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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날개라고? 아니 옷이 원수지(4)

예복 맞추기 ②

by 눅눅한과자 Nov 07. 2022


  걸어서 약 10분 만에 도착한 두 번째 장소. 웨딩플래너가 추천해 준 곳으로 청담동까지 온 김에 한 곳은 더 둘러보자는 취지로 예약한 곳이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첫 집과는 달리 평범한 건물의 한 층을 쓰고 있어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입장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인지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상담을 했으나, 결과는 비슷했다. 국내/외국 원단, 가봉/반가봉, 약간 구성 다를 뿐 무료나 할인으로 대여해 준다는 기타 물품 등등... 오히려 붐비던 첫 번째 가게보다 빠른 시간에 상담을 끝내고 나왔다.

      

  그리고 고민했다. 누구나 한 벌씩 맞추는 예복이라지만 이렇게 아무런 확신 없이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게 맞는지. 아직 시간적 여유도 있겠다, 몇 군데 더 알아보고 최종 선택을 하기로 하고 평일 퇴근시간을 이용해서 양복점 두어 군데를 혼자 방문해 봤다. 앞서 가 본 예복 전문 업체와 달리 오피스가 근처의 가게들은 규모는 작고 구성품도 심플했다. 턱시도니 대여 같은  결혼식용 서비스 없이 일상용 정장만 판매하고 있었으며 상담도 재단사가 직접 진행했다. 영업용 미소 없이 자부심에 넘치는 그들의 모습이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한편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다만, 소규모 매장의 특성상 완성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아 양복 원단을 모아 책처럼 만들어 높은 원단 북(book)을 보고 재질을 선택해야 했다. 원단이 비싸서 인지 그 크기가 손바닥만 했는데 상상력이 부족한 탓인지 나는 도저히 이 재료가 양복으로 완성된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장인(匠人)에 대한 믿음 하나에 의지한 채 최종 결과물을 기다려야 하는 이 방식이, 온갖 비교 분석을 동반한 현대 쇼핑에 익숙한 나에겐 다소 시대를 역행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결혼식 때 일반 정장을 입고 싶기도 했고(턱시도는 왠지 모르게 유난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다소 거품처럼 느껴지는 각종 서비스보다 세상과의 타협 없는 재단사의 고집스러운 설명이 인상 깊었던 나는, 일반 양복 전문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결국 개중 제일 신뢰가 가는 가게로 여자친구를 데려갔으나, 그녀는 재단사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도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출구를 나서며 말했다.     

 “오빠, 지금까지 본 데 중에서 하는 것도 좋은데 우리 한번 백화점에 가볼까?”     

 “응? 지금까지 이렇게 돌아다녔는데? 백화점은 기성복 아냐?” 의아해진 내가 물었다.     

 “아니, 나는 그냥 우리 결혼식 때 입을 옷인데 이렇게 불확실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나는 브랜드 옷들이 훨씬 예뻐 보여, 직접 맞춘 옷이 얼마나 편할진 몰라도. 어차피 양복 맞춘다고 평상시엔 거의 안 입을 거잖아. 디자인이 우선 아닐까?”     


  내가 말로 어떻게 그녀를 당하랴.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집 근처 백화점 양복 코너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왕 온 거, 평소엔 엄두도 못 내던 명품부터 사회 초년생 때 출근복을 샀던 중저가 브랜드까지 빠짐없이 훑어봤다. 양복점들도 가게에 따라 꽤 차이가 나긴 했지만, 역시 백화점에 오니 수십에서 수백만 원까지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동안 애써 보고 다닌 맞춤 슈트들이 저렴해 보일 지경이었다.

      

  이 옷 저 옷 입어보며 한 시간쯤 둘러봤을까, 나도 익히 아는 브랜드 이름 앞에서 그녀가 발걸음을 오랫동안 멈췄다.      

  “이거 예쁘다, 가격도 적당하고. 입어보니 오빠랑도 잘 어울리네. 어때? 괜찮아? 무슨 색이 마음에 들어?”     아닌 게 아니라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 때문인지, 그동안 반(半) 완성 제품만 보다가 완제품을 봐서인지, 아니면 역시 이름 있는 브랜드 값을 하는 건지, 지금까지 입어본 그 어떤 옷보다 괜찮아 보였다.


  “나는 검은색보단 네이비가 좋아. 아.. 근데 잠깐, 우리 이걸로 하는 거야? 가격도 이 정도면 맞춤정장이랑 거의 똑같은데? 너무 브랜드 값 아닌가? 약간 이 부분이 답답한 거 같기도 하고.”     

 내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원하는 부분은 사이즈 수선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리폼된대, 이 정도면 반(半) 가봉 방식이잖아. 오빠, 나는 내 남자친구가 내가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입고 결혼식 때 내 옆에 섰으면 좋겠어.”     

 아 맞다, 이 똑소리 나는 아이는 내가 용산에서 발품 팔아 최고 사양으로 맞춘 조립 컴퓨터보다 저 사양 S전자 컴퓨터가 낫다고 말하는 애였지. 브랜드리스(brandless) 제품에 대한 경계도 그 누구보다 심한.   

   

  더 이상 내 고집을 더 부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내가 이거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것도 없으면서 로망 운운하는 것도 우스웠고, ‘도대체 우리는 왜 투어(tour)라는 어색한 명칭까지 붙여가며 이 옷 저 옷을 고르고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생각도 들었다. 결국 결혼식이란 한 순간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거늘. 결혼 핑계로 두고두고 입을 옷 한 벌 ‘빼’ 입는 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리고 선물이란 받는 사람의 기분도 중요하지만 주는 사람도 기뻐야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그렇게 ‘예복 투어’는 누구나 예측 가능하듯, 그녀가 그 자리에서 기분 좋게 백화점 카드를 긁으며 종료되었다. 맞춤 정장이란 로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결과지만, 이상하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결국 이 녀석이 됐단 말이지... 넌 영화 킹x맨도 안 봤냐? 맞춤옷은 남자의 로망인데 결국 이걸 사다니”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며 내가 말했다. 한복을 꺼내며 시작된 돌잔치 준비 건만, 어느새 내 손엔 예복으로 쓰인 양복이 들려있었다.     


  “왜, 예쁘기만 한데. 지금 봐도 진짜 괜찮지 않아? 엄청 잘 입고 다니면서. 그래도 가끔 미안하긴 해. 오빠가 적어도 패션 관련해선 그 정도로 강력하게 자기주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장난이야, 나도 마음에 들어. 그리고 내가 언제 옷 한 벌 사러 대여섯 곳을 돌아다니겠어. 좋은 경험 했지. 사실상 우리끼리 의견 안 맞은 거의 유일한 항목 아니야?”     


  “응, 그래도 한복보단 양복이 훨씬 수월했지. 우리 둘만의 문제였으니까. 참, 사진 업체엔 전화해 봤어? 돌 당일날 몇 시까지 오래?     


  추억 팔이도 잠시, 우리는 그때보다 늘어난 새 가족을 위한 이벤트 준비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예복 투어를 끝내고 보니 양복 사진은 없고, 근처 유명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만 남아 있었다. 예복 투어를 끝내고 보니 양복 사진은 없고, 근처 유명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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