 학습능력차를 고려하라 독서는 책장을 빨리 넘긴다고 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 페이지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넘겨야 자신만의 지식이 될 수 있다. 김굉필이 정독과 숙독을 권하면서 개인차에 따라 독서를 달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굉필은 자녀와 제자들에게 독서교육을 할 때에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다.
6) 점차 단계를 높이는 하학 상달식을 추구하라
김굉필은 바로 살아가는 법을 공부하고 난 후에 점차 단계를 높이는 공부를 주문했는데, 이를 ‘하학 상달(下學上達)’ 공부법이라고 불렀다. 고상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의 몸가짐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공부에서 복잡한 공부로, 구체적인 공부에서 추상적인 공부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7) 가훈을 통해 집안의 기본을 바로 세워라 김굉필 가의 경우, 자녀들과 공유하고 싶은 중요한 정신을 가훈으로 만들어 세대를 이어 공유해 왔다. 김굉필은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가훈을 만들면서 자녀교육에 힘썼다. 김굉필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 자신이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서흥 김 씨 집안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가문에 오를 수 있었다.
옥천(임청정 앞)
요즘 국민들은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을 느끼고 있다. 정치가들이 근본 기본을 벗어나지 않고 소학의 정신으로 국민에게 진정으로 봉사하는 마음이 요구된다. 그 옛날의 한훤당 김굉필의 선비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쉽게 풀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