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우연히 순천 ‘팔마비 누각’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의 길‘이란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었다. 순천만 습지를 둘러보고 팔마비 옥천 서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팔마비에 온 김에 근처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순신 장군의 ’ 백의종군의 길‘ 안내표지 위치나 표지석을 물어 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도 ’ 백의종군의 길‘이 궁금해서였다. 광화문 광장 지하 이순신장군 이야기 전시장 방문하고 난중일기를 읽어 보고, 어제는 한산대첩을 다룬 ’한산-용의 출현‘을 관람했다. 義와 不義의 싸움이란 대사가 마음에 와닿는다. 글의 내용이 생각보다 길어져 몇 차례 나누어서 보고 드려야 할 것 같다. 백의종군의 길을 난중일기를 통해 전남 순천 일대 당시 상황을 알아본다.
백의종군(1597년4월 3일~8월 3일, 약 120일)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 수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해올 것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에 1597년 2월 26일에 ‘조정을 속이고 적을 치지 않았다’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죄상은 3가지다. 첫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무시하였다. 둘째, 적을 치지 않았으므로 나라를 저버렸다. 셋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모함하였다. 물론 사후에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내린 판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된 후 3월 4일부터 4월 1일까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선조는 풍전등화 난파 직전의 조선을 구하기 위해 28일 만에 이순신 장군을 석방하고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처분을 내렸다. 종각역 1번 출구 SC제일은행 본점 앞에는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라는 표지판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의금부가 있었던 자리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이란 실제로 흰옷을 입는다는 뜻이 아니고 관직이 없는 신분인 보직해임을 관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난중일기에 기술한 대로 계속 중요 직책을 가진 인물들과 접촉하고, 지속적으로 고급 정보를 수집하고, 만일의 경우 복귀 후 일본군과 결전을 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53세의 나이로 한성(서울)을 출발한 후 경상남도 초계(합천)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의 부하로 백의종군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120일간 경기-충청-전북-전남-경남 합천 율곡까지 험난한 행군과 권율 장군 막하에서 백의종군 끝에 8월 3일 경남 진주의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년) 7월 15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의 대배(피해: 180척 중 150척 이상 피해 , 온전한 전선은 13척. 약 10,000명 이상 전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순천에 17일간 오래 머문 것은 도원수 권율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훗날 통제사 복직 후 수군재건을 위하여 이동할 때 순천 보성 일대에서 장전(長壽)과 편전(片箭) 등 활과 화살, 화약과 총통(銃筒)과 군량미를 획득하여 명량대첩 대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순천 낙안 보성은 장군에게 낯선 곳이 아니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전라좌수영의 5관(순천, 흥양, 광양, 낙안, 보성), 5포(사도, 여도, 녹도, 방답, 발포)를 둔 수군기지의 장을 이미 역임했었다. 백의종군의 길 중도 작성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과거 장군의 부하였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관직을 내려놓은 백의종군 중이었지만 군사, 무기, 군량미 등과 왜군의 움직임 등에 대한 정보를 계속 수집했다. 장군에게는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가장 힘든 시기에 힘이 되어 적극적인 지원을 한 인물은 구례 현감 이원춘과 손인필 등이었다. 특히 구례 손인필은 장남인 손응남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따라 노량해전에서 순절했다. 손인필 비각이 구례군 봉북리에 있다. 군수품 조달과 군인 모집을 하였다. 그리고 순천 府使 우치적은 노량대첩에서 까지 적극적으로 장군을 보필했다. 또한 副使 한효순과 정원명 등이 장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백의종군 주요 이동경로는 아래와 같다.
참고로, 당시 작전지휘권의 상하관계는 도체찰사(이원익, 우의정)>도원수(권율)>통제사(이순신/원균)>수사이다. 일자별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597년(정유년)
2월 26일 : 한산도에서 한양(서울)으로 압송
3월 4일 ~ 4월 1일 : 한양 의금부에 투옥
4월 1일 : 백의종군 처분
4월 2일 : 주요 후원 인물들과 만나고 위로 받음. 영의정 유성룡 집 방문
4월 3일 : 백의종군 출발(의금부), (금부도사 3인이 채근하여 서둘러 백의종군 출발)
4월 11일 : 모친 사망-어머니가 배를 타고 아들을 보러 아산으로 오다가 안흥량에서 별세
(아산 행적 : 4월 5일-장군 아산 도착 4월 13일-모친 운구에 달려 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그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4월 17일-의금부도사가 갈 길을 재촉했다 4월 19일-어머니 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했다)
4월 25일 : 남원 도착
4월 26일 : 구례 도착
4월 27일~5월 13일 : 순천 (17일) 체류
5월 14일~5월 25일 : 구례 (12일) 체류, 금부도사 일행 백의종군 감시 종료(5월 14일 임무 종료 후 한양으로 복귀)
5월 26일 : 악양(경남) 도착
6월 5일 : 경남 합천군 율곡면 초계, 권율 장군의 도원수부(都元帥府)에 도착
6월 8일 : 도원수 권율 장군 만남(백의종군 처분 후 67일 만임)
7월 15일:원균 칠천량 해전 패배(원균, 고성 추원포에서 전사)
8월 3일 :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 복직(경남 진주 손경례 집)
8월 7일 : 순천으로 이동 중, 곡성 강정(석곡면 석곡리 능파정)체류
8월 8일 : 순천 읍성에 도착 <장전(長壽)과 편전(片箭), 총통(銃筒) 확보>
8월 9일 : 낙안/보성 조양창 ( 창고, 식량 무기 확보)
8월 10일 : 보성 조양창
8월 11일~13일 :보성 박곡(득량면 송곡리)
8월 14일~15일 : 보성 열선루 (8월 15일장계 狀啓 올림)
“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8월 18일 : 장흥 회룡포(회진항)에 도착
9월 16일 : 명량대첩(鳴梁大捷)
1598년(무술년)
11월 19일 : 노량대첩, 이순신 장군 전사 (종전)
난중일기 기준, 순천 구례 체제기간 중의 주요 사안을 일자별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구례 석주관성은 호남 방어의 주요 요새이다. 손인필은 아들 숙남과 함께 이순신 막하에서 임진, 정유의 난 때 전공을 세워 군자감 첨정 관직 받았다고 한다. 손인필 석주관 비각이 구례군 봉북리에 있다. 구례 석주관은 순천 일대 백의종군 출발점이다. 주로 국도 17호 순천로와 나란히 이어진다. 황전면에서 송치에 이르는 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 강변으로 길이 나있다. 편도 약 38km다.
순천읍 성터 지도 (순천 웃장 로터리 남측 보도옆)
1. 순천 체류 기간(1597년 4월 27일~5월 13일, 17일)
4월 25일 : 남원 운봉의 박롱집에 들어갔다. 권율(도원수) 장군이 이미 순천으로 향했다고 들었다.
4월 26일 : 구례 손인필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27일: (장군은 도원수 권율 장군이 순천으로 향했다고 해서 도원수를 만나기 위해 순천으로 향한다.) 송치 (순천 월등면 계월리 일대 고개) 아래에 도착했다. 구례 현감(이원춘)이 사람을 보내어 점심을 지어먹고 가게 했다. 송원 도착(순천 서면 운평리 솔원, 선평 삼거리로 추정)했다. 저녁에 순천 정원명 집에 도착했다. 저녁에 순천 府使 우치적(한산도, 왜교, 노량해전에서 전공 세움, 왜란후 제10대 삼도수군통제사)을 만났다.
28일: 권율 장군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몸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 ‘고 했다.
29일:전라 병사 이복남이 권율 장군과 의논을 위해 관부로 들어왔다고 한다.
30일: 전라 병사 이복남이 원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백의종군로 표지주(출처 : 다음 인터넷)
5월 1일 : 비가 계속 내렸다. 권율 도원수(장군)이 정사준 집에서 순찰사(박홍로), 전라 병사(이복남)와 모였다.
2일 : 권율 장군은 보성으로, 순찰사(박홍로)는 담양으로, 병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옛 부하가 눈물을 흘리며 원균 일을 이야기했다. 홀로 순천부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견디랴.
3일 : 아침에 둘째 아들 이름을 울에서 열로 고쳤다. ‘싹이 처음 생기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뜻이다. 글자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4일 : 오늘은 어머님 생신이다. 애통함을 어찌 견디랴.
5일 : 옛 부하가 한산도에서 ‘원공의 흉포하고 패악함’을 많이 전했다. 장졸들이 이탈하고 반역한다. 어머니의 장례도 못 치르고(4품 이상 관리는 3개월 후 장례를 치른다. 장군은 113일 만인 8월 4일 가족이 대신 장례를 치렀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다.
6일 : 꿈에 돌아가신 두 형님을 만났다. 애통함이 간절하다. 저녁에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는데, 원균(흉악한 자)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7일 : 정혜사(서면 청소리 계족산 절) 승려 덕수가 미투리를 주어, 값을 주었다. 미투리는 정명원에게 주었다. 서산 군수가 한산도에서 와서 흉악한 공(원균)의 일을 많이 이야기했다.
8일 : 흥양의 종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망아지에 안장을 얹어 정상명(정원명의 동생)이 타고 갔다. 원균이 서리의 아내를 탐하려고 했다. 나를 훼방하는 것이 날로 심하다.
9일 : 순천의 과거 급제자 강승훈이 응모해 왔다.
10일 : 주인(정명원)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어왔다. 녹도 만호가 삼, 종이를 보내왔다. 전라 순찰사(박홍로)가 백미, 중미, 각 10말과 콩 소금을 보낸다고 했다.
11일 : 체찰사(이원익)의 군관이 화살대를 구할 일로 순천에 왔다. 흉악한자(원균)의 일을 많이 전했다. 정명원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어왔다.
12일 : 저녁에 향사당에 가서 副使(한효순)과 밤늦게 이야기하였다. 정사립과 양정언 등이 와서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13일 : 순천 副使(한효순)이 이르기를 이원익 도체찰사가 보낸 편지에 이순신(영공)의 일에 대해 많이 탄식했다고 한다. 府使(우치적)이 노자를 보내주어 미안하다.
14일 : 副使(한효순)가 부유(주암 창촌리)로 돌아갔다. 아침을 먹고 길에 올라 송치(순천 학구리) 밑으로 가서 말을 쉬게 하고, 혼자 바위에 앉아 한동안 곤하게 잤다.
저물녘 찬수강(구례군 강물, 섬진강)에서 말에서 내려 구례현의 손인필의 집에 가니, 현감(이원춘)이 바로 보러 왔다.
2. 구례 체류 기간 (5월 14일~5월 25일, 12일 체류)
구례 손인필 비각(출처 : 오마이뉴스)
4월 26일 : 구례 손인필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5월 14일 : 구례 현 손인필 집에 도착. 구례현감 이원춘이 왔다.
5월 15일 : 지대가 낮아 파리가 벌떼처럼 몰려들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5월 16일 : 도체찰사(이원익)가 내일 곡성을 거쳐 구례로 와서 며칠 뒤 진주로 간다고 한다.
5월 17일 : 도원수 권율이 운봉으로 가지 않고 명의 양원을 만나기 위해 완산(전주)으로 달려갔다. 내 행색이 엉망이라 민망스럽다.
5월 20일 : 도체찰사 이원익을 만났다. (이원익이 상제인 이순신 장군을 만나기 위해 소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원균 관련 토로했다.)
5월 21일 : 의금부의 비리를 말하다. ‘바치는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을 정한다 ‘ 고 개탄했다.
구례 손인필 비각 장군상(출처 : 영남일보)
5월 22일 : 구례 손인필 부자, 핵심 참모 배흥립 만났다. 구례현감 이원춘 만났다.
구례 석주관
5월 23일 : 정사룡 이사순이 원공(원균) 관련 일을 많이 전해 주었다.
5월 24일 : 체찰사 이원익의 군관에게 체찰사의 청에 따라 경상우도 연해안 지도를 그려주었다.
5월 25일 : 비 때문에 가기를 멈추고 혼자 시공 집에 기대어 있으니 떠오르는 생각이 만 가지다.
5월 26일 : 비가 퍼부었다.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악양 이정란(전주성 수성에 공헌하여 공주목사 됨. 행정능력 부족으로 파직. 전주부윤으로 성을 지킴) 집에 당도했는데,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아들 열을 시켜 말하여 억지로 들어가 잤다. 행장이 다 젖었다.
권율 장군 도원수부 (합천 율곡 초계, 출처 : 순천신문)
6월 5일 : 아침에 구례 사람과 하동 현감(신진)이 보내준 종과 말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경남 합천군 율곡면 권율 장군의 도원수부(都元帥府)에 도착(548㎞ 길)
이순신 장군 기거지(합천군 율곡면 낙민리 이어해 집) (출처 : 순천신문)
6월 8일: 도원수 권율 장군이 진영에 도착하여 내가 바로 가서 만났다. (도원수 권율을 백의종군 후 처음으로 만났다.)
6월 9일~ 8월 2일 : 도원수 권율 장군 진에서 근무
(주요 활동:도원수 군사업무 관련 자문역할, 둔전 경영-군사 식량 위한 무밭 갈고 심는 감독관, 칠천량 해전 패전 후의 수군 상황 파악)
진주 손경례 가옥 (다음 인터넷)
8월 3일 : 삼도 통제사(統制使)로 복직(진주 수곡면 원계리손경례 집에서 ‘기복수삼도통제사 교서‘를 받음) 구례 석주관에 도착, 손인필을 만났다.
다음 회에는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로 복직 이후의 일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