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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Sep 08. 2022

이순신 장군(3)  귀무덤과   노량대첩

순천만  여행(5)

전회 '수군 재건의 길과 명량대첩'에 이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침부터 혹은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아래의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기에는 좀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무덤 봉환을 공론화하고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 일부라고 생각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교토의 귀무덤

1) 귀무덤

   잠시 화재를 돌려 본다. 란 시, 왜군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 및 전공을 보고할 목적으로 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왜국으로 보냈다. 왜국 내 각 지방으로 순회하여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장수들끼리 충성 경쟁을 시켜 급기야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살아 있는 조선인의 코나 귀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라다 갖다 바쳤다. 그 수량을 확인한 코와 귀 영수증도 있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 왜군부대끼리 벌어진 것이다.  


   옛날 할머니는 방닥에 기어 다니던 어린 손주가 시벌건 놋쇠 화롯불에 손을 대려고 하면 기급을 하면서, "애비! 애비!"하면서 주의 경고를 주었던 일이 있었다. 위험한 순간이나 행동에 대한 주의 경고였다. "조심해! 위험해! 안돼!"의 의미다. 일설에는 '귀와 코를 조심하라!'는 의미의 '애비(耳鼻)!'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비'가 '애비'로 된 셈이다.


   그 후에 일본 전국을 순회시키고, 교토를 비롯 5군데 정도에 영혼을 위로한답시고 무덤을 만들었다.  약 20만 명이 귀무덤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한을 품은 원혼이 해를 끼칠 것을 두려워하여 무덤 위에 5층 돌탑을 올렸다.  원혼의 기를 누른다고 돌탑을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아래 글은 제가 일본에 체류 시 귀무덤의 실체가 궁금하여 교토에 있는 귀무덤을 직접 탐방하였다. 저의 ’ 교토 여행기‘(2017.04.29. 귀무덤 방문, 2021.11.12. 브런치에 게재)에서 언급된 귀무덤 탐방 소감 내용이다. 귀무덤 현장을 목격하니, 부르르 가슴이 떨렸다. 내 안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귀 코 무덤 안내 간판 (무덤 옆)

   “더구나 혼을 위로는 못할 망정그 기를  눌렀다는 층 석탑은 정말 잔인함의 극치였다 그 무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추모한다는 사당에서 불과 100미터 밑의 지근거리에 있다는 것이  여행 내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앞으로 정부는 귀무덤의 반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여그곳에 묻힌 조상님들을 다시 모셔와야 한다. 범국민적인 운동을 펼쳐서 관철시켜야 한다그런 비인간적인 상황을 방관한다면 어찌 일국의 국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 어서 하루빨리 국립묘지에 다시 모셔져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당이란 풍국사 앞에서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경이 일었다.”     

귀 코무덤 위치(붉은색에서 좌 하)

   1592년 임진왜란~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 교토에 위치한 ‘귀무덤’은 12만 6천여 명의 조선 병사들과 무고한 조선 백성의 코와 귀를 베어가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순천 예교성(순천 왜성)을 중심, 일본군의 만행으로 순천 일대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보았다.     


   최근 순천 시민들이 귀무덤 봉환 추진을 위한 시민모임을 열고 추진본부를 발족했다. 아래 글들은 순천 시민의 목소리를 담은 언론사들의 기사 내용이다.     


   “70여 명의 순천시민이 만든 가칭 "귀무덤 봉환 추진 시민모임"의 대표는 호남 그중에서도 순천의 희생이 가장 컸던 순천왜성 일대에 희생된 조상님들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임 대표는 "교토에 우리 대표단을 파견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주한 일본 대사관 및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관 등에 우리의 요구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겠다”라고 밝혔다. “앞으로 귀무덤의 역사적 사실 확인과 반환 요구의 국제법상 타당성 등을 알리는 학술대회 등을 열어 합리적 근거를 마련해가겠다"라고 했다. (출처 : 전라도 뉴스 2020.11.12.)

      

(사)귀무덤 봉환 추진운동본부 발대식(순천, 출처 : 추진본부 제공)

   그 시민모임 이후에, ”(사)귀무덤 봉환 추진운동본부는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계 전문 교수 등과 함께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 (출처 : NEWSIS 2022.03.30.)      


   일본 측이 귀무덤 봉환 추진에 대해 그동안 그들의 문화사적지로 지정돼 있어 손을 댈 수 없다고 주장해왔으나, 일본 내 정치권과 시민단체에서도 변화 움직임이 있다. 최근 하토야마 일본 전 총리가 귀무덤에 참배한 뒤 선조들의 과오를 사죄했고, 교토 내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추모제를 지내기도 했다. (출처 : 남도 방송, 2022.03.31)


   향후 남북한이 연대하여서라도  범민족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반드시 귀무덤 봉환을 성사시켜야 한다.


(추가 : 이하는 2022.09.15일 자 연합 뉴스 기사 요약입니다)

   전남 진도 왜덕산(倭德山)에는 울돌목에서 벌어진 명량해전 때 목숨을 잃은 왜군 수군들의 무덤이 있다. 큰 피해를 봤지만 진도사람들은 해변으로 밀려온 100구가 넘는 시신들을 거두어 양지바른 야산에 묻어준 것이다. '왜인들에게 덕을 베풀어주었다'는 의미로 왜덕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국 진도문화원과 일본 교토 평화회가 참여해 생명평화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왜덕산 등을 주제로 한 국제 학술회의가 9월 23∼24일 진도에서 열린다.  이 학술회의 마지막 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일본 총리가 왜덕산 위령제에 참석, 추모사를 하기로 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토아먀 전 총리는 지난해 11월 8일 부인과 함께 교토 이총을 찾아 참배하고 고개를 숙인 바 있다. 전 총리는 당시 "가해자는 가해 역사를 쉽게 잊지만 피해자는 그렇지 않다"며 "피해자가 '이제 됐다'라고 할 때까지 일본은 지속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라고 했다. (연합 뉴스 20220915)    


   이번 기회에 정부 국회 (사)귀무덤 봉환 추진운동 본부 및  진도문화원은 일본정부 일본 의회 교토 평화회 및 하토야마 전 총리등과  왜덕산 왜무덤과 교토 귀무덤을 맞교환 형식의 봉환 추진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성사하여 주시면 좋겠다.


장군 일대기 중 노량해전 자막(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 이야기 전시장)

2) 노량대첩

   본론으로 돌아가서, 명량대첩 승리 원동력은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 리더십, 조류의 이용 등 다양하다. 다른 승리 요인으로서는 13척의 판옥선의 위력이다.


   첫째는 전투원과 비전투요원인 노를 젓는 역군의 역할을 분명히 갈라놓고 각자는 자기 임무에만 집중하였다는 것이다. 노를 젓는 격군의 피로도를 줄여 주어 학익진 등 전투 형태의 빠른 변경이 가능하여 적을 쉽게 제압했다고 한다. 둘째는 조선의 판옥선이 왜선보다 더 커고 튼튼하였으며, 조선수군 전투원들이 왜선보다 높은 위치에서 적을 내려다보고 전투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수군에게는 대형 화포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조선군의 전술에 주목한다. 즉, 적 지휘선이나 선봉선에 화력을 집중하여 승기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일자진, 학익진 등을 채택한 후 닻을 내려서 조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힘을 비축하였다가 적 출현 시 힘을 몽땅 쏟아붓는 전술이다. 그리고 조류와 바람을 이용하는 화공작전을 잘 구사하였다. 마지막으로 의병들의 참전과 활약이다.     


   명량해전 후에도 일본군은 다시 서진하여 서남해안 지방을 유린하였다. 그 피해는 전술한 바와 같다. 장군은 군사력을 집중적으로 끌어올렸다. 명량대첩(9월 16일) 직후 조선 수군은 약 1,000명이었다. 고하도 주둔기(1598년 무술년. 2월)에는 약 2,000명, 9월 명과의 연합(조선과 명의 육해군 총 약 113,000명, 조선군 21,000명, 명군 92,000명) 작전인 사로병진작전시 조선수로군은 7,300명으로 증가되었다.(명 수군은 19,400명)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은 1598년 6월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울산, 사천, 순천지역 왜성을 조선과 명 연합군이 네 군데 길로 나누어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즉, 동로 군은 울산. 부산 지역의 왜를 공격하였다. 중로군은 사천. 고성. 창원 지역의 왜군을. 서로 군과 수군은 순천. 남해지역의 왜군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특히 순천 왜성(예교성)에서 조선. 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혈투가 벌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순천 왜성 일대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귀무덤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드디어 1598년 81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서둘러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철수하는 중 막바지에 노량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군이 본국으로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1598년 11월 18일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 관음포로 향했다. 그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첫째, 관음포를 왜군들이 큰 바다로 오인하여 퇴로로 잘못 착각하여 진입했다는 것이다. 둘째, 왜군이 막다른 곳이 줄 알았지만 전세가 불리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동하는 도중이었다는 것이다. 셋째, 이순신의 전술로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노량해전(둥근 검은 점)

   노량 해전(露梁海戰)은 1598년 1119(선조 31)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하동. 노량/관음포)에서 일본의 함대를 괴멸적 수준으로 격파한 전투이다.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 군은 결국 패주 하여 도망을 갔다.      


   조선(70여 척)과 명(400여 척)의 연합함대와  일본군 전선 500척이 격돌했다. 일본군은 150여 척이 파손되고,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었다.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나, 결국 100여 척이 나포되고 50여 척만 일본국으로 돌아갔다.      


   조명 연합함대는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경남 남해군)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주요 해전 위치도

   그리고 우리의 성웅도.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공은 이제 우릴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통곡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한국인들에게 영웅을 넘어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위인은 오직 이순신 장군 한 분뿐이다.  끝.  


이순신 장군 편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정보>

난중일기 (교주본) : 노승석 역주(2021.03.18. 인쇄)

이순신 백의종군   : 제장명 저 (2011.4.19.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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