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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un 03. 2020

엄마의 떡볶이

오늘처럼 힘든 날이면 엄마의 떡볶이가 생각난다

#1 

8살무렵, IMF의 여파로 엄마아빠가 같이 하던 공장이 부도가 났다. 그전에도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래도 볕드는 반지하집에 살았다면 이젠 볕조차 들지 않는 곰팡이 핀 반지하로 이사를 가야했다. 

엄마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헐값에 전에 살던 집 앞 문방구를 넘겨받아 운영했다. 문방구가 정말 집 바로 앞에 있어서 이사가기 전엔 등교하다 엄마에게 잡혀 돈바구니를 들고 있기도 했다. 친구들이 지나가며 문방구집 딸이라고 하는 게 왜그리 창피한지, 한 번은 돈바구니를 들고있던 자리에 그대로 두고 가서 아이들이 돈을 다 집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 덕에 나는 이사를 가고 전학을 가는게 좋았다. 집은 물론 더 안 좋아졌지만, 내가 문방구집 딸이라는 건 이제 모를테니까. 다만, 나의 일은 좀 더 번거로워졌다. 엄마는 불량식품을 떼다 팔기도 했지만, 떡볶이를 팔아서도 이문을 남겼다. 매일 엄마의 등보다 큰 냄비에 가득 떡볶이를 끓여가서는 문방구에서 같이 팔았다. 그러다 장사가 잘 되는 날이면 집에 있는 우리에게 전화를 했다. "떡 좀 떼어와".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 귀찮기도 하고, 누가 또 날 볼까 전전긍긍했지만 난 반항심 넘치는 효녀로서, 싫다고 실컷 징징대고는 떡을 떼어가곤 했다. 왜 곱게 안했을까, 후회가 들지만, 그때 나는 고작 9살이었으니까. 천하장사가 쓰여진 시장통의 밀가루 떡을 사다 고사리 손으로 덩이 덩이 찢어서 가져가면, 엄마는 양념과 물을 붓고 또 한가득 떡볶이를 끓였다. 물론 나는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고, 밀떡배달이 완수되면 홀랑 집으로 왔다. 

그러다 날이 저물면 엄마는 등 보다 큰 냄비를 구루마에 싣고 덜컹 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냄비에는 다 식은데다 눌러붙기까지해서 빨갛다못해 검게 변해버린 떡 몇 가닥이 붙어있었다. 다 식은 그 찌끄러기가 왜 그렇게도 짭짤하고 맛있던지. 우리 자매들은 엄마가 오면 얼른 냄비를 받아들고 손으로 떡을 떼어 먹었다. 우리가 다 떼어먹고나면 엄마는 냄비를 설거지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짊어지고 문방구로 갔다.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눌러붙은 떡볶이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2

그때 엄마는 배가 솔찬히 나온 임산부였다. 무려 여섯번째, 아니 일곱번째 임신을 했던 때였다.(첫 아이는 유산했다.) 그래도 엄마는 다섯이나 되는 주둥이들을 어떻게든 채워주려 매일 같이 문방구로, 일 끝나면 부도난 공장으로 나섰다. 

그해 가을, 학교가 끝나고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엄마는 문방구에 가지 않았는지 집에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더니, 커다란 냄비에 떡볶이를 끓였다. 

"엄마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이거 먹고 있어."

엄마의 떡볶이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으니, 우리 자매들은 떡볶이에만 눈이 팔려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지도 않았다. 엄마가 떡볶이를 끓여두고 제발로 걸어간 곳은 집 앞 산부인과였다. 다음날 아침에서야 아빠 손에 이끌려 조리원에 갔는데, 엄마는 그자리에서 짐을 꾸려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몸을 풀고 나서 최소 2주는 산후 조리를 한다는 걸. 또래의 친구들이 슬슬 엄마가 되니 알게 되는거지만, 임신과 출산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고, 출산 이후에도 제대로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몸 여기저기 망가지기 쉽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집에 짐을 두고 곧장 문방구로 갔다. 엄마가 아들을 낳았다면, 하루라도 더 병원 신세를 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딸 낳은 죄인이라, 몸 져 누워있을 틈도 없었다. 


#3

그 아이가 태어나고 2년이 지난 무렵, 엄마는 문방구 임대료도 더이상 충당하기 어려워 노점을 시작했다. 물론 갓난 아이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일하려던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즈음 닭꼬치 노점을 시작했다. 노점은 집 바로 앞 사거리, 시장입구에 있었다. 우리는 하교와 함께 엄마에게 아이를 받아 집으로 데려가 돌봐야했다. 물론 그무렵에도 나는 왜 우리집만 이렇게 아이가 많은건지, 엄마는 왜 노점까지 해야하는지 부끄러워 숨어다녔다. 

그러던 주말이었고, 집에 사람이 많았다. 막내는 다른 동생들이 보고 있었고, 나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가는 길이었다. 엄마의 노점을 지나는데, 엄마가 나를 잡고 다섯살 배기 다섯째를 돌보라고 한다. 친구랑 약속있어!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서, 결국은 허탕을 친 그날, 친구를 기다리던 그때, 하필 그때였다. 

다섯살배기 동생은 혼자 시장통을 전전하다 떡볶이집에 눈이 팔려 크고 또렷한 눈망울로 하염없이 튀김들을 바라봤다. 안쓰러웠는지 가게 사장님은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범벅해서 종이컵에 담아 쥐어주었다. 고 작은 게 종이컵을 들고 분식점을 나설때, 하필 1톤 트럭이 후진을 했나보다. 아이는 많은 피를 흘리다 응급실에 갔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진 못했다. 엄마는 그후로도 한참을 김말이튀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재료비가 싸고 우리가 좋아하는 떡볶이는 자주 해줬다. 엄마가 해준 떡볶이는 너무 맛있어서 신나서 받아먹었는데, 그걸 해주는 엄마의 심정은 한 번도 헤아려보지 못했다. 엄마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4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갔다. 한 번은 일주일내내 학교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집에 못 들어가던 적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는 금요일, 저녁쯤 되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겨를이 없어 못 받고 뒤늦게 다시 걸었다. 

"엄마 전화했었어?"

"밥은 먹고 다니냐.. 집 보다 거기가 더 좋냐? 엄마 안 보고싶어? 언제 올거야?" 

"밤 늦게나 들어갈 것 같은데."

 "일찍오면 떡볶이 해주려고 했지.."

엄마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에 목이 메인다. 갈비도, 스테이크도 아니고, 다른 대단한 게 아니고 떡볶이라니. 사채까지 끌어다 쓴 가난한 엄마라, 천원에 5개 거저주는 떨이 채소들을 얻어다 곰팡이핀 부분을 반 넘게 잘라내는 엄마라, 비싸고 좋은 음식은 못해준다. 사실 구경도 못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 대신 고추장을 뜨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설탕으로 맛을 더하고, 눌러붙지 않게 틈틈히 저어가며 뭉근하게 끓여낸 떡볶이를 먹여주고 싶었다. 하루 세끼도 떡볶이로 먹을 수 있다며 신나서 먹던 나를 아는 우리 엄마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떡볶이가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었으리라. 엄마가 젓고 불리던 떡볶이는, 어디서도 비슷한 맛을 찾아볼 수 없던 그 떡볶이는, 다름 아닌 엄마의 사랑이었다.


#5

떡볶이를 흔히들 소울푸드(영혼의 음식)라고 한다. 나에겐 정말이지 소울푸드다. 내 모든 아프고 따뜻한 기억들이 떡볶이에 가득하다. 요즘은 어딜가도 떡볶이집 한군데는 있고, 휴대전화 앱으로 터치만 몇 번 하면 집까지 배달도 해준다. 떡볶이집 앞에서 입맛 다시던 날들도 있었지만, 용케 지금은 딸자식들 다 제앞가림하는 덕에 배달 떡볶이 정도 시켜먹는 건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힘든 날이면, 엄마의 뭉근한 떡볶이가 먹고 싶어 전화를 건다. 

"엄마가 해준 떡볶이 먹고싶네~"

"와, 해줄게. 그거 뭐 어렵다고." 

바빠서 가지 못하는 날들이 더 많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사랑을 이렇게나마 확인하곤 한다. 언제라도 떡볶이를 끓여줄 수 사람이 아직은 내 곁에 있다는 것,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오래오래, 엄마에게 떡볶이 해달라 조르는 철 없는 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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