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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이자 하녀



여자는 우상이자 하녀이며, 생명의 원천이자 암흑의 위력이다. 진리의 기본적 침묵인가 하면, 기교이기도 하고 수다이기도 하며 거짓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이자 마녀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의 먹이이자 남자의 실추이며, 남자가 아닌 모든 것이자 남자가 갖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이며, 남자의 부정否定이자 남자의 존재 이유다. (227쪽)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그레이스』의 이 대목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쪽) 


어떤 존재가 우상이며 하녀일 수 있을까. 어떻게 천사이면서 동시에 마녀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존재가 이렇게 양면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인 남성에게 여성은 ‘타자’ 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성에게는 남성이 ‘타자’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조건이다. 출생 직후 (아기) 인간은 자신을 실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의 처음과 끝이 어디까지인지 알지 못한다. (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자신을 구체적인 하나의 개체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 주 양육자인 어머니는 최초의 ‘외부’이며, 남자아이와 똑같이 여자아이도 이 외부를 욕망한다. 어머니와의 원치 않은 분리, 혹은 분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비로소 인간은 ‘나’ 이외의 세계를 인지한다. 먼저는 가족 구성원, 그다음은 친척, 친구, 또래 집단.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인간은 ‘나’를 구체화한다. 외부세계의 인식을 통해 서서히 인간은 나와 구별되는 세계와 그 세계 속의 ‘타인’을 인지하게 되는데, 이런 판단의 근거는 ‘차이’다. 


서구 문명이 동양을 ‘발견’했을 때, 서구인들은 동양인들을 ‘자연적, 동물적, 감정적’이라고 평가했고, 동양을 거울삼아 자신을 ‘과학적, 인간적, 이상적’이라고 규정했다. 발레리 케네디는 『오리엔탈리즘과 에드워드 사이드』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익숙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경멸감과 처음 본 여성에 대한 두려움과 즐거움 속의 남성들의 짜릿함 사이에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타자성이 동양 속에 체화되어 있다면, 남성의 경우 타자성이란 여성 안에 체화되어 있다. (110쪽)  



즉, 남성의 경우 타자성은 ‘여성’ 안에 체화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경우 타자성은 ‘남성’ 안에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페니스 없음을 경멸했다면, 여성은 남성의 페니스 있음을 풍자해야 한다. 남성이 여성의 월경을 혐오한다면, 여성은 남성의 무월경을 ‘비정상으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두 방향의 가치 판단 중 남성의 사고와 판단만이 강화되었다. 


역사 이래로 남성은 항상 ‘주체’였고, 여성은 ‘타자’였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졌고 이는 점점 더 고정화되었다. 결국에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 왜. 왜 그런 것이냐. 농업혁명 이래로 지금까지 남자들은 어떻게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가. 여성들은 왜 신화의 시대에나 만들어졌을 법한 관념의 지배를 아직도 받고 있는가. 남성이 ‘인간’인데 반해 왜 여성은 여전히 ‘여성’인가.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거다 러너는 수렵 채집 생활 중에 ‘간단하고 일시적’이었던 성별 분업이 고정화됨으로써 현재 남녀 사이의 ‘차별’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당시로써는 순전히 ‘기능적’인 이유(여성이 자궁을 가졌으니 출산을 하고, 여성이 유방을 가졌으니 수유를 한다는)에서 시작되었던 성별 분업이 결국 남녀 본성의 ‘차이’로까지 고정화되었다 (여성에게 모성은 본성이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육아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투쟁』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여성 자유의 훼손과 섹슈얼리티의 왜곡이 자본주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본다. 



여성에게서 몸을 빼앗고, 여성의 몸을 노동력 재생산 기계로 변형시킨 일은 5세기 전 자본주의가 태동할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노동력은 가장 귀한 상품이 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왜곡된 채 타인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강요받았다. 산파들이 다른 여성들과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늘 손에 쥐고 있던 부인과 지식이 마녀들의 화형대에서 파괴당하고, 한창 발달하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가족에게 필요한 여성의 본보기가 만들어졌다. 고립되고, 성적으로 억압받으며,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고, 자식을 낳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며, 섹슈얼리티 및 출산과 관련된 지식이나 의사 결정권을 전혀 가지지 못한 여성 모형이 구축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가는 여성에게서 몸을 빼앗는 살인 행위를 함과 동시에, 여성에게서 지식을 강탈하여 노동력 재생산을 장악한다. 국가와 교회의 지배 아래 있던 의료업계는 중간에서 이를 도왔다. (285쪽)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모성 신화와 여자다움에 대한 요구, 섹슈얼리티에 대한 편견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혹은 사랑한다고 믿는 사람)과의 가장 내밀한 순간마저 남성 연대의 즐거움을 위해 ‘공유’되는 현실,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는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노동, 직장에서조차 요구받는 감정 노동, 평생을 옭아매는 돌봄 노동, 그리고 ‘여자라면 어떠해야 한다’라는 또는 ‘여자니까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모든 제약이 여전히 여성의 삶을 강제한다.   


대안을 찾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작은 여성이 어떻게 규정되어 왔는지, 지난 역사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회, 정치, 신화,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와 여성 역할이나 이미지를 역사, 사회학, 철학, 인류학, 생물학, 정신분석학을 동원해 탐구했다”. (알라딘 책소개) 이 한 권으로 족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한 권이면 시작으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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