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동백이 피어나는 밤
꼬박 세 번 만에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처음은 잠든 지 2시간도 채 안 된 새벽 1시 38분, 두 번째는 4시 언저리, 마지막 지금은 5시 23분. 나의 잠을 방해하는 것은 오늘 있을 ‘동백’이의 중성화 수술이다. 중성화를 앞두니, 감히 내가 어떤 생을 책임지겠다 건방을 떨었는지 소름이 끼쳐왔다. 하나의 생명의 생, 그 생과 연결된 인연이 나로 인해 오가고 나로 인해 어쩌면 절단되는 잔인한 짓을 어찌 감당하려고 일을 벌였는가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정말이지 나를 제외한 반려인들은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샤넬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던 그즈음, 나는 또 다른 ‘샤넬’을 길 가다 우연히 만났다. 강아지는 당연히 입양해야 한다는 말에 200% 공감했던 나였다. 여느 때처럼 창 밖에 서서 가만히 보다 가려했는데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문을 열었고, 난생처음 보는 새까만 털 뭉치의 이미 다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푸들 한 마리가 작은 강아지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이름이 ‘샤넬’이었다.
“얘는 키우시는 애인가요?”
분양하고 있다는 말에, 속으로 분양이 안될 것 같은데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언제 봤다고 아는 체인지 참 사람 좋아하네 라는 말 절로 나오게 내 다리 사이를 오가는 ‘샤넬’을 한참 바라보았고, 다시 문을 나왔고, 얼마쯤 지나 다시 문을 열었다.
“제가 데려갈게요”
그렇게 ‘동백’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울고, 매일 같이 자살을 생각하며, 매일 같이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돌려보던 나였기에 당연히 이름이 ‘샤넬’에서 ‘동백’으로, 동백이는 생의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부모님은 특히나 아버지는 ‘개엄마’ 만큼은 죽어도 싫다셨었는데, 이젠 내 감기 소식에 ‘동백’이의 감기 소식을 되물으시곤 한다.
자연스럽게 생기는 모성애는 어디에든 풀게 돼있지.
엄마가 말했다. 나는 그동안 모성애를 꾸준히 키워왔는지 내 예상보다 모두의 예상보다 모성애를 썩 잘 풀어내는 중이다. 동백이는 그렇게 내 생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니, 내가 들여왔다.
동백이는 호기심이 많다. 동물병원 원장님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엔 그냥 밝은 아이들을 보며 하는 말이겠거니 했지만 요즘 많이 느끼는 말이다. 전문가가 괜히 전문가가 아닌 것이다. 무엇이든 보는 족족 제 코에, 입에 넣어보려 하고, 무서움 타면서도 곧잘 새로운 곳에 발을 디뎌본다. 그러다 길가 하수구는 영영 발을 못 디디게 됐지만.. 내가 쓰는 머리끈을 머리에서 벗겨내거나, 글 쓰는 공책을 입에 물거나 볼펜 지우개가 엉망이 되도록 잘근잘근 씹어댔다. (백일잔치를 열어준다면 아마도 볼펜을 집을 것이다.) 이가 가려워서 그런가 종류별 껌을 다 구해다 바쳐도 귀신같이 알고 관심이 없다. 어떤 지인은 육아는 템빨이라며 내 소비욕을, 모성애를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 와중에도 동백이는 식욕은 많은데 제 것에는 없고, 먹어보지 못한 내 음식만 탐을 냈다. 지인은 ‘엄마 것에 관심 많은 나이’라 했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와중에도 ‘엄마 아니고 언니’ 라며 부모님의 바람을 지켜주었다.
동백이는 여느 강아지처럼 옷은 싫어하지만 산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산책 중엔 여느 강아지와 다르게 냄새 맡는 것보다 사람을 제께로 맞이하는 것, 나와 함께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운동이 필요한 내게 매일 규칙적인 운동 시간이 마련되었다.
정적인 내 생에 동백이가 활기를 가져다준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동네 주민분들이 가끔 동백이와 마주하면, 어쩜 이렇게 이쁘게, 착하게 사람을 엄청 좋아하게 잘 키웠다며 칭찬해주시곤 한다. 내가 키웠다고 하기엔 아직 짧은 시간이기도 하고, 동백이가 되려 나를 키우기도 하는 시간들이라 멋쩍긴 해도 기분이 참 좋았다. 멀리 동백이와 콧바람 쐬고 돌아오던 택시 안에서 기사님이 여러 가지 훈련들이 많던데 훈련하고 있냐 물으셨다.
저는 동백이가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면서 저대로 살게 하고 싶어요.
저에게 모든 것을 맞추게 하는 것이 옳은 건가 싶어요
이야기하면서 동백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 최소한의 범위에 중성화 수술이 들어가는지 난 주저했다. 이 수술이 말 그대로 수술이라 이처럼 내 입을 바싹바싹 마르게 하는지, 잠이 덜 깬 동백이의 아직도 보얗고 여린 솜털 같은 등을 하염없이 쓸어주었다. 내 무거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 거리며 가끔 갸우뚱하며 편안히 나를 돌아보는 동백이가 야속해졌다. 모든 부분에서 반려견에게 중성화 선택은 필수라지만, 내가 본능적으로 나온 모성애를 동백이와 만나 풀듯이, 생에 한두 번 찾아오는 본능이자 겪을 수도 있을 시간들의 싹을 내가 도려내는 것이 누구에게 이로운 선택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저대로 살게 하고 싶다며. 말만 번지르르했다고 잠시 자책했다. 내 고민은 동백이와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와 통하는 생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 넓지 않은 인간관계 덕분에 기껏해야 백 정도 되지 않을까 감히 세어본다. 내 생이 그들의 생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그들의 생의 가닥이 바뀐 적도 있었을까. 그 바뀐 길을 내가 축복만 해주고 빠져나와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무얼 할 수 있을까. 내 생 하나도 벅찬데 그들의 생에 남겨긴 내 발자국까지 쫓아가려니 나는 어느새 가랑이 찢어질 모양새가 되었다. 이제 그만 하나에 집중할 때다. 욕심부려서 둘이 되었지만, 무튼 집중할 때가 되었다.
수 백, 수 천 개의 문이 있는 상자 속에서 출구를 찾으려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이 문 열어보고 저 문 열어보게 된다. 문을 열었는데 앞이 막혀 있으면 다시 닫고 나오면 되는데, 급한 마음에 열어둔 채 그곳을 빠져나올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다시 닫으려 돌아가려 해도 도무지 미로와 같은 통로에서 그곳이 이 곳인지 저곳이 이 곳인지 헷갈려 포기했을 때도 많았다. 열려 있는 문은 그 문을 찾아올 이를 위해 남겨두자. 혹여 내 발자취를 따라 걸을 수도 혹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나는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가는 길에 잠시 손 잡고 같이 걷게 될 수많은 인연도 기다려진다. 그리고 수도 없이 문을 열고 닫기 반복하며 간혹 층계가 나온다면 층계를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하면서 어찌 되었건 새로운 문을 열고 닫겠다 다짐해본다.
동백이가 온 뒤로 내 안의 동백이 주변 곳곳에 피어났다. 처음에는 휴대폰 액세서리로, 일기장으로 나중에는 그림으로, SNS로 심지어 동백꽃까지 내 집에 사르르- 피어나고 있다. 이 동백의 향연에서 나는 감히 어떤 기운을 받고 있는가 묵직한 감사가 내 안 가득하다. 오늘도 따스한 동백의 귀를 살- 만져주며 말해준다.
“동백아,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