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바닷가 마을에서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적당히 조용하며 주변 대도시에서 오고 가기 편해, 주말이면 바다를 보러 외지인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동네였다. 여름 휴가철이면 해수욕을 즐기러 관광객들이 찾아왔다. 해변 곳곳에는 텐트가 들어섰고, 밤이면 그들이 밝힌 불이 바다에 비쳤다. 대뜸 터지는 폭죽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깬 동네 개들은 짖는 소리로 화답하곤 했다. 폭죽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뒤엉킨 밤이면 창문을 열고 밤하늘에 끼얹어진 흰색 싸구려 폭죽을 보며 밤을 지새웠다.
지금이야 토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지만, 그때는 오전 수업을 위해 등교를 했었다. 여름 방학이 다가올 때쯤 주말이면, 학생들의 등교 장소는 바닷가였다. 각 학급의 반장들은 ‘쓰레기는 집으로’라는 어깨띠를 둘러메고 각 반의 맨 앞에 섰다. 전날의 여흥에서 덜 깬 관광객들이 꾀죄죄한 모습으로 우리를 쳐다보곤 했다.
내가 1학년 때 처음 시작된 주말 봉사였다. 사실 말이 봉사일 뿐 관광객들 겁주기였다. 푸지게 놀고 다음 날 바닷가를 보며 텐트 속에서 눈을 뜰 거로 생각한 사람들은 시골 학생들이 모래를 뒤적이며 쓰레기를 줍는 광경을 펼쳐졌다. 당황한 관광객들은 학생들에게 뭐라 하지 못하고 주변의 선생을 찾으려 나선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지역 상인들도 굳이 지금 해야 하냐며 학교 측에 항의했지만, 학교는 완강했다. 이렇게 해야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지역 사회에서도 문제를 의식했고 쓰레기 없는 바다를 강조하고 관광객들이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가도록 유도하는 캠페인으로 변모했다. 학교와 학생들의 주말 봉사는 큰 흐름을 만들었다.
바닷가 쓰레기 줍기는 시골 마을의 단체 행동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신기하게도 쓰레기는 쉽게 줄지 않았다. 해변 곳곳에는 여전히 깨진 유리병과 일회용품들이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었다. 봉사 활동을 하는 그 순간에 눈치를 보던 관광객들만이 조금씩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더욱더 어이없던 것은 바닷가에 떠밀려온 쓰레기들은 지역 어민들이 대충 처리한 폐그물, 아무렇게나 내다 버린 부표 따위의 것들이었다. 그럴 때면 어민들은 잽싸게 나타나 본인들이 치우겠다며 들고 사라져버렸다.
여전히 그때 외쳤던 구호들이 생각난다. “바다는 모두의 것! 쓰레기는 나의 것!”. 정작 뜨끔했던 건 관광객뿐만이 아니었다. 왜 꼭 지금 해야 하냐는 지역 상인들과 어민들의 눈초리가 더욱 또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