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만들고 보자"가 왜 독이 되는가

PART 1. 시작의 실패 02

by 행간 HanggaN

나는 꽤 오랫동안 '일단 시작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었다.


생각만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일단 뛰어드는 게 낫다고.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다간 영원히 시작 못 한다고.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너무 편하게 써먹었다.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처럼.


블로그를 만들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일단 만들고 보자. 쓰다 보면 방향이 생기겠지."

스무 번. 스무 번을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 블로그를 만들었던 건 20대 중반이었다. 당시 주변에 블로그로 용돈을 번다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직접 쓴 글에 광고가 붙고, 협찬이 들어오고, 심지어 책을 낸 사람도 있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만들었다. 여행 블로그를. 여행을 특별히 자주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사진이 남들보다 잘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여행 블로그가 멋있어 보였다. 스킨을 고르는 데 두 시간을 썼고, 블로그 이름은 영어로 지었다. 왠지 그래야 더 그럴싸해 보일 것 같았다.


첫 글은 제주도 여행 후기였다. 나름 공들여 썼다. 사진도 열 장 넘게 올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회수는 며칠이 지나도 한 자릿수였다. 댓글은 없었다. 이웃도 늘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을 쓸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첫 번째 블로그는 조용히 죽었다.


두 번째 블로그는 독서 기록이었다. 책을 좋아하니까 독서 블로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번엔 좀 더 꼼꼼하게 준비했다. 카테고리도 나눴고, 글 형식도 미리 정했다. 책 제목, 한 줄 요약, 인상 깊은 구절, 내 생각. 깔끔했다. 세 편을 올렸다. 반응은 역시 없었다.


네 번째 글을 쓰려고 앉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왜 쓰고 있지? 나를 위한 기록인지,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건지, 수익을 바라는 건지.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목적이 없으니 이유도 없었다. 이유가 없으니 계속할 힘도 없었다. 두 번째 블로그도 그렇게 끝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매번 조금씩 달랐다. 주제가 달랐고, 플랫폼이 달랐고, 다짐의 강도가 달랐다. 하지만 구조는 똑같았다.설렘으로 시작하고, 무반응에 흔들리고, 목적을 잃고, 조용히 멈췄다.


나는 그걸 '끈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내 의지가 약한 탓이라고. 그래서 다음번엔 더 독하게 마음먹었다. 더 비장하게 시작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목적이 없었던 거다. 목적이 없는 블로그는 구조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블로그는 글을 쓰는 공간이고, 글을 쓰는 건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에너지를 쓰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이유가 외부에서 오는 것, 즉 조회수나 댓글이나 수익이라면 그게 없을 때 버틸 힘이 없다. 초반엔 거의 아무것도 없으니까.


버티게 해주는 건 결국 내부의 이유다. 내가 왜 이걸 쓰는가. 이 글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블로그가 결국 어디를 향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을 가지고 시작한 블로그와, 그냥 일단 만든 블로그는 조회수 0 앞에서 전혀 다르게 반응한다. 전자는 계속 쓴다. 후자는 멈춘다. 나는 스무 번 내내 후자였다.


"일단 만들고 보자"는 말이 독이 되는 건, 시작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그 말 뒤에 아무것도 없을 때 독이 된다. 만들고 난 다음에 뭘 볼 건지, 어디를 향해 갈 건지, 누구에게 무엇을 남길 건지. 그게 없으면 블로그는 그냥 텅 빈 공간이다. 텅 빈 공간은 채우기가 너무 막막하다. 막막함은 멈춤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말하면, 시작 전에 딱 세 가지만 정해도 달라진다. 이 블로그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나는 이걸 통해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6개월 후 이 블로그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가.


거창할 필요 없다. 길게 쓸 필요도 없다. 노트에 두세 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 두세 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글이 막힐 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나는 스무 번 모두 그 두세 줄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면서 브런치북의 목차부터 고심하며 완성했다. 적어도 15편, 20편 글을 쓰겠다는 나만의 작은 목표다. 이 도전은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고, 지난 날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내 안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라 할 지라도 6개월 후에 나는 브런치북 연재를 마친 어엿한 브런치 작가로 나를 소개할 수 있으리라.


지금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한 가지를 덧붙인다. 일단 시작하되, 왜 시작하는지는 알고 시작하자고. 그게 거창한 사명일 필요는 없다. 그냥 솔직한 이유면 된다.


"나는 퇴근 후 내 생각을 정리할 공간이 필요하다." "나는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다." "나는 5년 후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해두고 싶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 한 문장이 블로그를 살린다.


블로그를 몇 번이나 시작했다가 멈춘 적 있다면, 한 번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 그냥 목적이 없었던 것뿐이다.


목적은 시작 전에 정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