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3)

스튜디오 촬영하기 ③

by 눅눅한과자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다시 시작된 촬영. 야외 촬영이라고 어디 멀리 나가는 건 아니었다. 스튜디오에 속한 야외 계단, 정원, 그리고 아침에 차를 타고 지나왔던 그 골목길에서 우리는 또 다양한 포즈를 취했다. 길가를 거닐거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등 실내 촬영에 비해 다양한 움직임이 요구되어 촬영 자체는 더 재밌었으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멀쩡히 당해날 재간은 없었다.


촬영 시작 때만 해도 머리 꼭대기에서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은 어느덧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붉은 석양으로 변해 긴 그림자를 곳곳에 드리우고 있었다. 추위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니와 윗니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를 내었으나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웃음을 멈추면 안 됐다. 우리는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커플을 연기했고, 마침내 사진작가분의 ‘오케이, 촬영 끝났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장장 6~7시간에 걸쳤던 스튜디오 촬영이 끝났다(그 후에 실내에 들어와서 몇 컷 더 찍긴 했지만). 나중에 스튜디오에 들려 앨범용 사진을 직접 고르라는 말과 함께.



촬영 내내 식사는커녕 간식조차 제대로 못 먹은 우리는 근처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았다. 늘 파스타니 스테이크니 하는 양식을 먹으러 오는 동네였지만, 이 날만큼은 뜨끈한 국물이 있는 한식을 선택한 뒤 식탁에 앉아 길고 길었던 하루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손은 꼭 잡았되 몇 시간 동안 별다른 말 없이 카메라 렌즈만 바라보면 우리는 이내 수다쟁이 커플이 되었다. 온화한 실내공기와 따뜻한 음식은 얼었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녹였음이 분명했다.


2,3주쯤 후에 사진 선택을 위해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업계 용어로 흔히 ‘셀렉(select)’이라 부르는 과정으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담실 모니터에 사진이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핏 봐도 수백~천 장 가까이 돼 보이는 사진 중(나중에 자세히 보니 정말 천 몇십 장이었다) 20장을 고르는 미션이 주어졌다. 선택받은 사진은 미적 효과를 위해 약간의 수정을 거쳐 앨범으로 제작한다고 한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줄로, 때론 두줄까지 나열돼 있었다. 그중 몇 장은 인물의 포즈와 표정마저 거의 비슷하여 얼핏 봐선 차이점을 알 수도 없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정도, 눈빛이 향하는 방향 같은 미세한 차이를 따지고 있자니 마치 초 고난도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한 번 봤던 사진을 몇 차례씩 돌려보며 이대로라면 밤을 꼬박 새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고민을 알았는지 상담 직원분이 꼭 20장을 ‘셀렉’하실 필요는 없다는 친절한 안내를 덧붙였다. 다만, 추가로 선택한 사진에 대해서는 앨범 제작 시 장당 몇만 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고 했다. 또한 셀렉하지 않은 원본사진도 원하면 소장할 수 있단다. 물론, 돈만 더 내면. ‘어? 이미 찍은 사진인데 제작비가 더 드는 것도 아니고... 그건 당연히 그냥 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혼 준비하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이 바닥(?)에선 선택 하나하나가 다 돈이고 우리 소비자는 그 룰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장 정도 추가 셀렉한다고 가정하고, 원본 사진도 구매하면... 이거 원래 계약한 촬영 비용만큼 더 나오겠는데?’ 머릿속으로 바쁘게 셈을 굴리다 그제야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한 여자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마침 정리가 끝났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보니까 콘셉트별로 10~20장 정도인 것 같은데, 아무리 잘 나와도 한 콘셉트당 한 장씩, 그렇게 한 50-60장 정도 추리자. 비슷해 보이는 건 과감하게 적당히 고르고. 거기서 독사진 잘 나온 거 인당 두 세장 정도씩, 나머지는 커플사진으로 하자. 그리고 모바일 청첩장에 넣을 용도라고 생각하면 정면, 측면사진이랑 서서 찍은 거, 앉아서 찍은 거 골고루 들어가면 좋을 것 같아. 그래도 더 추려야 되면 똑같은 의상 많이 찍힌 거 제외하고. 아, 아까 얼핏 보니까 야외 사진 잘 나왔던데 실내 사진이랑 적당히 섞어서 골라보자.”



이럴 때 ‘리스펙’ 한다는 말을 쓰던가. 새로운 업무에 우왕좌왕하던 신입사원 시절, 능력 있는 사수가 명쾌한 가이드라인을 줬을 때 아마 이런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의 기준에 따라 사진을 고르다 보니 한 시간 만에 천 장의 사진이 30장으로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우리 정말 잘했다고 옆에서 자화자찬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는 건지,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와중에 몇 장의 사진을 더 걸러내어 선택 목록에서 지웠다. 사진 한 장 한 장의 체크박스가 지워질 때마다 괜히 나만 아쉬운 마음에 안절부절 대며, 이 정도면 됐으니 나머지는 그냥 추가하면 되지 않겠냐고 그녀를 말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어차피 원본 파일 구매하면 전부 다 두고두고 볼 수 있을 텐데 뭐. 너무 아까워하지 마. 정 아쉬우면 나중에라도 인화하면 되지.”


말은 단호하게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사진 추리기가 지쳤는지, 더 이상 거를 필요 없이 좋은 사진만 남았는지, 아니면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녀가 몇 장은 추가 제작하는데 동의하며 마침내 사진 셀렉이 종료되었다.

그렇게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앨범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스튜디오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겉표지가 고급스러운 큼직한 앨범 하나, 스물몇 장의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으로 제작해 준 커다란 액자 하나, 그리고 폴더 안에 파일이 빼곡히 들어있는 USB 하나를 손에 들고 집에 오며 생각했다.

‘새벽까지 사진 넘겨보며 한 장씩 품평하려면 오늘도 잠은 다 잤군.’


“어떻게 보면 이 촬영까지가 결혼준비 1막 아니었을까? 실제로 스튜디오 사진 찍고 나서 한동안은 별일 없었잖아.”




아내가 앨범 마지막 장을 넘기며 추억도 함께 포개서 정리하듯이 말했다.


“그렇지? 그때까진 ‘결혼식 예고’를 위한 준비를 한 거지, 결혼식 자체나 결혼생활에 대한 준비는 거의 없었잖아. 청첩장, 결혼식장 세팅, 예단 예물, 신혼집, 신혼여행 같은 준비는 그다음부터였으니까.” 내가 맞장구쳤다.



“ 아, 그렇지. 예단, 예물, 집... 맞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결혼 후 수년이 지났건만 아직 건드리면 안 되는 역린(逆鱗)이 있다는 것을. 그래도 이럴 땐 조용히 입 다무는 게 최선이라는 걸 깨달았으니 나도 결혼 생활을 헛되게만 보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지금까지 수 번, 수 십 번은 펼쳐봤을 우리의 기록. 페이지를 다 넘기는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지만, 잠깐 과거로 돌아가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다.




keyword
이전 23화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