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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Sep 02. 2022

청백리 하면  순천 팔마비다!

순천만 여행(2)

   전남 순천의 팔마비(八馬碑)는 청백리(淸白吏)의 청렴결백(淸廉潔白) 표상이다.


   전남 동부에 가면 조심해야 할 ‘3대 금지 사항’이 전설처럼 내려온다. “여수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 “


   여수는 항구도시여서 부자가 많았고, 벌교에는 운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벌교역전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건달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용맹성이 있다.


   순천에는 훌륭한 인물 인재 미인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그 유래가 팔마비에서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팔마로 시작되는 교육기관명으로는 대학교 이름을 제외하고 다 있다. (참고 OO=팔마, OO유치원, OO초등학교, OO 중학교, OO고등학교) 팔마비는 순천인들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팔마비 앞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이 지나가셨다. 그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할 때인 1597년 4월 27일부터 5월 13일까지 순천에서 17일간이나 머물렀다. 8월 3일 삼도 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었을 때 수군재건을 위하여 8월 7일부터 9일까지 재차 순천을 방문하였다.


   순천에서 획득한 장전(長壽)과 편전(片箭) 등 활과 화살, 화약 등을 군관에게 져 나르게 하고, 총통(銃筒)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 쓰기 위해 깊이 묻어 두었다. 승려 혜희 스님은 장군으로부터 의병장 직첩을 받았고, 총통 등을 옮겨 묻었다. 순천 府使 우치적은 백의행군중인 장군에게 각종 귀중한 정보와 노자돈을 주는 등 적극적 협조자였다. 헌신적인 지원과 보리밥을 지어주며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준 정명원은 난중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916,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대승한 귀중한 자산이 된 것이다. 불과 13척(거북선이 없는 판옥선, 12척에서 1척 가세함)의 전선(戰船)과 초탐선(哨探船, 정보수집선) 32척으로, 진도와 해남 사이 울돌목에서 133척의 왜 선단과 맞서, 31척을 격침(擊沈)시켰다. 임진왜란에서 전세를 뒤집어 승기를 잡았던 쾌거였다.

그 출발지역 중의 하나가 순천이었다.

죽도봉 팔마비 상

    팔마비는 서순천 나들목에서 선평 삼거리 가곡 삼거리 순천대학교 웃장을 지나 중앙로를 따라 내려오면 중앙시장 건너편 ‘문화의 거리’ 근처 ‘행동 우체국’ 옆, 순천문화재단 앞에 위치해 있다.


   고려 말의 청백리 최석(崔碩)의 송덕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1281년(충렬왕 7)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이 고려의 수도 개경에 비서랑(秘書郞, 고려 종 6품 벼슬)으로 전직하게 되었다. 승평은 순천의 옛 이름이다.     


   승평부의 풍속에 읍의 수령이 갈릴 때마다 반드시 말을 주었는데, 부사(府使)는 8 필, 부사(副使)는 7 필, 법조(法曹)는 6 필씩 마음대로 골라가게 하였다. 관리의 임기가 3년이면, 3년마다 돌아오는 행사였다. 말 1 필이 자동차 1대의 값으로 계산해 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자 관례에 의하여 고을 사람들이 말을 가지고 와서 최석 부사에게 고르기를 요청했다. 최석은 “개경까지 (식솔과 세간 살림살이의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여) 가면 되지 말을 골라서 무엇하겠느냐”면서 아무 말이나 골랐다. 개경에 도착한 후 최석은 말 8 필에다가 도중에 낳은 망아지까지 9 필을 다시 순천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아전이 극구 받지 않자, 최석은 “네가 받지 않는 것은 내가 욕심이 있는 줄을 알고, 내가 겉으로만 사양하는 체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하면서 말을 정중히 되돌려줬다. ’ 되돌려 주었다’는 뜻은 가족과 일부 세간살이를 옮기기 위해 말을 개경까지 잠시 빌려 운송수단으로 사용한 후에 말을 다시 승평부 읍민에게 반납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관례에 따른 ‘부의 축재’ 기회를 과감히 거부하였다. 단지 운송수단으로써만 ‘잠시 빌린 후' 다시 그 지방민에게 원위치시켜 준 것이다. 잠시 빌린 사용료를 자신 소유의 말(망아지) 1 필로 승평 읍민들에게 지불한 셈이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과히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었고, 후대에 백성과 관료 전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관료들에게는 백성들에 대한 예의와 청렴성의 기준을 높여 주었다. 그후 백성들이 관료들에게 보다 엄격한 근무 태도와 도덕성을 요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의 청렴성이 백성의 관료에 대한 평가 잣대 기준이 되었다. 관료들이 백성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팔마비와 누각

   후 헌마(獻馬) 폐습이 없어졌으며 1308년(충렬왕 34년)에 승평 사람들은 최석의 청렴한 뜻을 칭송해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 이 비는 한반도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및 청덕비(淸德碑)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팔마비 설명판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승평부사 최원우가 고쳐 세웠고,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다. 1616년 지봉유설의 저자이자 당시 순천부사 이수광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수광이 <동국여지승람>을 읽다가 최석의 팔마비에 대해 알고 사모하게 되었다. 1616년(광해군 8년)에 순천 부사로 와서 그의 흔적을 찾으나 이미 정유재란(1597)으로 소실되었고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이수광은 고을의 원로와 민들과 협력해 고려시대 당시 받침인 대석에 비를 1617년 재건하고, <중건팔마비음기(重建八馬碑陰記)>를 지었다.      

남문 연자교 옆 팔마비 (일제 강점기, 출처 : 위키백과)

   말의 숫자와 망아지의 출처에 대한 오류가 있다고 한다. 설명문에는 "그동안 낳은 새끼 말까지 더하여 아홉 마리를 되돌려 보냄으로써"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칫 최석 개인 소유의 암말이 아닌, 헌마 한 말이 낳은 망아지로 오해할 수도 있다.


   팔마탑의 경우도 "上京한 뒤 그동안에 낳은 새 말 한 마리를 더하여 아홉 마리를 되돌려"라고 돼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의 "吾守汝州, 吾有牝馬生駒"에서 보듯이 당시 최석이 승평 재직 당시에 그가 소유한 말이 낳은 망아지이다. 그는 받은 8 필의 말에다 자신 소유의 망아지 한 마리까지 보태어 돌려주는 결연함으로 헌마 관행을 근절시켰다. (출처 : 오마이뉴스)


  " 내가 (승평)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내 소유의)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출처 : 위키 백과)


   원래 이 비는 남문 연자교 옆에 있었으나 하천공사로 100m  북쪽 현 위치(행동 우체국 옆, 순천문화 재단 앞)로 옮겼다. 2021년 보물(제2122호)로 지정되었다.(참조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참고 자료 :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 위키백과

-. 오마이뉴스 (2017.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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