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 시장
오늘은 구지면의 하나뿐인 오일만에 돌아오는 장날이다. 우시장 옆의 큰 솥에서는 육개장 국물이 펄 펄 솟으며 끓고 있었다. 점심때 오래간만에 만난 어른들은 어른대로, 청년들은 청년들대로,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아주머니대로 친목계 이야기, 누구 시집 장가갔다는 이야기, 아들놈, 딸들 혼수 이야기 등 떠들썩하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중학교 사학재단 비리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왔다.
“씨부럴 놈들이 농촌 사람들을 홍어 머로 본단다카이”
“학교 구내서점에서는 학생들 참고서를 비싸게 받아 처먹고서는 그 차익을 재단에 몽땅 가져다 바쳤다 안카나”
“육성회비를 해마다 올려 받고, 그 돈은 고스란히, 재단 이사장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카이”
“아들 과학 시간에 실험 한번 해 본 적 없다고 안카나”
바른말하는 선생들을 가차 없이 쫓아 내 버리는 교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였으며, 선생들 간에도 파벌을 유도하여, 학교 내 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자금난 교원 부족 시설미비 등으로 학생들 수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학교일을 보는 임시직 급사는 3개월도 못 버티고 퇴직했다. 혼자서 낮에는 여기저기 고장 난 수도꼭지 교체, 교문 담장 보수, 잡초 뽑기, 시험 기간 중에는 청사진 복사기로 시험문제 프린트, 밤에는 야간 경비까지 해야 했으니, 철인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벌써 3년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은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거나 점심시간에는 항상 웅성웅성, 뭔가 터질 듯한 분위기로 위태 위태하였다. 학부모회의 결론은 사학재단을 공립으로 전환하여, 학생들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학부모 대표가 도의 교육감과 면담했다. 그러나
“지금 도나 군에서 국가의 재정적 어려운 형편에 사학 재단을 인수하기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
는 것이었다. 모두가 가난하였던 시절이었다.
사립학교가 부동산 매물처럼 거래되던 시절, 문제의 또 다른 작금의 사학 재단으로 바뀐 지난 3년 동안, 학생들의 태도는, 풀이 죽어 있었고,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번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교에 출석하는 학생보다, 결석하는 학생이 더 많았다. 문제는 고등학교 입학하려면, 큰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하는데, 수업일수 부족에다가, 실력이 형편없이 모자라 원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일부 학생들은 공부할 시간보다 농사일을 더 많이 거드는 형편이었다. 혹은 향학열이 있거나, 그래도 일부 여력이 있는 부모는 자녀들을 큰 도시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시켰다. 탈출 전학 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벌써 20여 명이 넘었다. 여기에 그대로 자녀를 두면 장래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3학년 학생회장인 김상우와 부회장 곽동식을 학생주임 최희제 선생이 개별 면담을 하다가 두 명을 엎드려 받치게 해 놓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내리쳤다. 일어서자 이번에는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당하고, 뺨을 맞고, 발길질을 하여, 회장 김상우는 끝내는 졸도를 하여, 긴급히 병원에 긴급 후송되었다. 부회장도 다리가 부러져 입원하였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회장 김상우가 바지에 변을 쌌고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다.
폭행한 이유는, 재단의 압력을 받은 학생주임 선생은 스트레스가 극심하던 차에, 이들 둘이 뭔가를 의논하는 것을 보자,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둘의 대화를 엿들은 것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데모 주동자 나와!"
“여기는 우리의 선조들의 얼이 깃든 곳이다. 특히 김굉필 선생과 곽재우 장군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우리가 불의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 가자!”
도덕 담당 황봉수 선생은 중학교 출신 대선배로서, 그지 방의 출신의 선비인 한훤당 김굉필과, 망우당 곽재우 의병장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였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항상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홍의 장군 곽재우 태어나서 자란 고장이다. 3.1 운동 때는 유명한 평촌 장날의 시위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동안의 일제 압제에 분노가 폭발하여, 시위자들이 삽, 곡괭이, 도끼 등으로 순사가 근무하던 지서를 습격하여 불태웠던 것이다. 하여 순사들이 이웃 면으로 도망을 갔던 것이다.
나라를 지켜 내고 보존한 이 땅인데, 이제 와서 또 다른 압제자, 부패한 무리들이 우리를 압박하고, 농단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내 후배들한테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물려줄 수는 절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우연하게도, 김상우는 소학 동자로 불렸던 김굉필의 후손이고, 곽동식은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본 중학교 출신 대선배인 황봉수 선생이 사학 재단의 부정부패에 어떻게 대처했겠는가?
김굉필의 선비 그리고 의리 정신
김상우 학생의 학생 기록부에는 놀랍게도 그는 조선시대 유학자 한훤당 김굉필의 15대 종손으로서, 학생회장의 아버지는 도동서원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황봉수 선생의 자료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니산과 낙동강을 바로 곁에 사이에 두고 자리 잡은 도동서원은 1568년에 세워져, 대원군 서원 철폐 때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곳이다. 명유(名儒)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1454-1504)을 배향하였다. 그의 무덤이 바로 뒷에 자리 잡고 있다. 1610년(광해군 2년)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순천(順天)의 옥천 서원(玉川書院), 아산의 인산 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등에 제향 되었다. 문집에 《한훤당 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가범(家範)》 등이 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 동자’라 자칭하였다.
김굉필은,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1480년(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문인으로는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 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귀양지 전남 순천에서 극형에 처해졌으나, 이후에 신원되어,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 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甲子士禍) 때 죽임을 당하였는데, 형장에서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고,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당하게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김굉필은,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선대들과 어머니의 고향인 경북 대구 현풍에서 자랐으며,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부랑자 옳지 못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분발하여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를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을 뿐 아니라,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이런 시도 남겼다.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 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호미를 들고, 산으로 들어가 밭을 바삐 매다가, 나무 그늘 아래 누웠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선비정신으로 높은 가치에 대한 의식을 상실한 속물근성에 이기적 사욕에 경종과 경각심을 주고, 당시의 중소 지주층으로 부상된 일단의 양심적 사대부와 군주의 독재와 권벌의 전행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선 사화기의 양심세력, 역사의 주역, 유학 본래의 덕치, 예치에 의한 이상적 정치 목표, 민본 위민으로 향한 자기희생적 봉공 정신, 사림 정신, 도학 정신, 처사형, 지사형의 선비였다.
어느 날 귀양지 평안도 희천에서,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모부인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먹었다. 이를 안 김굉필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꾸지람을 하였다. 이에 제자 조광조가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김굉필은 어린 제자의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도다.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감탄했다. 실천적인 지성인으로서, 선비정신을 추구하였으며,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오히려, 소극적인 행위로 비판한 의리 정신의 소유자였다.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그의 정신이 이어져 왔다.
소학
소학을 보통 8세 때 떼고, 대학 중용, 논어, 맹자로 넘어가는데, 김굉필은 30세까지 소학에 침잠하였다. 왜냐면, 인간이 살아가는 기본 도리를 가르쳤고, 거기에 학문의 진수가 있다고 맹진을 하였다. 《소학》의 핵심은 ‘쇄소응대’. 즉 청소 잘하고 방을 잘 정돈하고 사람들을 잘 응대하는 것, 이 기본 매너를 잘 실천하게 이끄는 것이 《소학》 공부다.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좋은 습관을 키우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다. 《소학》은 흔히 송나라 주자가 엮은 것이라고 하나, 그의 제자 유자장이 스승의 지시에 따라 편찬한 것이다.
《소학》은 유교 사회의 도덕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것으로서 유학 교육의 입문서와 같은 구실을 했다. 주자에 의하면 《소학》은 집을 지을 때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며, 《대학》은 그 터에 재목으로 집을 짓는 것이 된다고 비유해 《소학》이 인간교육의 바탕이 됨을 강조했다. 《소학》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가 전국의 서원에 대대적으로 배포하면서 학생들의 필독서이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지만 조광조가 개혁 정치를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반대파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소학》은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가 되기도 했다.
내용은 일상생활의 예의범절,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 등을 모아 놓았다. 명나라 진선(陳選)의 ≪소학 집주(小學集註)≫ 6권을 비롯하여 명·청 나라에 주석서가 많이 나왔으며,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으로 되어 있다. 입교는 교육하는 법을 말하는 것이고, 명륜은 오륜을 밝힌 것이며, 경신은 몸을 공경히 닦는 것이고, 계고는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명륜·경신을 설명한 것이다. 가언은 옛 성현들의 좋은 교훈을 인용하고, 선행은 선인들의 착한 행실을 모아 입교·명륜·경신을 널리 인용하고 있다. 즉,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進退) 등 어린아이의 처신하는 절차부터 인간의 기본 도리에 이르기까지 망라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학≫이 중시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이다. 어릴 때부터 유교 윤리관을 체득하게 하기 위하여 아동의 수신서로서 장려되어, 사학(四學)·향교·서원·서당 등 당시의 모든 유학 교육기관에서는 이를 필수 교과목으로 다루었다. 권근(權近)은 ≪소학≫의 통달을 강조하면서 먼저 ≪소학≫을 읽은 다음에 다른 공부를 할 것이며, 성균관에 입학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소학≫의 능통 여부를 알아본 다음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은 ≪소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여 모든 학문의 입문이며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원리가 됨을 역설하였다. 그 자신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고 소학 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이들 이후로도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이황(李滉) 등 도학 실천(道學實踐)을 중요시한 선비들이 ≪소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사림파들이 민중 교화의 수단으로 이를 권장하였으며, 김안국은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소학≫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를 발간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1425년(세종 7)에는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소학≫이 음훈주해(音訓註解)가 미비하다 하여 명나라에 파견하는 사신에게 ≪집성소학(集成小學)≫ 100권을 구입해 오도록 하였으며, 3년 후에는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이를 인쇄, 간행하도록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사부학당(四部學堂: 서울의 동부·서부·중부·남부에 설치되었던 四學의 다른 이름)의 생도들이 ≪소학≫을 어린이가 배우는 학문으로 여겨 평소에는 잘 읽지 않고 있다가 성균관 진학 자격을 주는 승보시(陞補試)가 있게 되면 임시로 섭렵한다는 폐단이 지적되었다.
그 뒤는 사부학당 생도들로 하여금 모두 ≪소학≫ 공부에 노력을 기울이게 하되, 그 내용을 자세히 이해하여 뜻이 잘 통하는 생도만을 승보시에 응시하게 하여 뽑도록 하였다. 조선 말기인 고종 때에는 박재형(朴在馨)이 ≪소학≫ 가운데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고 거기에 우리나라 유현(儒賢)의 도학·가언·선행 및 충신·효자·열부의 고사를 첨가하여 ≪해동 소학 海東小學≫을 편집,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훤당 김굉필은 『조선시대에 《소학小學》을 무려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학문의 기본을 익히고 나아가 학문의 참뜻을 깨우친 사람이 있다. 더욱이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자 그룹인 ‘동국 18현’에 뽑혔다. 한훤당의 독서법은 무엇보다 기초를 튼튼히 하면 그 어떤 어려운 공부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며 기초 중시와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는 부연 설명을 달았다
당시 모든 교육이 과거를 목표로 해서 이루어지던 시대에 김굉필의 교육은 과거를 위한 경술經術이나 문장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윤리 도덕적인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 실천은 이제까지처럼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항상 도덕적인 각성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침내 김굉필의 교육활동이 성과를 거두었을 때 김굉필은 누구보다 먼저 경敬 공부를 가르친 선각자로 추앙되었고 조선 도학道學의 시조로 높이 받들어졌다.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기 위한 공부이다. 과거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를 흔히 거업擧業이라고 하고,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는 공부를 ‘위기자학’이라 한다. 결국 김굉필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학문에 매진할 뿐 이록利祿을 구하는 과거 공부를 일삼지는 않았다.
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때, 훈구파(조선 건국, 왕자의 난, 세조 정변 참여자등)가 연산군을 등에 업고, 신진세력 (비정치권, 지방, 학문 종사 양반 세력)을 김일손의 이미 사망한 스승인 김종직(金宗直, 성리학자, 5년 과거 합격, 20년 형조판서)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빌미로, 제거한 것이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의 내용은 제사문으로 왕위 찬탈을 당하여 물에 던져진 중국 회왕을 추모하는 글이다.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던져진 중국 회왕에 대한 상황과 연산군의 악행과 유사한 면이 있어 후인들이 연산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비꼬는 내용이라고 훈구파에서 주장하여 연산군이 합세하여 일어 킨 사화였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은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김굉필도 김종직의 수제자로서, 곤장 80대를 맞고,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을 갔다. 마침 그때 그곳에 자기 아버지 부임지에 따라왔던, 훗날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자 조광조를 만나 직접 가르쳤다. 그 연결 고리로, 김굉필은 기묘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즉, 무오사화(귀양), 갑자사화(귀양지 전남 순천에서 사사, 옥천 서원(玉川書院)에 제향), 기묘사화(부관참시)를 겪었던 것이다.
갑자사화 (甲子士禍)는 (연산군 10년)의 어머니의 복위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이다. 어머니의 복위를 추진하려는 정책에 관료들이 반대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숙청의 범위를 사림 세력은 물론이고 훈구세력까지 넓혀 일망타진하려 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직후 대부분 복권된다. 김굉필은 전남 순천으로 귀양 갔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문제는 훈구세력들이 새로운 사림 세력이 강력하게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성종이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등 나라의 문물을 정비하려 인재들을 많이 필요로 하자, 이러한 인재 수요를 타고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였다.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는 주로 3사(三司: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직(言論職) 및 사관직(史官職)을 차지하면서 훈구 대신의 비행을 폭로·규탄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였다.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종래의 벌족(閥族)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라 하여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또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 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니, 이 두 파는 주의·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그치지 않았다.
기묘사화 (己卯士禍)는 중종반정(1506) 후, (중종 14)에 조광조 (趙光祖)등 핵심인물을 몰아내어 죽이고 혹은 귀양 보낸 사건이다. 사림파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급진적인 개혁정책(과거제, 향약 실시, 덕업 상권, 과실 상규, 예속 상교, 환난상휼, 과장된 권력자의 토지, 노비 몰수)을 처음에는 지지하던 중종이었으나, 사림파의 주장이 점차 과격해지자 중종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훈구파는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사림파의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황봉수 선생의 한훤당 김굉필 독서비법 특강
황선생은 우체국 옆에 거주하고 있는 중학교의 선배로서, 대학 졸업 후, 자청하여 후배를 가리키겠다며, 이 학교로 부임하여 왔다. 또한 김굉필 선생의 사상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학부모를 위한 매주 특강으로 “소학에 기초한 휜다 김굉필 생의 독서법”에 대하여 본중학교 졸업 선배, 황선생의 제자 및 학부형 중 한 사람인 장한성이 아래와 같이 노트 정리를 하였다.
김굉필 선생의 독서비법 7
(기초와 기본을 중시하는 아이로 키우는 독서법)
1. 기본이 되는 책을 먼저 읽어라
김굉필은 조선시대에 《소학》을 무려 10년 동안 공부하면서 학문의 기본을 익히고 나아가 학문의 참뜻을 깨우친 사람이다. 학문을 하기에 앞서 기본, 즉 좋은 습관을 만들고 부모에게 예를 다하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덕목을 함양하는 《소학》을 공부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2. 읽은 대로 실천하는 생활 실천형 독서를 하라
김굉필은 “글공부를 하여도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에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 다 하련다.”라고 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소학》은 거창한 학문이나 이론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와 행동에 대해 알려준다.
3. 독서의 밑바탕이 되는 인성 공부를 먼저 하라
김굉필은 기본 공부, 인성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학》을 공부의 시작이자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소학 공부는 모든 학문의 입문이요, 기초이며, 출발로 인간교육에 있어서 절대적인 원리가 된다.”라며 그 자신이 소학 공부에 매진했던 것이다.
4. 많이 빨리 읽기보다 숙독하라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하여 읽고 뜻을 음미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이치가 나타나면 곧 육미가 입맛에 좋은 것과 같을 것이니, 단단히 씹어서 소화시킨 뒤에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이렇듯 김굉필은 책을 읽는 법으로 정독과 숙독을 권장했다.
5. 개인의 학습능력차를 고려하라
독서는 책장을 빨리 넘긴다고 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 페이지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넘겨야 자신만의 지식이 될 수 있다. 김굉필이 정독과 숙독을 권하면서 개인차에 따라 독서를 달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굉필은 자녀와 제자들에게 독서교육을 할 때에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다.
6. 점차 단계를 높이는 하학 상달식을 추구하라
김굉필은 바로 살아가는 법을 공부하고 난 후에 점차 단계를 높이는 공부를 주문했는데, 이를 ‘하학 상달(下學上達)’ 공부법이라고 불렀다. 고상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의 몸가짐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공부에서 복잡한 공부도, 구체적인 공부에서 추상적인 공부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7. 가훈을 통해 집안의 기본을 바로 세워라
김굉필 가의 경우, 자녀들과 공유하고 싶은 중요한 정신을 가훈으로 만들어 세대를 이어 공유해 왔다. 김굉필은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가훈을 만들면서 자녀교육에 힘썼다. 김굉필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 자신이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서흥 김 씨 집안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가문에 오를 수 있었다.
망우당 곽재우의 의병
곽동식의 학생 부회장의 13대 할아버지, (郭再祐, 1552~1617)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중요하게 공헌한 장수의 한 사람이다.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일 것이다. 그 표현대로 곽재우는 여러 의병 중에서 가장 먼저 기의(起義- 의병을 일으킴)했고, 여러 전투에서 홍의를 입고 지휘해 뛰어난 무공
을 세웠다.
그러나 29세의 젊은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한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사례가 대표하듯이, 전란이 끝난 뒤 의병장들은 대체로 공훈에 합당한 포상이나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무(宣武)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고, 이런저런 관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끝내는 은둔 하면서 “익힌 곡식을 끊고 솔잎만 먹다가(벽곡 찬송(辟穀餐松)”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곽재우도 그런 사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살육이 난무한 전장보다 현실의 정치적 여건은 의병장에게 더 엄혹했다.
가문과 성장
곽재우는 1552년(명종 7) 8월 28일 경북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곽지번(郭之藩)이고, 아버지는 승지ㆍ관찰사를 역임한 곽월(郭越, 1518~1586)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 씨(晉州姜氏)다. 본관은 현풍(玄風- 지금의 경북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그곳에서 세거한 명문이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 된 1592년 4월 22일에 고향인 의령현 세간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기의는 호남ㆍ호서의 의병보다는 한 달,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부대보다는 50일 정도 빠른 최초의 의병이었다. 이런 정황에는 그가 살던 의령이 일본군의 초기 침략 지역과 가까웠다는 까닭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그의 애국심과 실천력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그의 부대는 거느리던 노비 10여 명으로 출발했지만, 이웃 양반들을 설득해 이틀 만에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뒤 그의 의병은 2천 명 정도로 유지되었다(1593년 선조 26 1월 11일).
첫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그 까닭은 불리한 전황이 아니라 조정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물자가 부족했던 그의 부대는 관군이 도망가 비어있던 초계성(草溪城)으로 들어가 그곳의 무기와 군량을 확보해 사용했는데, 합천군수 전현룡(田見龍),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등이 이런 행동을 오해해 그들을 토적(土賊, 지방에서 일어난 도둑 떼)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의 해명으로 위기를 넘긴 곽재우 부대는 그 뒤 의령을 거점으로 현풍ㆍ영산(靈山. 지금 창녕)ㆍ진주 등 낙동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중요한 전공을 세웠다. 우선 영남에서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정암진(鼎巖津. 경남 의령 소재, 의령과 함안 사이를 흐르는 남강의 나루)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육지에서 일본군과 싸워 조선군이 이긴 최초의 전투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월에는 현풍ㆍ창녕 등지에서 승리해 경상우도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했고, 왜군에 항복해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위겸(孔撝謙)을 매복 작전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10월에는 왜란 초반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전투에 참전했다. 그들은 진주성 외곽에서 일본군을 교란해 승전에 기여했다.
곽재우가 구사한 전술은 기본적으로 유격전이었다. 그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위장ㆍ매복 전술 등의 변칙적 방법으로 적을 교란하고 무찔렀다. 이것은 전력과 물자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었던 의병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을 것이다.
곽재우는 이런 전공으로 벼슬을 받았고 계속 승진했다. 그는 유곡 찰방(幽谷察訪. 1592년 6월, 종 6품)·형조 정랑(8월, 정 5품)을 거쳐 경상도 조방장(助防將, 정 3품)에 임명되었고, 1593년 4월에는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왜란이 발발한 지 1년 만에 그는 경상우도 방어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군사 지휘관에 올랐다.
일본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금방 끝날 것 같던 임진왜란은 내륙의 의병과 해전의 이순신이 활약하면서 1593년 후반부터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황의 변화에 따라 곽재우의 역할도 바뀌었다. 그동안 그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져 1594년부터 삼가(三嘉)의 악견(岳堅) 산성, 가야산의 용기(龍起) 산성, 지리산의 구성(龜城) 산성 등 경상도 일대의 산성을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이순신ㆍ원균 등과 함께 거제도를 탈환하는 작전에 참여했지만, 왜군이 대응하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는 가장 주요한 격전지 중 한 곳인 진주목사에 임명되었고, 경상도 관찰사ㆍ경상 우수사 같은 요직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이 본격화되던 1595년 가을에 관직을 버리고 본관인 현풍으로 낙향했고, 거기서 2년 동안 칩거했다. 승전을 거듭해 계속 중용되던 의병장이 갑자기 낙향한 이례적인 사태의 가장 큰 까닭은 조정과의 불화였다.
앞서도 그랬지만 그 뒤 처사로 은둔해 곡기를 끊고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행적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곽재우는 기본적으로 직선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켰다.
첫 사례는 전란이 일어난 직후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粹)와 관련된 것이었다. 1592년 6월 김수가 패전하자 곽재우는 그를 패장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도 곽재우가 역심을 품었다고 맞섰다. 이 대립은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1593년과 1594년 거제도 작전에서도 곽재우는 전략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 다른 장수들과 마찰을 빚었다. 나중에 두 사안 모두 곽재우의 판단이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은 곽재우의 자세는 상당한 반발을 가져왔다.
이런 마찰로 형성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국왕 선조가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낙향한 뒤 조정에서는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을 중심으로 그를 다시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지만, 선조의 반응은 싸늘했다.
“나는 이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한다(1595년(선조 28) 12월 5일). 곽재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처사를 보니 참으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도체찰사가 격서를 보내 불렀지만 고압적인 자세로 나아가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함부로 병권을 맡길 수 없다(1596년 2월 18일).” 왕명을 대행하는 도체찰사의 부름에 곽재우가 따르지 않자 선조는 그가 왕명을 무시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이런 불신은 이때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발원은 앞서 말한 김수와의 충돌이었다. 그때 선조는 “곽재우가 김수를 죽이려고 하는데, 자신의 병력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1592년 8월 7일)”고 물었고, 나아가 “이 사람이 함부로 감사를 죽이려고 하니 도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없애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 의병 곽재우).
권력자의 한 속성은 의심이고, 그런 성향은 위기의 국면에서 더욱 짙어지곤 한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이순신에게 그랬듯이, 뛰어난 무공을 세운 의병장을 보는 국왕의 이런 태도는 상당한 문제였다.
그 뒤 정유재란의 조짐이 뚜렷해지자 곽재우는 다시 경상좌도 방어사(防禦使. 종 2품)에 기용되었다. 일단 그는 현풍의 석문(石門) 산성을 수축해 주둔하다가 창녕의 화왕(火旺) 산성으로 옮겼다.
그러나 왜란에서 곽재우의 활약은 여기서 끝났다. 복상(服喪) 때문이었다. 1597년(선조 30) 8월 계모 허 씨가 별세하자 그는 현풍의 선영에 장사 지낸 뒤 강원도 울진(蔚珍)으로 피신해 삼년상을 치렀다. 복상 중에도 기복(起復)하라는 명령이 몇 차례 내려졌지만 그는 상중이라고 거절했다.
그동안 거대한 전란은 끝났다. 탈상한 곽재우는 1599년 10월에 다시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종 2품)에 임명되어 그 지역의 군무를 총괄했다. 당시로서는 노년의 초입에 접어든 48세였다.
조선 후기 주요 인물들의 삶을 규정한 핵심적 조건은 당쟁이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갈등이었지만, 그 저변에는 학문과 혈연관계가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었고, 그래서 그 영향과 파괴력은 넓고 깊었다.
곽재우도 당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는 조식의 외손 사위라는 혼인관계가 보여주듯이 북인계 인물로 평가되었지만,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남인과 더욱 가까워졌다. 전란 동안 그를 계속 추천하고 인정한 인물도 김성일(초유사. 1592~93년), 유성룡(영의정. 1593~96년), 이원익(체찰사. 1597~98년) 등 남인계 중신들이었다.
곽재우의 정치적 시련은 전란이 끝난 뒤에 닥쳤다. 그때 대부분의 인물이 그랬듯이, 그 시련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개진해 스스로 초래한 것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1600년(선조 33) 2월 붕당의 대립과 거기서 발생한 영의정 이원익의 파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사직한 것이었다. 그는 국왕의 재가를 받지도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선조는 “장 1백 대에 멀리 유배 보내도 모자란다”면서 대로했다. 결국 그는 대북계 중진인 대사헌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으로 전라도 영암(靈巖)에 3년 동안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처음 겪은 주요한 정치적 시련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되지만, 그가 자신의 당색을 남인으로 자정(自定)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는 1602년(선조 35)에 해배되어 현풍으로 돌아온 뒤 익힌 밥을 멀리하고 솔잎만 먹었다. 그리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했다. <연보>에서는 이때 그의 생활을 “쓸쓸한 도인 같았다(蕭然若一道人也)”고 적었다.
국왕의 분노를 산 그가 공로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듬해 공신도감에서는 “경상우도가 보전된 것은 참으로 그의 공로”라면서 공신 책봉을 건의했지만,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장수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우리나라의 장수와 군사가 왜적을 막은 것은 양(羊)을 몰아 호랑이와 싸운 것과 같았다. 이순신과 원균이 수전에서 세운 공로가 으뜸이고, 그밖에는 권율의 행주 전투와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조금 기대에 부응했으며 그 나머지는 듣지 못했다. 그중에 잘했다는 사람도 겨우 한 성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1603년 2월 12일).”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 뒤 1605년(선조 38) 2월에 그는 동지중추부사ㆍ한성부 우윤(종 2품)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두 달만에 병으로 사직한 뒤 줄곧 망우정에서 지냈다. 1607년 1월에는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 방문해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든 56세 때의 일이었다.
해평(海平) 부원군으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당시의 주요한 대신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그가 곡기를 끊은 까닭을 이렇게 짚었다. “곽재우가 솔잎만 먹는 까닭을 도술을 닦으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김덕령이 뛰어난 용력으로도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죽자 자신도 화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이것을 핑계로 세상을 도피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608년 8월 13일).”
관계가 불편했던 선조가 붕어하고 광해군(재위: 1608 ~1623)이 즉위하면서 곽재우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찾아왔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그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임명하고 상경을 재촉했다.
그때 곽재우의 삶은 청빈함을 넘어 곤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교지를 갖고 찾아갔던 금군(禁軍)은 “인적이 아주 끊어진 영산의 산골에 두어 칸의 초가를 짓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생계가 아주 초라했고, 병들어 누워서 나오지도 못했다”라고 보고했다. 곽재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상경하려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타고 갈 말과 종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단벌 옷도 다 해져 날씨가 추우면 길을 떠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국왕은 즉시 의복을 지급하라고 하명했다(1608년 광해군 원년, 9월 14일).
그 뒤 1610년(광해군 2) 곽재우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정 2품)ㆍ한성부 좌윤(종 2품)으로 임명되어 잠깐 상경했지만, 역관(譯官)과 원접사(遠接使)가 왕명을 무시했다고 비판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낙향했다.
2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용맹하고 고결한 의병장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이원익ㆍ이덕형 같은 중신들이 자주 찾아왔고, 사대부들도 그를 만나려고 몰려들어 집에 자리가 모자랄 정도였다. 아이들까지도 그를 보려고 거리를 메웠다.
그 뒤 별세할 때까지 곽재우는 계속 망우정에 머물렀다. 앞서 말한 빈한한 환경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 처럼 “강가의 정자에 있었다”는 이 시기 <연보>의 짧은 표현은 그런 쓸쓸함을 담고 있는 것 같다.
타협하지 않는 곽재우의 직선적인 성품은 별세하기 전에 한번 더 표출되었다. 그때 조정의 가장 큰 논란이었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사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곽재우는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1613년 광해군 5, 5월). 이 때문에 그는 대북(大北)의 탄핵을 받아 사사될 뻔했지만, 장령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목숨을 구했다.
노쇠한 의병장은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1617년 3월 병이 깊어지자 그는 “생사에는 천명이 있는 것”이라면서 치료를 중단했고, 4월 10일 망우정에서 별세했다. 65세였다. 그 뒤 지금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안장되었고, 그를 모신 사우(祠宇)에는 ‘예연 서원(禮淵書院)’이라는 현판이 내려졌으며,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다. 문집은 [망우 집]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좌찬성을 지내고 호성(扈聖) 공신에 책봉된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은 이런 시를 지어 곽재우를 칭송했다([망우 집], <망우 선생 전> 및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 의병 곽재우).
들으니 홍의장군은(聞道紅衣將)
왜군을 노루 쫓듯 한다고 하네.(逐倭如逐獐)
그대를 위해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해(爲言終戮力)
곽분양처럼 되소서(須似郭汾陽)
곽분양(郭子儀, 697~781)은 당 현종 때의 인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책봉된 인물이다. 그는 관원으로 성공했고 장수를 누렸으며 자손들도 번창해 세속에서 지복(至福)을 누린 인물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노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자손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곽분양 행락도(行樂圖)>는 성공과 행복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추측일 뿐이지만, 이호민은 두 사람이 같은 성씨의 무장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곽재우의 무운과 성공을 기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뒤 곽재우의 삶은 곽분양과 전혀 달랐다. “쓸쓸한 도인 같던” 곽재우의 벽곡과 은거가 불행했는지, 아니면 탈속의 자유로 충만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화려한 출세가 행복의 필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조선 후기의 주요 인물이 대부분 당쟁의 여파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복잡성과 함께 착잡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곽재우의 소 중 「창의시 자명소(倡義時自明疏)」는 시세(時勢)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국가의 관리들은 분골쇄신하여 위국 진충(爲國盡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게 한 경상감사 김수(金晬)의 죄를 8개 조항을 들어 통렬히 비난하였다.
「구영창대군소(救永昌大君疏)」에는 그가 무장(武將)으로 외직에 있을 때 신분과 처지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왕의 잘못을 직간(直諫)하여 영창대군을 죄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홍의 장군 곽재우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혁혁한 전공은 일찍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병사 조대곤(曺大坤)은 곽재우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한 바 있으며, 도망한 일로 곽재우에게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경상 감사 김수 역시 그를 도적으로 지목하면서 비방하였다.
선조는 함부로 감사를 죽이고자 하는 자가 도적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없애 버리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순검(巡檢)한다 사칭하면서 곽재우의 동정을 살폈고, 곽재우는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덕령이 무고하게 죽는 것을 보고는 지금은 일할 수 없는 때임을 알고 은거하여 66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데모 주동자는 앞으로 나오라
분연히 일어서야 했다.
학생회장 김상우가 한 달 만에 퇴원 후, 모든 학년 학급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거사 방법과 날짜를 논의하였다. 어떻게 된 셈인지, 논의 내용이 빠짐없이 재단 측에 전달이 되고, 경찰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 학생 지도 선생 최희제는 둘을 불러서 다시 한번 엄중히 경고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학생 임원중에 밀고 학생이 있었다.
우선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성을 더욱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거사일은 4월 1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학교 통학길이 학교를 중심으로 길이 네 갈래로 나눠워 져 있었다. 그래서 동서남북 4개의 그룹으로 해서, 그룹장을 임명하고, 그 그룹장을 중심으로 해서 체격이 좋은 행동책 10명씩, 40명을 지명했다. 그리고 그쪽 방면의 학생들을 길로 인솔하여, 오전 10시에 학교 운동장에 모여, 연좌 농성을 하면서, 지방 신문, 방송 기자들과 회견하기로 하였다. 전 국민의 의 관심과 언론의 호응을 얻기 위함이었다. 단, 여학생들은 제외하기로 하였다. 다치거나, 힘이 약한 것을 배려하였다. 다만 여학생들은 몰래 주먹만한 돌들은 주워서 군데군데, 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동부에서는 학생장 김상우, 서부에서는 부학생장 곽동식이 직접 인솔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학교에서 제일 먼 거리에서 부터 학생들을 규합하여 마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데모대가 눈덩이처럼 불어 나는 것이었다. 어느새 모두가 손에 몽둥이를 하나씩 집어 들고 있었다. “재단은 물러가라” “공립으로 전환하라””우리도 공부하고 싶다”등등 구호를 외치며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마침 그 동네 출신 순경이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학생들 동태를 파악하기 위함이리라. 그때 마침 누군가가, 그 순경의 자전거 앞 바큇살에 몽둥이를 집어넣자, 자전거와 그 순경은 길 밑 밭으로 공중회전하며, 나가 떨어졌다. 모두 신이 났다. 의기양양했다. 공권력이, 그동안 사학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고 다들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순경들도 만만찮았다. 벌써 이웃 경찰서에 지원을 요청하여, 순경들이 트럭을 타고서 길을 막고 있었다.
학생들이 다가 가자, 그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뒤줄의 겁 많은 일부 학생들이 논으로 달아 나자, 순경들이 앞의 선두 행동조 학생들 몇 명을 잡아서 트럭에 태웠다. 학생들은 어깨를 서로 잡고서, 스크럼을 짜서, 트럭 앞에 누워 바리케이드를 쳤다. 하나 그 순간, 갑자기 트럭 기사가 시동을 걸더니, 전속력으로 돌진하여 오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살기 위하여 피하였다. 흩어졌던 학생들이 다시 학교 운동장에 진입하였다. 다른 방향에서 온 학생들이 이미 농성을 하고 있었다. 그때, 경찰 서장이 혼자 농성장에 나타났다. 100킬로가 넘는 거구였다. 큰소리를 꽥 지르며 30여 명의 순경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데모 주동자 나와!” “다 잡아! 나와! 다들 집에 돌아가! 해산해!” 하는 순간, 뒤에 있던 한 학생이 몽둥이로 어깨를 내리쳤다. 서장은 화가 나서, 몽둥이를 빼앗아, 휘두르며 그학생을 쫓았다.
학생들은 서장이 힘껏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멀리 나가 떨어졌다. 그중 한 학생이 돌멩이를 집어 들어 그 서장을 향하여 던졌다. 공교롭게도, 머리 정통에 맞아 피가 얼굴을 타고 내려왔다. 그 서장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두러며, 학생들을 마구 내리쳤다. 그 장면이 현장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어린 학생들은 황선생에게 배운 대로 마치 김굉필 선생과 곽재우 장군이 되살아 나서 시위 현장에 나타난 것처럼 의연하게 했다. 정의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이었다.
학생들은 어깨동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쳤다. 남학생들이 곽재우! 하면 여학생들이 김굉필!로 받았다.
드디어 구호가 완성되었다.
곽재우! 김굉필! 곽재우! 김굉필! 곽재우! 김굉필! 곽재우! 김굉필!
학생들 모두가 곽재우 김굉필이었다.
1970년 5.22일 자 동아일보 신문에 “구지中學生(중학생) 七百五十(칠백오십) 여명은 지난 3월 1일 불실 사학財團(재단)을 해체하고 관선이사를 뽑아 학교 운영을 쇄신하라고 요구하며 데모를 했다. 그리고 2달 이상이나 등교를 거부하였다. 파행 수업 및 학내 분규는 2년간 계속되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1970년 12월 25일 자 동아일보 신문에는 이렇게 나왔다.
“구지중학교는 1952년 1월 31일 사립중학교 설립을 인가받았으며, 동년 개교하였다. 마침내 3년 동안의 학교 분규는 막을 내렸다. 1971년 1월 1일 공립중학교로 전환 예정이다”
■ 글 내용중에서 중학교 실재 이름 '구지중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글 올릴때 '평촌중학교'로 한 이유는 모교에 누가 될까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인터넷서에 검색하여 보니, 역시나 '평촌중학교'라는 학교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내용과 관련도 없는 평촌중학교라는 학교 이름을 실재 이름 구지중학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등장 이름 일부는 가명임을 밝힙니다. 감사합니다.(20220318)
■ 위치 지도
현풍곽씨 (곽재우) 12 정려각 : https://goo.gl/maps/S5hBpMBUA6kM4F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