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부을 것 같았다. 길을 잃은 파랑새한 마리가 회나무에 앉아 노란 꽃을 황급히 쪼고 있었다. 비슬산 자락 마을의 이 진사집 마당에 큰 차일이 쳐져 있었다. 누런 빛깔의 광목으로 만든 차일이 바람에 심하게 펄럭이더니 갑자기 아랫채 머슴들이 거주하는 행랑채로 넘어졌다.
불과 한 달 전 한양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하였다고,고을 큰 잔치까지 벌였었는데,이진사의 아들 이달호가 금의환향 길에 천안에서 급사하였다는 급보에 이어,시신이 소달구지에 실려 마당에 "떠억"하관 되었다. 그의 노모와 아내 채씨,여동생 다솜이는 졸도를 하였다.
무슨 관직에 임명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으나 나중에 고종으로부터 직접, 암행어사라는 중책을 받았다고 밝혀졌다.변복을 하고 임무수행및 귀향 중 천안 주막에서 저녁을 먹은 후,복통으로 변고를 당했다고 했다.풍문에는 충청 우병사가 그의 토착 농민 착취 비리가 복로 될까 두려워 누구를 시켜 음식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또는,유생 시절 일본의 조여 오는 경제적 침략 행위에 맞서 대궐 앞에서,도끼를 메고 상소문을 올려, 그 일당들에게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고 있었다는 증거도 나왔다.
"일본은 조상 대대로 한반도로부터 높은 문화와 기술을 전수받는 은혜를 입었으나,이제는 한반도가 이들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배은망덕하여,이런 짐승 같은 무리들과는 절대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는 없습니다. 어서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하시고,절대 짐승보다 못한자들에게 휘둘리지 마시고,산전 벽해 같은 대개혁에 착수하여 나라를 구하소서"
호위무사 최상수가 이진사에게 전한 바로는 이달호가 감기 기운으로 잔기침을 몇 번 한 것 외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1865년 대원군이 집권하고서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고 화해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척화비를 세웠다. 전국 각지에서 수탈과 횡포에 못 이긴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고,패악질 하는 아전들에게 응징을 가하였다.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인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 부패한 관료들과세도정치세력들이 결탁하여 사회의 주도세력이 되었으니,암행어사의 출현에 대한 정보가 사전에 새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 조사관들이"급체 사망"이라는 사망원인을 상부에 보고함으로써 간단히 종료되었다. 심지어는 호위무사에게 보고 지연에 따른 근무태만으로 직위해제라는 엄벌을 내렸다. 비슬산 너머 청도 출신인 호위무사 최상수는 충직한 사람이라,이달호의 시신을 수습하여,그의 고향으로 소달구지에 싣고 내려와 그의유언을이진사에게 전해주었다.
"상감이 거하시는 한양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했심더"
이진사의 턱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멀리비슬산을 바라보며 망건을 쓰고 부채를 잡고 혼자 입으로 되뇌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토록 총명하여,심혈을 기울여 키우고 가르쳤던 아들이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저 세상 사람이 되다니. 아들을 앞세우는 아비가 되다니. 더구나,선조들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세종대왕 넷째 왕자로서 세조 찬탈에 반기를 들었다가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자,전라도 순천으로 도망가다시피 식솔을 거느리고 옮겨 갔다가,병자호란 때 오백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북상 중,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바람에 눌러앉은 곳이 지금의 마을이었다. 물이 귀한 곳이라 농사짓는 일이 애를 바다 같이 많이 태우게 하는 곳이었다. 산비탈에 있는 계단식 들판"애바다"였다.항상 물이 부족하여 농사짓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워 물이 바다와 같이 풍부해야 그해 농사가 잘된다는것이었다.
즉,홍수가 나야 그나마 농사가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는 윗대 조상들이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이 있어,그도 이제 도동서원의 접장이었다.도동서원하면 김굉필,김굉필은 기초와 기본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소학의 실천하는 행동하는 학자였다. 그가 접장으로 있던 서원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시책에도 살아남았다. 기본과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서 잠깐 김굉필 선생의 독서법을 통해 그의 사상을 조명해 보자.
1. 기본이 되는 책을 먼저 읽어라
소학을 무려 십 년 동안 공부하면서 학문의 기본을 익히고 나아가 학문의 참뜻을 깨우친 사람이다. 학문을 하기에 앞서 기본, 즉 좋은 습관을 만들고 부모에게 예를 다하고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덕목을 함양하는 소학을 공부했던 것이다.
2. 읽은 대로 실천하는 생활 실천형 독서를 하라
글공부를 하여도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에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 이로부터 정성껏 자식 도리 다 하련다라고 시를 쓰기도 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윤리와 행동에 대해 알려준다.
3. 독서의 밑바탕이 되는 인성 공부를 먼저 하라
기본 공부, 인성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소학을 공부의 시작이자 으뜸이라고 주장한다. 소학 공부는 모든 학문의 입문이요, 기초이며, 출발로 인간교육에 있어서 절대적인 원리가 된다라며 그 자신이 소학 공부에 매진했던 것이다.
4. 많이 빨리 읽기보다 숙독하라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공경히 책을 대하여 읽고 뜻을 음미하면 그 이치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다. 이치가 나타나면 곧 육미가 입맛에 좋은 것과 같을 것이니, 단단히 씹어서 소화시킨 뒤에 다른 책을 읽을 것이다.
5. 개인의 학습능력차를 고려하라
독서는 책장을 빨리 넘긴다고 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한 페이지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넘겨야 자신만의 지식이 될 수 있다. 정독과 숙독을 권하면서 개인차에 따라 독서를 달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녀와 제자들에게 독서교육을 할 때에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다.
6. 점차 단계를 높이는 하학 상달식을 추구하라
바로 살아가는 법을 공부하고 난 후에 점차 단계를 높이는 공부를 주문했는데, 이를 하학 상달(下學上達)공부법이라고 불렀다. 고상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의 몸가짐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공부에서 복잡한 공부도, 구체적인 공부에서 추상적인 공부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7. 가훈을 통해 집안의 기본을 바로 세워라
자녀들과 공유하고 싶은 중요한 정신을 가훈으로 만들어 세대를 이어 공유해 왔다. 다른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가훈을 만들면서 자녀교육에 힘썼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 자신이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고 서흥 김 씨 집안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가문에 오를 수 있었다.
대를 이어 이진사 집안의 조상 묘터를 봐온 곽씨집안 지관을 불러서 알아보게 한 결과,낙동강 기슭의 대니산 정상에 딱 한 군데 명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데,문제가생겼다. 그산이 송두리째,왕권을 좌지우지하고,몇 대에 걸쳐 앙숙 관계인 권문세도가의 땅이 아닌가. 매매협상 따위는 애초에 불가했다. 만약 잘못 노출시켰다가는 그쪽에서 그곳에다 가묘라도 써서 선점을 할 우려가 있었다.
"만약 그대가 그 장소와 우리 관계를 발설하면 그대의 신변에도 위험이 닥칠 수 있으니,이사실을 그대의 무덤까지 함께 가져가 주시오"
하고 엄중히 이야기했다. 지관도 흔쾌히동의했다. 또,이진사는 지관에게 다흔 평범한 곳에 가묘를 만들장소를 찾아보도록 했다. 발인 전야에도 비는 장대 같이 계속 내렸다. 태기가 있는 이달호의 아내 채씨는 윗채 안방에서 대청마루에 옆의 작은 쪽문으로 밖의 거동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문상객이 모두 물러가고,마당에 있는 관 주변에 어른 키보다 더 높은 휘장막이 넉넉한 공간으로 둘러졌다.
이진사가 엄명을 내린 대로,대문은 상머슴이 지키고 섰다. 충복인 큰 머슴과 작은 머슴 두 명과 호위무사 최상수,즉 세명의 특공대가 그 공간으로 들어가 관 뚜껑을 열었다. 여름철,열흘이 지난 시신이라 염장을 하고 운구하였지만,벌써 부패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리고 짚으로 만든 덮석에 시신을 옮긴 후,둘둘 말아서 새끼줄로 잘 싸맨 후 지게위 바지게에 옮겼다.
세명의 임무는 오리 거리의 대니산 자락에 도착한 후 높이 삼백여 미터의 산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서 시신을 매장 후,새벽에 복귀하여,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침에 발인식에 참석하여 상여를 매고가 가묘장에 가서 관을 매장하는 일이었다. 집안의 모든 식솔들에게도 엄명이 내려졌다.
"저녁을 먹은 후 내일 아침 발인식이 있기 전에는 누구도 방문을 열고 나오거나,문틈으로도 밖을 내다보지 말거라"
빗속에서 이진사는 바지게 위에 둘둘 말린덮석속의 아들을 힐긋 한번 쳐다본 다음,세명에게 앙다문 입술을 열었다.
"떠나라!"
단 한마디 말뿐이었다. 살아있는 사람 보다,시신의 무게가 더 무거운 법,젊고 지게질에는 도를 터득한 건장한 두 머슴이지만,빗길 속 더구나 그믐날 밤길 행보는 쉽지 않았다. 자주 오가던 장터길이지만,우중에 짚신에 진흙이 달라붙어 금방 묵직하여,털어내느라 자주 쉬어야 했다. 더구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동해야 했다. 마을 고개 위의 두꺼비바위에서 짚신의 흙을 떼어 내느라 잠시 바지게를 바위에 기대어놓고,작대기를 괴어 놓았다.
그때,시신실은 바지게에서 혼불이 일어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더니 마을을 한 바퀴 돌더니 대니산 쪽으로 사라졌다. 마치 자신의 길을 인도하듯이. 사람들은 그러한 불을 인불,혼불,도깨비불 혹은 깡철이 불이라고도하였다. 호위무사는 혼을 위로하는 듯 오른쪽 주먹을 왼쪽 심장에 갖다 댔다. 그리고는 의미 모를 소리를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잘 가세요"
대니산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세 개의 고개가 있고 세 개의 마을을 통과해야 했다. 첫째 마을 가기 전에 공동묘지를 구간에는 크고 작은 무덤이,묘지석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작은 무덤은 애기들 무덤이라고 했다. 병명을 모르고 죽은 아이들이 많았다.오죽했으면,악귀가 아이를 탐내지 않게,개똥이,소똥이,재깐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첫째 마을 입구에는 제갈량 씨 가문의 효자각이 세워져 있었다. 한겨울에 병든 모친이 잉어 삶은 국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낙동강의 두꺼운 얼음판을 깨고,잉어를 잡아서 그 국물을 노모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 마을에 정신이 나간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밤이고 낮이고 돌아다녔다. 언제나 손에는 무슨 물건이 쥐어져 있었다. 특히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일행이 그 마을 입구에 접어들자,시커먼 물체가 나타났다. 그여자였다. 히죽히죽 웃으며 손에는 그날따라 낫을 들고 있었다. 호위무사가 머슴으로부터 지게 작대기를 넘겨받아서,허공을
"휙" 가르는 소리를 냈다.
"물러가라. 감히 누구 앞을 가로막느냐?"
겁을 먹은 그녀가 물러섰다. 캄캄한 밤에 빗줄기와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작은 머슴은 큰 머슴에게 지게를 넘겨주었다. 두 번째 동네 가기 전에 고개 밑에 상엿집이 있었다. 초가로 덮은 그 상여 보관하는 곳에는 망자의 관을 얹어서 고정할 수 있도록 참나무로 만든 작은 틀과 상여꾼들이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제법 굵은 나무를 격자 모 양으로 짜 놓은 큰 틀이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관을 덮을 수 있게 만든 빨간색과 청색으로 된 조형물이 누군지 모르지만 다음 차례 주인을 저승사자처럼 음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두 번째 마을 입구에는 삼거리길이라 주막이 있었는데,새벽인데도 문 틈으로 불빛이 세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깨어있는 모양이었다. 송아지만 한 사냥개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점점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마침내 으르렁거리며,길을 막아섰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때 큰 머슴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허리춤을 내리더니,앉아서 아랫배에 힘을 주자,변이 길가에 쌓였다. 그 큰 사나운 개가 그곳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더니 맛있게 핥아먹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세명 앞에는 마지막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읍내에 새로 생긴 순사들이 지키는지서였다. 그곳만 무사히 빠져나가면 북상하면 대니산에 오르는 입구가 있다. 불은 켜져 있었다. 그런데,보초가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서 정문을 십 보정도 벗어날 무렵에 언제 깨어났는지,보초가 뒤에서 불렀다.
"이 밤중에 뭘 지게에 지고 어데 가는교?"
순간 모두의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작은 머슴이 대답했다.
"내일이 평촌 오일장날 아잉교?주인이 장터에 우리 포목상에 있는 물건이 비에 젖는다고 빨리 덮어라고 캐서 씨가 빠지게 오는 길 아잉교?"
보초는 별 사람들 다 보겠다는 듯이 하품을 하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간신히 대니산 밑에까지 왔다. 하나 이제부터는 길이 없었다. 지게를 버려야 했다. 덮석에 말린 시신을 세명이 어깨에 메고 꼬불꼬불 숲 속을 헤치며 오르고 또 올랐다. 산짐승들이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들에게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
외딴집에 아기를 마루에 재워 놓고 애기 모기장으로 덮어 두고 밭일 갔다 왔더니,늑대가 애기를 물어 갔다는 산꼴짝 오지였다. 곽지관이 알려준 바는 산 제일 높은 곳에 소나무 가지에 붉은 천을 매어놓았는데,그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삼십보를 더 가면 평지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망자를 묻어야 할 곳이라고 했다.
마침내 그 소나무를 찾았다. 삽과 곡괭이로 땅을 좁고 깊게 파니,보드라운 황톳빛 고운 흙이 나왔다. 덮석을 땅에 깔고 망자의 머리를 북쪽으로 뉘이고 흙을 다시 덮었다. 봉분은 만들지 않았다. 산주인이 나중에 알면 큰 분쟁거리가 생기니 봉분은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이진사의 명이 있었다. 봉분을 주변의 낙엽을 모아서 흔적도 없이 위장을 하였다. 망자의 소원처럼 임금이 거처하는 북향이었다. 임무를 마친 일행은 큰절을 두 번 올린 후 신속히 하산하였다. 날이 점점 밝아오고 있었다.
망자의 유언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삼총사가 마을에 도착하니,마을 여기저기에 아침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곧이어 쌀로 채워 무게를 맞춘 빈관은 상여에 실려 가짜 장지로 떠났다. 그날 그 고을이 생긴 이후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호위무사 최상수의 인간 됨됨이에 반한이 진사는 외동딸 다솜이와 결혼을 허락했다. 비슬산 너머 청도에 신집살림을 시작하였다. 이달호의 유복자 아들이 부인 채씨로부터 태어났다. 이름을 이원직이라고 했다. 다음 해 이달호의 제사 다음날 채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간다며,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서를 남기고,횟나무가지에 광목을 매고,자결했다.
이진사는 며느리의 장례식을 치르고,호위무사 최상수에게 데릴사위로 들어와 살기를 요청했다. 그날부터 최상수는 다솜이와 함께, 다솜이에게는 조카이며, 이달호의 아들인 원직이를 소중히키웠다. 원직이가 무럭무럭 자라 다섯 살 될 무렵 어느 날 이들 셋이서 최상수의 고향,청도 가는도중에,청도 고개를 넘게 되었다. 아장아장 앞서 걷던 아기가 어느 순간 자꾸 뒤처지며 뒤를 되돌아보았다. 마침내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짝반짝하는 저기 뭐꼬?"멀리 가파른 절벽 근처의 암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호위무사 최상수가 가파른 절벽을 날렵하게 타고 올라가더니,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금덩어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황금덩어리 었다.가던 길을다시 되돌려,긴급히 이진사에게 보고 했다.
"어르신,이런 것이 그곳에 한두 개가 있는기 아임니더.사람들 눈이 안 가는 그 절벽 안쪽에는 더 많았심더.되돌아와서 보니 반짝이던 것이 안 보이는 걸 보니,이 금덩어리 한 개 때문입디더.그러이,외부사람들은 접근조차 못하는 절벽이라 아무도 모르겠습디더"
이진사는 최상수,다솜이,손자 원직이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그곳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 말아라. 조선의 운명이 걸려있는 중요한 일이다"
세 살 때 천자문을 뗀 이원직인지라,그뜻을 이해했다. 모든 결정은 이진사가 할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경제기반부터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식민지 건설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1904년 제1 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주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차관 공세는 우리 정부와 민간의 경제적 독립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당시 우리나라의 토착 자본은 일본 차관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07년 2월 중순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은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상인들은 일본 차관과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에 인천ㆍ부산ㆍ원산ㆍ평양 등지에서 상업회의소 등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지식인들은 각종 단체ㆍ학회ㆍ학교ㆍ언론기관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운동에는 신지식인뿐만 아니라 유림과 전ㆍ현직 하급관리들도 각 지방에서 상민층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또, 이 운동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부녀 층이 참여하여 각종 패물을 보내온 점이다. 그리고 노동자ㆍ인력거꾼ㆍ기생ㆍ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적극 참여하여 이 운동은 그야말로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 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과 베델(Bethell, E.T.)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 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 소비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일제는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비슬산에 있는 그 금광을 개발하기만 하면 일본으로부터 빌린 차관을 몇 번 갚고도 남을 막대한 국유 재산이었다. 나아가 군대 양성, 최신식 무기 구입으로 자주국방을 하여 조선을 일본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금광을 개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고민에 이진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합병되어 국권을 상실하였기때문에,그 금광 발굴권은 일본으로 넘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어느 날 도동서원의 사백년된 은행나무 밑에 어떤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서 있었다.이진사가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복잡한 심사를 달랠 겸 도동서원의문을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먼저 노인이 이진사에게 말을 걸었다.
"학동들은 공부를 잘하는가?"
이진사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예 삼감 마마,이곳까지 어인 일이 시온지요?"
이진사가 땅에 엎드리자,그 노인은
"내가 변복을 하고 전국을 시찰 중이라,나를평범한한노인으로대해주게"
라며, 황급히 이진사를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일거수일투족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진사가 황금에 대하여 보고하자,노인의 입가에는 비통한 의미의 웃음을 지으며
"잘 알았네,그러나,지금은 때가 아니네. 이미늦었네.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이것도 다 국운일 세"이어서
"그 금광을 우리가 힘을 되찾는 날 개 발하기로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기로 하세.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하네. 난 이만 가네"
"명심하겠습니다.부디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1907년 마침내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퇴위를 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간악한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1910년대한제국은 멸망하였다.
이진사는 금광의 위치에 대하여 전설 같은 유언을남겼다.
첫째, 마을 뒤 고갯마루의 "두꺼비바위"가 입으로 가리키는 방향
둘째,"십이리"마을
셋째,"대견"이라는 지명(큰 어깨)
즉, 두꺼비바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십이리 가면 비슬산의 어깨에 금광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즉시 지도를 펼쳐보면,그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