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백 Feb 12. 2021

도둑년의 싱크대

 드디어 엄마 집으로 왔다. 


 가장 먼저 엄마의 집밥을 먹었고, 아빠와 엄마 옆에 앉아 종일 종알거렸으며, 친구를 잠깐 만났다. 그렇게 쉬는 꼬박 이틀을 보내고 일을 하다 문득 “아들은 강도고, 딸은 도둑년이고 며느리는 바람잡이래.하던 엄마의 말이 스치었다. 딸 가진 엄마는 딸내미 싱크대 밑에서 설거지하다 죽는다는 웃픈 이야기도 함께 떠올라 엄마가 잠시 외출한 사이 엄마의 싱크대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쌓여있는 설거지 더미, 낮 동안 멍하게 앉아있던 엄마가 생각났다. 한 번도 온기가 있었던 적 없었던 것처럼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부엌 바닥에서 참지 못하고 슬리퍼를 신었다. 싱크대 앞 창 너머 너른 바다가 언뜻 보였다. 무수한 일들이 눈 앞에 흔들거려도 엄마는 이곳에서 밀린 설거지를 해냈을 것이다. 요즘엔 별로 설거지를 미루지 않는다는 아빠의 말도 생각났다. 다만 며칠이라도 미루고 싶었을 엄마의 고단함이 마음에 층을 남겼다. 


 엄마가 외출에서 돌아오기 전에 얼른 해치우자는 생각에 고무장갑을 찾았다. 엄마의 큰 체격에 비해 고무장갑은 턱없이 작았다. 엄마의 손이 이리도 작았던가. 너저분한 설거지 더미에 켜켜이 접시를 쌓아 올려둔 뒤 가장 큰 팬부터 씻어나갔다. 꽃잎 모양을 하고 그 무늬를 머금은 그릇의 가장자리엔 움푹 파인 곳마다 누렇게  물 때가 끼어 있었다. 잘 씻기지 않는 묵은 때는 철수세미를 이용해서 박박 지웠다. 후에 엄마가 이를 알고 괜한 고생을 사서 했다 했다. 널찍한 팬은 테두리만 언뜻 갈색을 뗬는데 바닥은 원래부터 회색빛이었던 듯 헤져있다. 이 빠진 그릇도 눈에 띄었다. 어릴 적에 밥 말아먹던 스뎅인지 스테인리스인지 모를 쇠그릇도 여전했다. 아빠의 빛바랜 금빛 수저가 짠했다. 모두가 세월을 먹고 닳았으면서도 이십여 년의 세월을 꼬박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엄마 인생의 묵은 때를 벗겨주는 일이 과연 설거지뿐일까.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삼십 대 철부지 딸내미가 도둑년이 되지 않는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예쁘고 좋은 그릇 한번 가져보는 것이 당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인 듯 엄마의 그릇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 하나도 소중히 하며, 비닐봉지 한 장 그 쓰임을 못할 때까지 쓰고 또 쓰고 살면서 엄마는 일회용기들은 몇 번의 재활용과 몇 번의 안타까움 사이에서 도대체 언제쯤 버려졌을까. 


 어릴 적,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난 네가 삼시세끼 밥 뭐해먹을지 고민하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의 말은 자신의 소망을 담아 깊고 무거웠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삼시세끼 어떻게 밥상을 차려낼지보다 더 집중해야 할 많은 고민들이 있다. 가진 것, 모은 것, 모을 것 하나 없는 딸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는 엄마에게 이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될까. 딸의 입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쳐 나가는 이 고민들 대신 삼시세끼 어떤 밥을 할지 고민하는 것이 조금 더 편할 것 같다는 철없는 생각이 든다. 


 요즘엔 딸, 딸, 딸 세 명을 낳아야 100점이라던 어떤 택시기사분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당신은 아들, 딸, 딸이라 90점이라나. 우리 부모님은 아들, 아들, 딸이니 그 점수가 몇이 될까. 그 와중에 딸이 차지하고 있는 점수의 반만이라도 내가 채울 수 있을까. 엄마가 싱크대 밑에서 점차 무력해지는 것을 내가 조금이나마 더디게 할 수 있을까. 


 거창할 것 없다. 그래, 거창할 것 없다고 나 자신을 위안한다. 


 오늘 하루, 어린 시절 엄마를 맞이할 때 그때처럼 환히 맑게 웃겠다. 도리어 귀찮다고 할 때까지 종알거리며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온전히 삼키리라. 그 시간들이 결국 나의 뼈와 살이 되고, 피와 혼이 되어 내게 남겨진 이 남은 생을 버티게 해 줄 것이다. 결국 미진한 나의 레벨에서는 이 한 몸 건강하고 밝은 것이 먼저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1-8) 내가 널 알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