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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Apr 08. 2020

상대를 잘못 골랐다

혐오로는 인류를 구할 수 없다2

두렵다는 외피로 우리가 포장해온 것은 대부분 혐오일 가능성이 높다. 

조금만 합리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대상은 내가 두려워하는만큼 나에게 위해가 되지 않는다. 난민수용논란이 불거졌을때 예멘난민이 마치 범죄자집단처럼 그려졌지만, 그들 중 전과기록이 있다거나 실제 범죄로 이어질만한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증명하지 않았다. 국내체류 외국인노동자도 마찬가지다. 외국인노동자들의 범죄율이 높을거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조금만 불법행위를 해도 본국으로 쫓겨나기때문에, 자신의 생계를 위협할 불법행위를 더욱 조심하게 된다. 실제로 중범죄는 한국에서 나고자란 내국인들에 의해 더 많이(비율적으로도) 발생한다. 우리의 두려움은 실제보다 훨씬 과장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는셈이다. 그럼에도 우린 중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노동자를, 전과도 없고 숫자도 몇 안되는 예멘 난민을 두렵다는 이유로 혐오한다. 그런데 왜 우리의 혐오는 그들을 향할까?



혐오의 시선은 아래를 향한다

‘혐오 과잉시대’, 도처에 혐오가 넘쳐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혐오는 권력관계를 타고 흘러 사회적 약자에게 향한다. 권력관계를 타고 흐르는 혐오는 약자의 삶을 위협하고 권리를 빼앗고, 차별을 공고화한다.

[창간 기획-혐오를 넘어](2) 강자 아닌 약자 향해..거꾸로 흐르는 분노 의 내용처럼 사실 혐오는 약자를 향한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우린 다수 혹은 부자, 정치인 등 권력자를 혐오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재벌들이 불법행위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고해서 그 옆집에 살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내 옆집에 외국인노동자가 산다고하면 꺼림칙해한다. 또한 정치인들을 아무리 욕해도 그 앞에서 악수를 마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홈리스가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면 당장 눈살을 찌푸릴 것이다. 왜 그럴까? 



모든 두려움은 정당한가?

 <혐오, 선을 넘다>에선 마사 누수바움이라는 미국의 법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룬다. 

누스바움은 ‘원초적 혐오’와 ‘투사적 혐오’를 구분한다. 배설물, 혈액, 생리혈, 정액, 콧물, 시체, 진액, 썩은 고기, 구더기, 바퀴벌레 등을 보거나 만질 때, 실제 감염 위험이 있을 때 나오는 직관적 반응이 원초적 혐오다. 우리는 이 문장에서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거나 몇 단어를 건너뛴다. 이런 직관적 반응을 특정 집단에 투사한다고 생각해보자. 동성애자, 흑인, 여성, 유대인 등 특정 집단이 이런 오염원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덮어씌우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유대인이 독특하고 불쾌한 냄새를 뿜어내고, 그것이 생리 중인 여성의 냄새와 유사하다고 널리 믿었다. “지하철 타는 놈들 특유의 냄새”의 19세기 유럽 버전이다. 이게 투사적 혐오다.
누스바움은 원초적 혐오는 어느 정도 법이 보호해주어야 할 감정이지만, 투사적 혐오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가 동성애자를 보면 구토감이 일 정도로 혐오 감정이 치솟는다고 해서, 그가 ‘동성애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안전을 침해받지 않으려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건 보호받아야할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원초적인 혐오에 어떠한 대상을 등치시키는 투사적혐오다. 유대인과 생리혈이 같은 개념이라거나 같은 위험을 내포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같은 두려움 내지 공포를 투사하여 기피하고 비인격화했다. 어떠한 관련성도 개연성도 없으면서 말이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러한 등식을 사람들은 카더라 내지 가짜뉴스로 성립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등식은 누군가의 말처럼 '논리가 없어서 반박할 수도 없다'. 그런 비논리적인 일들이 왜 일어날까?


소수자 집단을 차별하고 고립시켜 정치적 지지를 모으는 것은 오래된 정치적 수법입니다. 그 원형이 나치죠. 
어떤 정당이 어떤 긍정적인 지향점을 제시하며 지지세력을 규합하기는 쉽지 않죠. 반면 소수자를 고립시키는 발언으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기 쉽다고 판단한 거죠. 

소수집단을 구체적인 '적'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강고히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외부에 적이 있을 때 우린 더 쉽게 결집되며(일본이라는 적으로 한국인들이 결집되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대상의 비인격화를 통해 더 쉽게 적대시할 수 있다(오래전 북한 사람을 괴물로 표현한 만화영화를 떠올리면 알 수 있다). 대상이 소수 혹은 약자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두려움의 대상이 '만만하니까' 그런 것일테다. 두렵지만 만만하다는 모순적인 논리속에서 혐오가 비집고 나온다.

유대인학살을 지휘했던 히틀러

이렇듯 우리의 두려움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구체적인 정책이나 행동양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냥 싫어할 뿐이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과 행동을 완전히 분리해서 통제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우린 두려움이라는 내적 감정을 혐오의 모습으로 구체화해서 행위할 수 밖에 없다. 행위는 누군가 대상이 있고, 그 대상자는 그 행위로 인해 불쾌함 혹은 모욕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걸 우린 '피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려움은 이유도 없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두려움은 더이상 정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의 감정까지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럼 우리는 이런 혐오문제들을 어떻게 접근해야할까.

아래는  [커버스토리 - 알·쓸·人·잡]매일 밀림에서 사자와 맞닥뜨린다면?…그게 혐오의 공포죠 에서 김승섭, 홍성수 교수의 대담 중 일부다. 

홍= 차별이나 혐오표현의 핵심은 결국엔 소수자 집단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만들어서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그 나머지가 그에 따른 이익을 얻는 거거든요. 여기에 저항하는 운동은 그것과 거꾸로 가야 해요. 고립 대상이 차별받는 소수자가 아니라 오히려 차별하고 혐오표현을 말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거죠. 그게 반차별운동, 반혐오표현 운동의 핵심이라고 봐요.
김 =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그 말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누가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를 말했을 때 ‘어디 나가서 그런 소리 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한마디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후진 걸로 만드는 거죠."
홍= 형성적 규제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반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교육과 홍보를 통해 인식을 제고하고, 소수자 집단에 대한 각종 지원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이러한 형성적 규제는 궁극적으로 혐오표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시민사회 역량을 강화하는 역할도 해요.


숙명여대 사건으로 돌아가서, 비여성(편의상 원천적,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성별을 비여성으로 칭하겠다)에 대한 두려움의 감정에 이렇게 다가가보자. 

"여성들만의 공간을 벗어나서, 어디서라도 여성은 안전해야 한다. 아니 누구라도, 어디서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어디서라도 안전한 사회라면, 일부의 학생과 급진적 페미니즘 단체들은 단 한명의 트랜스젠더 여성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려움을 해소할 방법은 명확하다.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줘! 추상적인 적 보다는 구체적인 적과 싸우는 게 쉽다. 하지만 쉬운 싸움이 옳은 싸움은 아니다. 오히려 본질은 가려지고 근본적은 문제해결은 요원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배척하는 행위는 누군가를 위험하게 하는 것이고, 누군가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라도 위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말 나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맞서야 한다. 혐오를 혐오로 답할 것이 아니라, 반혐오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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