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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연 Jul 13. 2022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관하여

사촌 동생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작은 고모의 둘째 딸. 오랫동안 해외 생활을 한 아이라 나와는 살면서 크게 볼 일이 없었던 동생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할 상황이어서 아침에 간단하게 축하 문자만 보냈다. 그 대신 문자 한 통에라도 진심을 담아 보내고 싶은 마음에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나름대로는 꽤 공을 들였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문득 고모 생각이 났다. 이번에 결혼하는 사촌 동생의 엄마, 나의 작은 고모.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모와의 추억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22살 무렵 독일의 고모 집에 놀러 갔을 때이다. 당시 나는 영국에 교환학생으로 있었다. 방학을 맞아 유럽 일주를 계획한 나는 마지막 2주 정도를 고모네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유럽을 여행하다가 만난 친구 두 명과 같이 고모네 집으로 갔다. 지금 내가 그때의 고모와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오래된 친구도 아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과 친척 집을 방문한다는 게, 그것도 거기서 기약 없이 며칠씩이나 묵는다는 게 얼마나 무례하고 황당한 일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다. 어쨌거나, 고모는 처음에는 환대해 주셨지만 이튿날인가 그다음 날인가에는 나를 조용히 불러서, 나는 조카니까 얼마든지 있어도 상관없지만 더 이상 그 친구들까지 먹여주고 재워줄 수는 없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는 곧바로 빠빠이... 위로 딸 둘에 당시 3살 정도 되는 늦둥이 아들까지 있었던 고모는 종일 집안일과 아이들 라이딩과 픽업에 바빴다. 그 중간중간 나와 간단히 관광을 하거나 시내 쇼핑을 다녔던 기억이 난다. 외국 나와서 계속 기숙사 밥만 먹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틈틈이 맛있는 한국 음식도 많이 해주셨다. 고모가 내 생일을 맞아 사주셨던 에스프리 브랜드의 연핑크 목도리와 모자 세트는 고모 집을 떠난 이후 남은 유럽 여행 일정에서 아주 요긴하게 썼다. 고모부에게 기념일 선물로 받은 오메가 시계를 자랑하셨던 것도, 아이 셋을 낳고 보니 몸매는 안 변해도 똥배는 어쩔 수 없더라며 하하 웃으셨던 것도 생각난다. 주말에는 고모네 가족과 하이델베르크로 당일치기 여행도 다녀왔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해 먹으라며 헤어질 때는 팩에 든 두부도 여행 가방에 여러 개 싸주셨다.


어찌 보면 전부 다 별것도 아닌 일상이었는데 왜 그렇게 사소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첫째 사촌 동생이 프랑크푸르트역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독일어로 통역을 해주었던 것, 동생 방에서 며칠 같이 자면서 나누었던 나름의 깊은 대화들, 둘째의 뒤통수가 너무 예쁘다며 감탄했던 일, 독일에서 태어난 막내가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고 국제유치원에서는 영어를 쓰는 바람에 뭔지도 모르고 3개 국어를 한꺼번에 하고 있다는 것, 교육열이 남달랐던 고모가 나와 같이 왔던 그 친구들에게 대뜸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어보셔서 내가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 고모 집에 도착한 뒤 첫 끼로 국수를 먹었던 일, 집에서 5분쯤 걸어 나가면 시내로 나가는 트램역이 있었던 것, 심지어 집안의 구조와 각 방의 모습들까지... 외국에서는 사실상 모든 것이 새롭고 또 늘 긴장 속에 지내다 보니, 정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까지 모조리 기억 속에 남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오래 살았던 터라 고모가 결혼하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을 때라 전혀 기억에 없고, 고모와 함께 한 나의 가장 큰 기억은 독일에서의 그 며칠이다. 그 며칠을 한 집에서 보낸 것을 계기로 확실히 나는 고모를 한층 더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고모와의 두 번째 기억은 지금의 남편과 한창 연애 중이던 시절, 아마도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때였던 것 같다. 앞뒤 상황은 잘 생각나지 않고, 남편 차의 조수석에서 고모와 전화 통화를 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고모에게 남편을 보여주고 싶다고, 그리고 고모도 오랜만에 너무 보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당시 항암치료 중이던 고모는 지금의 아름답지 않은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서 나의 방문을 극구 사양했다. 내가 꽤 간절히 얘기했는데도 고모는 너무나도 완강해서, 나는 전화통을 붙들고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그런데 그게 결국 마지막 통화였다.  고모의 임종 직전에 병원에 방문했을 때 고모는 더 이상 내가 아는 고모가 아니었다. 바싹 마른 몸으로,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의 반쪽이 되어 누워있는 고모를 보고는 나는 겁이 나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당시 30대 초반이었는데도 조부모님이 모두 살아계신 상태여서, 고모는 나와 가까운 사람 중에 처음으로 돌아가신 분이었다. 그랬던 만큼 나의 충격과 슬픔은 너무 컸다. 장례식의 풍경도, 화장터의 모습도, 왜 이렇게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차례로 돌아가신 조부모님들께 죄송할 정도로, 나의 기억 속에는 오로지 고모의 마지막만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사촌 동생의 결혼식 날인데 나는 왠지 계속 고모 생각이 나서 벌써 몇 번이나 울컥했다. 자식 사랑이 끔찍했던 고모였기에 하늘 어딘가에서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고 계실 것 같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사촌 동생들과 함께 나의 고모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싶다. 언제가 되어야 고모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 않을 수 있을지, 과연 울지 않을 날이 오기나 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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