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이른 귀가가 신이나 벼르고 벼르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간밤에 쏟아져내린 비 덕에 바람이 맑고 선선했고, 기대도 않게 피어있는 벚꽃이 간판 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지하철 역 하나의 거리를 걸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길을 지도도 안 보고 넋이 나가 걷다보니, 익숙한 고시원 간판이 보였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몇 년 전 내가 한 달간 묵었던 고시원이었다. 기억력도 되게 안 좋으면서 싫은 기억들은 잘도 끌어안고 산다.
그 해 봄,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선배에게 꾼 30만원으로 거처를 찾아다녔다. 사람이 사는 곳이 맞나 싶은 고시원들을 전전하다 겨우 알바하던 곳 바로 앞 고시원을 얻었는데, 그 마저도 불만스러워 한 달 뒤에 다시 찾아낸 곳이었다.
고시원에 처음 갔을때 표정을 잃은 총무는 높낮이 없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고시원을 소개해줬다. 얼마나 살거냐, 창문 있는 방으로 할거냐, 불필요한 말은 1음절도 없었다. 나에겐 (값이 더 나가는) 창문 있는 방을 선택할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돈이 없어 복도방을 선택한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짐짓 당당한 제스쳐를 해댔었다. 돈이 없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니 그런 얕은 수를 모를리 없을테고, 물론 그 마저도 한참 무뎌져 신경도 안 썼을테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식으로 위장을 하며 버텼었다.
아침마다 소란피우는 앞 방 아저씨를 피하느라 알바에 늦어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고, 처음 들어갈 땐 모조라더니 막상 입사하니 진짜 털이라고 자랑하는 만지기도 소름돋는 코요테의 모피를 빗질했고, 학생총회 준비가 한창인 학교를 페북으로나 보며 한심한 처지를 한탄했었다.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고 억울했다. 자존감이 원체도 없지만, 더 무너질 수도 없겠다싶을만큼 매일이 우울하고 끔찍했다.
그때가 봄이 아니었다면, 오가는 거리에 듬성듬성 꽃이 피고 연녹의 잎들이 나무사이를 비집고 나오지 않았다면 난 어땠을까. 말라비틀어진 도림천 옆을 지날때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바람이 불어주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뎠을까.
다행히 벼랑 끝에 내몰렸던 두 달은 봄이었다. 아무런 희망 없이도, 낙관하지 않아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나싶게 만드는, 봄이었다. 봄은 3월부터지만 계절의 시작이라고 하는 건 이런 이유인 것 같다. 이유도 없이, 그냥 살아낼 용기를 준다. 얘도 피고 쟤도 피는데 나라고 못 필게 뭐냐.
물론 꽃이 진다고 덩달아 질 필요는 없다. 꽃이 진 자리를 그리다보면 또 금세 봄은 오기 마련이니까. 봄이 주는 용기를 잘 캐다가 1년, 다시 또 1년, 그러면서 사는거지. 계절이 돌고 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여전히 집 앞에는 꽃도 피고 나무도 울창해지는 중이다. 거기다 하늘은 또 왜 이렇게 맑은지. 한강이고 여의도고 어디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이런 날씨에 집에 있는 사람은 바보였을텐데! 지금은 집에 있는 사람이 참된 어른이라나 뭐라나 ㅎ 분명 흘려보내기 아까운 날들이라 아쉬운대로 유채꽃축제를 위해 준비된 꽃을 집으로 배달받아 꽂아뒀다(유채꽃축제를 보내드립니다). 봄향기가 물씬 느껴져서 그나마 위안이다. 햇살 한 줌, 바람 한 모금이라도 더 쬐고 더 마시고 싶은 날들이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지만, 모두가 조금씩 아쉬워하며 이렇게 발길을 가둔다. 모두의 봄이 아쉽게 지나가지만, 그렇게 서로를 위한 온기를 채워가는 중이다.
창 밖의 벚꽃으로, 출퇴근길의 소소한 가로수로 봄 기운 충전하며 이 봄 또한 잘 견뎌내보기를. 코로나19의 봄이 지나고 계절이 돌고 돌아 내년 오늘 우린 또 봄일테니까. 어김 없이 봄은 온다. 생각해보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봄이 온다는 게 얼마나 멋진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