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슬픔의 문턱에서'
내 안의 불그스레한 그것이 솟구치는 밤,
드르륵- 드르륵- 진동이 울리며 ‘엄마’ 두 글자가 전화에 동동거린다
엄마-
나지막이 말해본다
드르륵- 드르륵-
와르르 쏟아내며 불러본다
엄마아아-
내 무슨 용기로 이 여자에게 세 번째 슬픔을 만들겠나
- 세 번째 슬픔의 문턱에서
시골에 조그마한 보습 학원 강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꽤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우선 학생들과 수준이 맞았다. 나이도 가장 어렸고 (내 나이 스물둘 셋 즈음이었으니) 달달한 거북알 아이스크림을 좋아했으며 게임을 사랑했다. 수학 기피자였던 문과 출신의 내가 중등 수학을 가르치면서도 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게임을 사랑하는 남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엔 가장 큰 스트레스가 내 짧은 가방끈이었다. 그곳엔 가방끈이 정말 긴 원장이 있었고, 그 학원의 실세이자 왕년에 삼성전자인지 현대자동차인지 기억나지 않는 대기업의 과장을 했다던 원장의 아버지, 실장님이 계셨다. 내 수업은 인기가 많아 학생들의 친구들이 그 친구들의 형제자매가 학원에 등록했지만, 실장님은 수시로 나와 내 가방끈에 대해 내 수업방식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 수업에 불쑥불쑥 들어와 아이들을 다그쳤으며, 난 그 모든 것이 내 가방끈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는 학원 일을 병행하며 서울 방송 아카데미에 등록을 했다. 시나리오 작가에 지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작 되고 싶었던 것은 드라마 작가인데 시나리오 작가를 지망하면서도 정작 된 것은 다큐멘터리 보조작가였다. 요즘 예능에 얼굴을 비추는 자연주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 한 편이었으며, 자연주의 요리의 소재와 장소부터 시작하여 어떤 식당을 방문할 것인지 어떤 사람들을 섭외할 것인지 온갖 잡다한 자료 조사를 하는 역할이었다. 고작 석 달을 일하면서, 무릎 밑에 오는 치마를 입으면 치마를 입었다, 커피를 마시면 그 커피 캡슐이 얼만 줄 아느냐(하나에 천 원이었을 거다), 치사해서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가면 사치를 부린다, 휴대폰을 새로 장만했을 때엔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휴대폰을 샀는지 캐물었고, 태워다 주겠다 해서 억지로 탔더니 이런 차 타봤냐 등의 온갖 허세와 지적질에 내 머리 구석구석에 원형 탈모를 얻어야 했다.
그때에도 찾아가지 않았었는데, 10년이나 나를 온전히 바친 회사가 정신과에 발을 담그게 했다.
벌써 두어 해가 지났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따뜻한 오후 햇살 같은 노랗거나 주홍빛 나는 조명 속에 진 녹빛 초원 사진이 큼직하게 걸려 있고, 언제나 잔잔히 클래식이 흘러나오며, 편안해 보이는 소파는 사이좋게 서로의 간격을 지키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곳이다. 나이 지긋하신 간호사인지 와이프인지 모를 분이 카운터를 지켰고, 늘 조용하게 상담실 문 밖에 마중 나와 이름을 호명하는 푸근한 인상의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께 대강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무미건조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자꾸 났고, 눈물이 나는 나 자신을 느끼며 이것은 약을 얻어내기 위한 연기인가, 나 스스로가 정말 이 정도로 지쳐 있는가 하는 물음 사이에서 그 방을 나오곤 했다. 어찌 되었거나 약만 얻으면 성공이었다.
선생님께선 내가 처음 이 밝은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는 불안증이랬고, 지금은 우울증이라고 ‘심각한가요?’라는 내 물음에 간결히 답해주었다.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추가된 것이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싶다.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환경과 조건 속에서 나는 자살을 생각했다. 더불어 남겨질 이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나눗셈했고, 당연히 얼마 되지 않았다. 생명 보험을 검색해봐도 자살로 나눌 수 있는 한계는 분명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자살에 대한 생각은 출구가 없었다. 처방된 약은 그런 내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면 잠을 주었다. 나도 모르는 새 잠에 들었고, 잠에서 깨면 차가운 새벽녘이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어김없이 이름 모를 대만산 따뜻한 차나 커피를 준비했다. 그리곤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얼마간 흰 백지 위에 끄적이기도 했고, 방 한 켠에 펼쳐 놓은 퍼즐을 맞추거나 책을 읽었고 동백이와 산책을 나갔다.
우리 집엔 마음에 감기 든 사람이 나를 포함하여 셋 있다. 나의 쌍둥이 조카들은 마음에 감기가 너무 이른 나이에 들었고, 거진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미술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한 녀석은 미술 치료를 받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여주인공을 곧잘 똑같이 따라 그리고 있다. 다른 한 녀석은 그 좁은 제주도에서 매일 통학을 4시간씩 하면서도 할머니에게 곧잘 전화하며 어디인지 뭐하는지를 캐물으며 제 친구 대하듯 하고 있다.
나와 두 조카들이 쉬이 이 곳과 작별하지 못하는 접점에는 엄마가 있다. 엄마는 내 약봉지를 보며 속상하지 않냐 묻는 나에게 가볍지만 참 묵직하고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몸에 감기가 오듯 마음에도 오는 감기가 있어. 감기처럼 약 먹고 훌훌 털면 돼.
나는 엄마가 암으로 엄마의 엄마를 잃고, 동생을 잃고, 이제 딸까지 내놓으라는 더없이 철없는 그 짓만큼은 죽.어.도 할 용기가 없다. 내가 무슨 염치로 엄마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음을 접었다.
나는 내 주변에 구체적으로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상태에 대해 상황에 대해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 상대의 날카로운 말에는 예민한 내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고, 정리 정돈되지 않은 요청에는 내 이해력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는, 내 부족한 판단력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의견을 구했다. 가급적 ‘미안해’라는 말을 앞이나 뒤에 달았다. 이미 몸은 암으로, 마음은 감기로, 지칠대로 지쳐 어떤 의욕도 희망찬 미래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래서, 난 조금 더 쉽게 양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다보니 하루 하루의 생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Garbage in Garbage out”
다행히도 내 주변에는 In & Out이 나와 비슷한 흐름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남아있는 것 같다. 이들은 나의 미안함을 나의 염치로 봐주었고, 나의 양보로 혹은 나의 배려로 이해해주는 것 같다.
나의 감기가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내가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in할 값을 신중히 고르고 고른다. 어떤 식으로 in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out 된 값이 내게로 오면 in 된 값과 결이 같은 지 유심히 지켜보았고 구분하고 있다. 가끔 오류가 발생했다. 전혀 생각치 못한 값이 나왔을 때 난 당황했다. 난 그 당황을 조금씩 고쳐나갔고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관계를 정리하다 보니, 내 생각보다 나의 in 값에 좌지우지되는 관계가 많다. 관계 맺음의 시작은 늘 나였던 것이다.
내 감기는 비록 지속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백신까지는 아직 마련치 못했지만, 내 온전한 하루를 위한 하루치 약이 있다. 이 약을 먹고, 오늘 자고 싶은 시간에 편안히 잠에 들고, 잠에서 깬 오늘 새벽에 조금 쌀쌀하지만 그에 따라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따뜻한 커피 뒤에는 따뜻한 값을 in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리했다. 오늘은 누구에게 따뜻한 커피를 줄까.
나는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