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시작의 실패 03
내 블로그 소개란에는 늘 이런 문장이 있었다.
"일상, 여행, 책, 음식, 생각을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지금 보면 아찔하다. 저 문장은 사실 이렇게 읽힌다.
"딱히 뭘 쓰는지 모르겠는 공간입니다."
블로그 주제를 넓게 잡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의 주제만 고집하면 쓸 게 금방 떨어질 것 같았다. 여행만 쓰면 여행을 안 가는 달엔 글을 못 쓰고, 책만 쓰면 책을 안 읽는 주엔 업로드가 끊긴다. 그러니 다양하게 쓰는 게 더 지속 가능한 방식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틀린 생각이었다. 주제를 넓게 잡은 블로그는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망했다. 왜 그랬는지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문제는 독자가 아니라 나한테 있었다. 주제가 없으면 글감을 고르는 것 자체가 매번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이 된다. 오늘은 뭘 쓸까. 여행 후기? 요즘 읽는 책? 그냥 일상? 선택지가 많을수록 결정은 어려워진다. 결정이 어려우면 미루게 된다. 미루다 보면 안 쓰게 된다.
넓은 주제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번 새로운 부담이었다. 반면 주제가 좁으면 고민할 게 줄어든다. '직장인의 퇴근 후 루틴'을 주제로 잡은 블로그라면 오늘 쓸 글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고민은 어떻게 쓸 것인가로만 좁혀진다. 그게 훨씬 쓰기 쉽다.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누군가 번아웃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검색을 하다가 두 블로그를 발견했다. 하나는 '일상, 여행, 책, 음식을 기록하는 블로그'고, 다른 하나는 '직장인의 번아웃과 회복을 기록하는 블로그'다.
어느 블로그의 다른 글도 읽어보고 싶을까. 어느 블로그를 구독하고 싶을까. 답은 너무 뻔하다.
넓은 주제의 블로그는 딱 그 글 하나만 읽히고 끝난다. 좁은 주제의 블로그는 다음 글이 궁금해진다. 그 차이가 쌓이면 유입과 구독자 수에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읽히고 싶다'는 욕심으로 주제를 넓혔다. 결과는 반대였다. 아무에게도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을 독자로 삼으면, 결국 아무도 독자가 아닌 게 된다. 이건 블로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잡지도, 유튜브도, 팟캐스트도 마찬가지다. 명확한 타깃이 있는 콘텐츠가 살아남는다. 타깃이 좁을수록 그 안에서의 신뢰는 깊어진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주제를 좁힌다는 게 평생 한 가지만 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핵심 주제가 있고, 그 주변을 다루는 것이다. '30대 직장인의 돈 관리'를 중심으로 쓴다면, 가끔 번아웃 이야기를 해도 되고, 책 이야기를 해도 된다. 독자가 그 블로그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조금의 이탈은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 된다.
하지만 중심이 없으면 주변도 없다.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건, 독자 입장에선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지금도 블로그 소개란에 쉼표를 다섯 개 이상 쓰고 있다면, 한 번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블로그는 누구를 위한 공간인가.
그 사람은 이 블로그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가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주제가 아직 너무 넓은 것이다. 좁히는 게 두렵다면 이렇게 생각해보길 바란다. 모든 사람에게 읽히는 블로그보다, 딱 한 사람에게 깊이 읽히는 블로그가 오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