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로 복직 후,당일(1597년 8월 3일) 진주에서 구례 석주관에 도착하였다.
구례 석주관
시간이 없었다. 손인필을 만났다. 이순신의 ’ 조선수군재건‘을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배(피해: 총 180여 척 중 150척 전선 파괴, 약 10,000여 명 전사)했다. 그 여세를 몰아 전라도 전 지역을 장악 목표로 엄청난 속도로 서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천읍성
겨우 배설의 12척이 남아있는 상태(나중에 1척 증가)에서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었던 것이다. 조선수군을 재건하고자 조선의 운명을 걸고, 무기와 군사와 군수품을 끌어 모았다. 이순신은 수군(水軍)을 재건(再建)할 자신감(自信感)이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8월 3일 통제사(統制使)로 복직된 이후, 8월 8일 순천 읍성에 도착(장졸 60명 확보)했을 때 청야 책(淸野策)에도 불구하고, 소각되지 않은 관사의 병기류(兵器類)를 대거 수거할 수 있었다.
조양창 위치(보성군청 자료)
또한 보성의 조양창에서 다량의 식량을 획득했다. 전라 병마절도사 이복남이 8월 6일 남원성(南原城)을 지키기 위해 순천(順天)을 떠나면서, 청야(淸野)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청야전술이란 방어측(조선)에서 무기, 식량, 가옥, 우물 등 군수물자를 모두 불태우거나 매몰시켜 왜군의 진군을 어렵게 만들고, 이때를 틈타 공격하는 전술이다.
장군은 순천에서 획득한 장전(長壽)과 편전(片箭) 등 활과 화살, 화약 등을 군관들에게 져 나르게 하고, 총통(銃筒)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 쓰기 위해 깊이 묻어 두었다. 또한, 보성 고내마을의 조양창에서 무기와 봉인(封印)을 한 채, 온전히 남아 있는 군량미 600 섬을 발견했다. 장정 6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진주(晋州)에서 장수 9명과 군사 6명을 시작으로, 8월 9일 보성(寶城)에 도착했을 때는 정예병만 12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의병도 천여 명이 되었다.
난중일기 기준, 일자별로 주요 행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월 3일 : 삼도 통제사(統制使)로 복직(진주 손경례 집, ‘기복수삼도통제사교서‘를 받음). 구례 석주관에 도착, 손인필을 만났다.
8월 4일 :압록강원(곡성 오곡면 압록리)에서 점심 먹고 말의 병 치료했다. 오후 곡성에 도착했을 때, 관사와 마을이 비어 있었다.
8월 5일 : 곡성옥과 땅에 이르니 피난민들이 길에 가득했다.
8월 6일 : 곡성옥과에 유숙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은, 일본군은 선박으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악양에 정박하였다. 일본군 배가 바다에 가득하여 바다에 물이 없는 듯하다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섬진강을 건너던 시점(8월 4일~8월 6일경)이었는데, 구례로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터에 정박하여 있는 것을 보고 곡성을 거쳐 순천으로 우회하였다.
잠깐 구례와 남원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아찔한 장면은 일본군들이 8월 7일 함락된 구례읍의 난민을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장군의 행선로를 알아내고는 땅을 쳤다고 한다. 구례에는 석주관 칠의사 묘가 있다. 바로 눈앞의 이순신 장군을 놓친 것이다.
8월 7일 : 순천으로 가는데, 전라 병마사 이복남 군사가 괴멸하여 길에 줄을 이었다. 곡성 강정(석곡면 석곡리 능파정)에서 잤다.
8월 8일 : 부유창(순천 주암면 창촌리 군기 창고)에서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병사 이복남이 이미 명령하여 불을 놓았다. 구치(순천 주암면 서면 비월리)로 갔다. 순천읍에 도착하니, 성안에 인적도 없어 적막했다. 승려 혜희에게 의병장 직첩을 주고, 총통 등을 옮겨 묻게 했다. 장전과 편전은 군관들에게 나누어 소지하게 하고 순천부에서 잤다.
8월 9일 : 낙안 백성이 흩어져 달아난 까닭을 물으니, 병사 이복남이 적이 임박해 왔다고 전하고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까닭에 백성들도 도망하여 흩어졌다고 했다. 관사에 이르니 적막하고 인기척도 없었다. 순천 府使 우치적이 인사했다. 늦게 보성 조양(조성면 우천리의 조양창)에 가서 김안도 집에서 잤다.
8월 10일 : 보성 김안도 집에서 유숙했다.
열선루(보성군청 자료)
8월 11일~12일 : 양산항(영해 도호부사, 의병모집, 보성 열선루에서 논의) 집에서 유숙했다.
8월 13일 : 본영의 군기와 군량을 하나도 옮겨 싣지 않았기에 곤장 80대를 쳐서 보냈다. 정개 산성과 벽견 산성을 전라병사 이복남이 스스로 외진을 파괴시켰다는 소식에 비통하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옥과로 퇴각하였다.
이어 8월 12일 왜군 53,000명은 북진하여 남원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병사 5,000명과 명군 3,000명 그리고 군민 7,000명이 힘을 합쳐 3박 4일을 싸웠으나 결국 8월 15일 함락되었다.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전라병사 이복남도 전사했다. 기세를 이어간 왜군은 8월 19일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9월 16일 명량해전 대승으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해상 바닷길이 끊길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난중일기로 되돌아온다. 장군의 ’ 수군 재건의 길‘도 일본군을 우회하여 순천 보성에서 전라우수영이 있던 해남방향으로 군사와 무기를 끌어 모으며 나아갔다. 결과적으로 명량해전 장소가 이미 정해진 셈이다.
8월 14일 : 전라좌우후 이몽구가 왜적이 침입을 하지 않았는데도 관곡을 훔쳐 처자를 데리고 도망쳤다. 그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8월 15일 : 식후에 보성 열선루에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마리 말에 나누어 실었다.
광화문 광장 이순신 동상 옆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지 12일 만인 8월 15일, “전선이 너무 적어 왜적과 맞설 수 없으니 경은 육전에 의탁하라”는 선조의 유지(有旨)를 받았다. 그러나, 장군은 열악한 조선수군의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당일 (8월 15일) 전남 보성 열선루(列仙樓)에서 선조에게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장계(狀啓)를 올린다.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8월 16일 : 보성군수와 군관을 굴암으로 보내 피난 간 관리들을 찾아내게 했다. 오후에 궁장 4명이 들어왔다. (임란 초기 연전연승할 때의 부하들이 속속 집결했다.)
8월 17일 : 아침식사 후 장흥 백사정(회천 명교 마을)에 갔다. 오후 군영구미(회첨면 전일 2리, 군학 마을, 복직 뒤 출항한 곳)에 갔다. 경내가 무인지경이다.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오지 않았다. 장흥 군량을 감관과 색리(하급관리)가 모두 훔쳐갔다.
8월 18일 : 장흥 회룡포(회진항)에 도착, 경상 수사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대므로 만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보성의 해안가 마을(軍營仇未, 군영구미)에서 이 마을 출신 김명립과 해상 의병(海上義兵) 마하수가 구해온 어선(漁船) 10여 척에, 식량과 무기를 싣고 바다로 나가 이튿날인 8월 18일 장흥 회룡포(회진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칠천량 해전에서 빠져나 온 배설의 판옥선(板屋船) 12척을 수습했다.
8월 19일 : 회룡포 만호가 전선(戰船)에서 음식을 받아다가 사사로이 내준 까닭에 곤장 20대를 쳤다.
8월 20일 :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고 신음하였다.
8월 21일 : 구토를 10여 차례 하고 밤새도록 고통스러웠다.
8월 22일 : 곽란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8월 23일 : 배에서 내려 포구 밖에서 잤다.
8월 24일 : 어란 앞바다 가운데서 배에서 잤다.
8월 25일 : 당포의 어부가 소 2마리를 훔쳐 끌고 와서는 잡아먹으려고 왜적이 왔다고 허위 경보를 하였다. 배설은 이미 도망을 갔다. 허위 경보한 두 사람의 목을 베어 효시하고 순회하여 보이게 하였다.
8월 26일 :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배 1척을 가지고 왔다.(총 13척이 됨)
9월 2일 : 배설이 도주했다.
9월 9일 : 적선 두척이 어란에서 곧장 감보 도로 와서 정탐하였다.
9월 11일 : 홀로 배 위에 앉아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9월 14일 :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9월 15일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이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 한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훈시했다. 조금이라도 군율을 어기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명량해전 위치(광화문 광장 이순신장군 이야기 전시장)
9월 16일 : (명량대첩 당일)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뒤로 물러선) 우수사 김억추 배가 2 마장(0.8km) 밖에 있었다. 얼굴빛이 질려있었다. 흔들리지 말고 심력을 다해 쏘라고 했다. (뒤로 물러서는) 거제현령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 들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했다.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장군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그들이 돌격했다. 적 3척을 격파하였다. 항복 왜인 준사가 바다에 빠져 죽은 적장 ’마다시’를 확인하고 난 후 토막을 내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31척을 격파하자 적선들이 후퇴하고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잤다. 실로 천행이다.
9월 18일 : (조선군 피해상황) 순천 감목관 김탁과 종 계상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과 봉학 및 강진 이극신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학익진 장사진 (이순신 장군 이야기 전시장)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12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불과 13척(정예 해군, 거북선이 없는 판옥선, 12척에서 1척 가세함)의 전선(戰船)과 초탐선(哨探船, 정보수집선) 32척으로, 진도와 해남 사이 울돌목에서 133척의 왜 선단과 맞서, 31척을 격침(擊沈)시켰다. 13척의 판옥선과 32척의 초탐선 뒤에는 전투력이 약한 피란민들의 100여 척의 향선(어선)들이 포진하였다. 해상 의병들이었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판옥선 (이순신장군 이야기 전시장)
조정의 지원을 받기는커녕 수군 철폐령까지 내려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전남 일원의 군사와 무기와 식량으로 조선 수군 재건과 왜군 격파에 성공하였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후 1년쯤 지난, 1593년 7월에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절상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竊想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이는 "혼자서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며 장벽입니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습니다"란 뜻이다. 장군의 말씀처럼,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湖南이 기어코 해냈다.
일본군은 정유재란(1597~1598년) 당시 1598년 8월 18일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였으나 조선에 있던 왜군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사기 저하 및 왜국 내부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명량대첩에서 대패하였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사로병진작전을 펼쳐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울산, 사천, 순천지역 왜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은 수세에 내몰렸다.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두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