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날개라고? 아니, 옷이 원수지(3)

예복 고르기①

by 눅눅한과자

다음 단계는 신랑 예복 고르기. 결혼 준비를 시작하며 은근 기대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요샌 회사도 캐주얼 복장이 트렌드가 되어 정장을 차려입을 기회가 별로 없긴 하지만, 남자라면 대개 고급 맞춤정장 한 벌쯤은 소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니까.


처음으로 여자친구 도움 없이 온전히 혼자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역시나 인터넷엔 친절하다 못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료가 넘쳐났다. 어느 가게에 가서, 무슨 제품을 보고, 결국 그래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시간 순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글을 볼 때마다 글쓴이가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막연히 ‘남자는 결혼식 때 정장 한 벌 빼 입는다’ 고만 알고 있던 나는 복잡한 결혼 준비 시장에 또 한 번 혀를 내둘렀다. 온갖 사례가 있었지만 요약컨대 예복용 정장을 맞추는 방식엔 가봉, 반가봉, 기성복 구입의 세 가지 종류가 있으며, 양복집은 크게 예식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와 일반 양복집으로 나뉜다 한다.


일단 가봉은 신체 사이즈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양복 원단을 처음부터 재단하는 방식이고(한복 가봉과 유사하다), 반가봉은 옷 모양 틀을 어느 정도 잡아놓은 상태에서 입는 사람의 몸에 맞게 신체 부위별로 치수를 조정하는 방법, 기성복은 말 그대로 만들어져 있는 옷 중 자기 사이즈와 맞는 것을 구입하는 것을 말한다. 이 순서대로 사람의 품이 많이 들어가므로 당연히 제작기간도 길고 가격도 높다. 그렇다면 뭇 남자의 로망은 가봉 방식. 특히 영화 같은 데에서 후줄근한 주인공이 맞춤 정장 한 벌을 해 입고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물론 인물이 잘생겨서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지만).


제작 방식은 마음을 정했으니 다음은 업체를 고를 차례. 다시 한번 세상의 모든 부지런한 이들에게 감사하며 카페와 블로그 정리 글을 검색했다. 양복점도 크게 나누면 두 종류라고 한다. 먼저 아예 결혼식 예복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들로, 이런 곳들의 특징은 결혼식 예복을 위한 전문 상담원이 따로 있으며 갖가지 이벤트와 서비스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장을 맞추면 턱시도나 구두 같은 액세서리들을 무료로 대여해 준다거나 하는 식이다. 반면, 그런 걸 너무 상업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양복점에 가서 재단사와 직접 상담하고 다른 부속품 없이 정장만을 맞춘다고 했다.


아직 시간적 여유도 있겠다, 종류별로 서너 군데 정도 돌아보기로 했다. 시간이 되면 여자친구와 같이, 안 되면 혼자서라도 방문해 보고 혼자 가본 곳이 마음에 들면 같이 한 번 더 와보기로 했다. 내가 입을 옷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센스를 믿을 수도 없거니와(이상하게 여자친구가 골라주는 옷이 늘 잘 어울린다), 결혼 선물 겸 그녀가 사준다고 하니 결정권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 주말 시간을 잡아 둘이 같이 ㄱ 양복점을 찾았다. 예비 신랑, 신부들의 '예복 투어'에 반드시 포함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라 웨딩 플래너를 통해 미리 예약은 필수였다. 청담동의 한 조용한 주택가 골목 사이에 위치한 고급스럽고 깔끔한 건물, 발레 파킹을 맡기고 입구에 들어서니 세련된 블랙-우드톤으로 디자인한 홀에서 안내직원이 우리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가지런히 진열된 양복과 관련 액세서리 속에 쌓여있으니 왠지 모르게 점잖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마도 평일 한적한 시간에 왔으면 내가 생각하던 VIP 느낌의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방문객이 너무 많았다. 매장이 꽤 넓었음에도 여러 예비 신혼부부 사이에서 직원의 안내를 독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과장하면 주말 혼잡시간 백화점의 분위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달까.


정신없는 와중에 상담받은 내용은 이렇다. 양복 원단은 크게 수입과 국내 원단으로 나뉘는데 수입 원단이 보통 질이 좋고 더 비싸다. 수입 원단도 나라별로 특징이 있는데 어떤 것은 윤기가 나고 부드러운 대신 내구성이 떨어지고, 다른 나라 원단은 그 구조가 튼튼해서 오랫동안 입기가 좋다는데 특징이고... 인터넷에서 알아본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확인한 후 샘플로 여러 벌의 재킷을 입어보았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사이즈라서 인지, 아직 완성이 안 된 옷이라서인지 양복을 입었다는 느낌보다는 옷 모양의 천을 덮어쓴 느낌이었다. 질감도 ‘이건 좀 거치네? 저건 좀 부드럽네?’ 정도일 뿐 감이 오지 않는 건 한복과 별반 차이 없었다.


서비스 품목에 대해서도 안내받았다. 정장을 맞추면 턱시도를 결혼식 때 빌려주고(원래 턱시도가 결혼식 예복 용도로 쓰인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그렇다면 정장은 왜 맞추는 거지?) 넥타이와 셔츠도 할인된 가격에 해주겠다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옵션이 있었다. 워낙 사람이 붐비는 통에 정신도 없었고, 처음 접하는 정보를 분설할 시간도 벌 겸 일단 가게를 나와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라면 이 시점쯤 이러쿵저러쿵 품평을 시작해야 할 여자친구가 조용하다. 한참을 걷기만 하다 그녀가 말했다.


“오빠, 이건 나도 진짜 모르겠는데? 오빠가 정해야 할 것 같아”


내 옷이니까 내가 고르는 게 당연하건만, 갑자기 '예복 투어'가 막막해진 느낌이었다.

'예복 투어'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 옷 고를 정신도 없을 텐데 수많은 사진을 남기는 분들이 새삼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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