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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지 May 25. 2023

책으로 나를 채우다.

나를 채우는 문장들

사진: Unsplash의Fang-Wei Lin


기억에 관한 어떤 내용의 에세이라면 금방 써 내려갈 줄 알았던 주제. 하지만, 그 뒤에 붙은 단서. - 나를 만든 기억들. 나를 만든 기억들에서 생각이 가로막혀버렸다. 기억들을 떠올리기에 앞서 '나'의 정의가 더 우선되어야 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기억들이 나를 만들고 있을까? 주위를 둘러본다. 눈앞에도, 옆에도, 등 뒤에도 보이는 책들. 어느새 책장을 넘어 바닥까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는 책들이 눈에 보인다. 다이어리를 살핀다. 24시간 하루, 무엇이 나를 채우며 살고 있을까? 자고 일하고, 아이들을 보고, 책 읽고, 글을 쓰고, 작가들의 강의를 듣거나 책 관련된 모임으로 빼곡하다. 책 읽는 나, 언제부터 나는 책들에 둘러 싸인 삶을 살고 있었나.



최근 저녁에 아이들 수업하는 일을 시작했다. 저녁 시간에 참여하고 싶은 각종 책 모임들이 못내 아쉬운 요즘, 마침 수업 없는 화요일에 출판사 북클럽에서 여는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을 했다. 아이들의 저녁을 미리 챙기고, 씻기고 나와 지하철을 타서 책을 들고 읽는 평일 저녁이라니. 가뜩이나 일하기 시작하면서 책 읽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져 목말랐던 책과 나만의 시간.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었다. 이번 모임은 생텍쥐페리의 문장들을 엮은 동제목의 신간 출간 기념으로 열린, 얼마 전 읽은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도 번역하신 신유진 작가님의 북토크였다.

<생텍쥐페리의 문장들> 북토크, 마음산책홀

파란 표지와 생텍쥐페리가 직접 그린 그림이 예쁘게 새겨진 기분 좋은 책이다. 생텍쥐페리의 전 생애에 이르러 쓴 책들의 문장들이 여러 테마로 나누어져 있는, 인생의 사막에서 의미를 발견한다.라는 책의 부제가 생각하게 한다. 책의 서문에 생텍쥐페리가 어머니에게 보낸 하루에 관한 편지 내용 글이 나온다.


어머니, 제가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함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문을 열고 모자를 던지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끝나버린 하루가 느껴져서 그런 것이니까요.
<생텍쥐페리의 문장들> 신유진, 마음산책 2023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끝나버린 하루, 그 허무함. 문장을 읽자마자 알 것 같은 그런 하루. 고독과 책이 만난 순간에 책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라고 작가님이 말했다. 책과 하나가 된 순간. 책이 내게로 들어온 순간. 책으로 위로받고 엉엉 울었던 순간.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경험하게 하고, 책으로 이끌어준 한 책이 있다.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인스타그램 친구였던 별숲의 책 소개 피드에서 보고,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정여울 작가님 책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커피를 타고 책상에 앉았다. 나는 서문을 읽고 오래도록 펑펑 울어버렸다.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나와 닮은 상처를 지닌 사람이 있구나 하는 동질감,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따스한 위로를 글로 건넨 이 책은 서문만으로도 나의 인생 책이 되어버렸고, 문학과 심리학으로의 세계로 이끈 책이 되었다. 나의 상처와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준 책. 부족한 지금 내 모습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없는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노력해야 하는 나를 괜찮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며 토닥토닥 등 두드리며 꼭 안아준 책. 책 읽는 시간은 내가 나를 입양한 시간이 되었다. 저기 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어린 나를 보게 하고, 꼭 안아줄 수 있었다.



얘야, 너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완벽해. 창문 틈으로 비치는 햇살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봐. 네 앞에 놓인 모든 가능성들을 믿어봐. 너는 결코 부족하지 않아. 너는 결코 주눅 들 필요가 없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걱정으로 네 삶을 가득 채우지 말아. 걱정의 눈물로 얼룩진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단다. 내가 살아 보니 정말 그런 걸.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처럼 항상 걱정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함께 매일 밥을 먹는 사람, 추석에 보름달을 함께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니까. 너는 눈부시다. 너는 아름답다. 너는 그걸 알아야 해. 네 마음속에 깊은 사랑이 살아 있듯이. 너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깊은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 민음사, 2017



그리고 책과 보내는 시간들이 지금 내 주위에 책들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 나를 만들고 있다. 책 읽는 나, 공감하는 나, 새롭게 알게 된 나, 이해와 용서를 시작한 나, 쓰고 싶은 행복한 꿈을 꾸게 된 나. 나를 따스하게 안아준 정여울 작가님의 책처럼 나의 위로가 다른 이에게도 포근히 전달되는 글이 되길 바란다. 그렇게 책으로 나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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