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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llalawoman Nov 20. 2022

지금이 제철

저녁 내내 가을에 제철인 밤을 까느라 손가락이 뻐근하고, 팔근육이 당긴다.

'단단한 밤의 껍질을 벗기면서, 왜 껍질은 이리도 단단할까? 껍질 안에 속껍질은 왜 있는 걸까? 왜 한 계절만 나오는 것일까?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시간을 버텨낸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고, 나중으로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밤의 달콤한 맛을 포기할 수 없으니 그냥 하는 수밖에 없다.

때마다 나오는 제철 음식들은 왜 한철만 나오는지 아쉽기만 하다. 일 년 내내 수확할 수 있다면 지금 이 밤의 껍질을 까느라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호박과 함께 넣어 맛있는 죽도 만들어 먹어야 하고, 갈비찜과 백숙에도 넣어야 하고, 구워서도 먹어야 하고...

왜 이리도 맛이 있어서 나는 그 맛을 포기 못해 이 고생을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우습지만, 한창때를 놓칠 수 없으니 비장하다.


조금 더 청춘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시기에는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 이리 수고스러운 일인 줄 몰랐다.

때가 되면 나오고, 때가 되면 사라지는 것으로 여겼다.


나이가 익어가니, 제철 식재료들이 가장 맛있게 익어가는 풍요의 시기를 맞이하는 마음이 경건해진다.

'일 년을 용케도 잘 견뎌내어 지금 내 손에 닿았구나. 참 기특하고, 고맙고 아름답구나.'

봄이면 햇마늘을 눈물을 흘려가며 부지런히 까야하고, 여름이면 찰옥수수를 가득 삶으면서 일 년 내내 먹을 것을 비축해두고,

가을이면 밤과 단호박 등 제철 식재료들을 부지런히 다듬고, 껍질을 까서 비축해둔다. '이게 뭐 별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 킬로씩 옥수수를 삶아야 하기에 몇 시간씩 가스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두어 시간씩 단단한 밤 껍질와 씨름을 한다.

냉동실에 단정한 모습으로 넣어두면 곳간에 식량을 가득 채운 듯 든든하다.

나의 수고로움으로 가족들은 일 년 내내 맛있는 간식과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누군가의 시간과 애씀으로 축척된 귀한 음식이 되는 것이다.


살기 위해 먹는 이에게는 비효율적이고, 생산적이지 않은 활동이리라.

하지만, 잘 먹고사는 것이 중요한 나와 같은 이에게는 이러한 수고로움과 치열한 인내심이 맛을 더 풍성하게 하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바로 지금을 붙잡지 않으면 없을 풍요로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가고, 시간이 일군 귀한 양식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간다.

애를 써야 하는 때가 있고, 그때에는 몰입하며 그 제철을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삶이 그 시간 속에서 풍요롭게 익어감을 아는 나이가 되어간다.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지금 이 시간에 머물 줄 아는 그런 나이 말이다.


근육이 더 약해지고, 걸음이 지금보다 더 느려지고, 호기로움보다는 내려놓음이 익숙해지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계절을 붙잡는 이 치열함마저도 헛헛하게 웃으며 워이 워이 손을 내젓는 내가 되겠지.


절대적 시간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

속도가 조금 더뎌지니 보이기 시작한다.

햇살의 바스락 거림, 구름이 머금은 물기의 차이, 과실들의 빛깔마저 모든 것이 매 순간 다르게 흘러감을 알아채는 나이가 된다.

나도 그 빛깔처럼 분명 어제와 오늘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나도 그들과 다를 것이 없는 존재이다.


시간에 머무르고 계절이라는 순간에 몸과 마음을 담구어 유영하는 삶을 알게 됨이 참으로 생경하지만 기분 설레는 낯섦이다.

계절에 더 깊이 온 맘을 다해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제철이라는 것이 내게도 있었는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지금이 제철이다'라고 믿어보련다.

각 계절마다 제철의 양식이 있으니, 내 삶에는 제철로만 가득한 시간들이 풍성하게 담기길 알량한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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