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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찌네형 Mar 21. 2022

[회사생활백서 #28] 40대에 변한 업무태도

일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만 바꿔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된다.

나는 항상 시간에 쪼들렸다. 정시에 퇴근해보지 못한것은 개인의 능력부족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성격상, 다음 할일이 있는 상태에서 업무를 중단하게 되면, 밤에 잠을 못자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를 생각하는,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회사업무를 어리석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라 자평하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젊은날의 노력에 조금씩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항상 나의 노력과 평판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쌓아올린 나의 평판조차도 언제고 한순간에 원치않는 상황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그로 인해, 내가 받을 고통과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부터, 나는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물론, 사람 본성이야 어디가도 쉬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나는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우리 회사는 기술력이 상당히 뛰어나 업계에서도 꽤나 높은 위치에 있다. 회사가 오랜세월 가지고 온 기술적 라이브러리는 어떤 문제라도 어떻게든 해결하고야 마는 신기한 마법책과도 같아, 주변 회사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어온 지 오래다. 내가 속한 비지니스가 한국에서 태동하던 시절, 우리 회사의 연구소가 작성한 여러편의 논문은 해당업계에서 바이블이 될 정도이다. 하니, 어떤 문제가 있으며, 원재로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슬쩍 우리에게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최근에 우리가 멋진 재료를 제안한적이 있다. 새로운 먹거리가 없이 1~2차 업체의 새로운 개발품만을 바라보던 국내 대기업입장에서 달려드는건 너무도 당연했다. 해서, 우리는 사전에 우리가 접근할 영역과 그렇지 않을 영역을 분명히 했었다.


'죄송하지만, 거긴 저희가 대응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오로지 A제품용도로만 제안을 드립니다. 만약 원치 않으시다면, 저희도 다른 루트를 찾아 제안하겠습니다.'


당돌했지만, 현실이다. 더 이상 성장하는 사업이 아닌 곳이기에, 판매수량도 적으면서 요구하는 품질이 높은 곳은 상대하기 싫었다. 그러나 그 대기업 입장에서는 오랫만에 세상에 나온 이 멋진 재료를 그냥 두지 않았다.이 부서, 저 부서에서 서로 평가하겠다고 했고, 우리는 항상 난처했다.


그러던 어느날. B제품을 담당하는 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팀장님. 전에 소개주신 그 제품, 저희가 비공식적으로 내부에서만 검토할테니, 샘플을 조금 구할 수 있을까요?'


본래 설정한 영역(아이템)이 아니였지만, 항상 도움을 받아오던 연구원의 요청이었고, 비공식적으로 내부검토만 한다길래, 쉬이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는 작은 사이즈로 샘플을 제출하면서, 꼭 내부용으로만 보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한달 뒤, 이번엔 B제품을 담당하는 사업부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을 종합하니, 연구소에서 해당 제품을 받아, 검토한 후, 이를 사내 프로젝트 기획안에 넣었다는 것이다. 우리와는 상의없이 말이다.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 상당히 난처했다.  몇 번이고 대응이 어렵다고 했지만, 해당 부서의 부서장까지 면담을 하고나서, 암묵적으로 일단 진행만 하는 선에서 정리를 했다. 해당일로 나는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낸 무책임한 팀장으로, 그리고 불필요한 업무를 해야하는 상황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 B제품을 담당하는 사업부와 연구소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우리에게 여러가지 데이터와 샘플, 문제에 대한 대응을 요구해왔다. 항상 '상황이 이렇게 되서 미안하다'라는 설명이 있었지만, 설명설명일 ,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나는 그들의 밥벌이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같으면, 이렇게  이상, 본사를 설득하고 해결방안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요청하는 수준은 높아졌고, 이제는 어떤 문제에 대해,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지 레포트를 작성해 내라는 요청을 받고나서 생각을 바꿨다. 나는 오랜 고민끝에  부서에 정식을 메일을 보냈다.


[해당 불량은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당사의 제품이 원인이라기 보다는 귀사의 구조상의 결함으로 보입니다. 다만 어떤 물질이 영향을 주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선여부를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업계에게 이렇게 메일을 보낸다는건,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안하겠습니다] 같다. 나는  젊은 날에 이렇게 메일을 보낸적이 없다. 본사를 끝까지 잡고 물고 늘어져서 어떤식으로라도 대답을 들었었다. 그로 인해 좋은 평가도 받았지만, 한쪽에서는 많은 적들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지난주 금요일, 퇴근전에 이렇게 메일을 보내놓고, 나는 불편한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이면  전화가 올텐데 어떻게 대응할까, 그냥 정석처럼 대응할까, 아님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마음이 편치 않지만, 이제 더는  몸을 갈아 넣어가면서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진 않다. 그러기엔, 나도 조금씩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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