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의 이야기 #5
'어쨌든 나는 갈 수 있는 데까지 나카타 상을 따라가자. 직장 따위 알 게 뭐야!' 하고 호시노 청년은 마음을 정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中
언젠가의 명절 연휴, 집으로 내려가던 길에 동네 어귀의 오토바이 총판 대리점 앞에 서 있는 고등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학생들은 한 대의 새 오토바이를 중앙에 두고 둘러서 있었는데, 그 중 한 학생은 계약서인지 설명서인지 손에 든 종이를 집중해 주의 깊게 읽고 있었다. 오토바이 구입이란 아마도 그 나이대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탈행동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들의 모습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그런 일탈을 행할 수 있다는 용기에 대한 부러움이.
아직 쌀쌀하기만 한 2월부터 시작한 항암치료 스케줄이 마무리 되어가던 6월, 우리 가족에게는 사건이라면 사건이 하나 있었다. 갑작스런 뇌수술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입원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으며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그때까지도 수술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등장한 뇌수술이란 단어는, 우리 입장에서는 난데없기만 한 일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다음 단계인 방사선치료로 들어가기 전, 앞으로 방사선치료를 담당하게 된 방사선종양학과의 교수님께서 내 뇌종양이 어떤 종류의 종양인지 알기 위한 수술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혈액검사나 요추천자를 통한 뇌척수액 채취 등의 검사로 내게 발병한 뇌종양이 뇌 내 생식세포종양인 것으로 판단된다 알고 있었는데, 방사선치료를 맡은 선생님께서는 무슨무슨 종양으로 판단되는 것을 넘어 종양의 ‘정확한’ 종류를 알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다른 목적에서가 아니라 다만 효과적인 방사선치료를 위해서. 그리고 그 방법으로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두개골 속 뇌에 발병한 종양을 떼어내 확인하는 수술을 제안한 것이다. 어쩌면 MRI촬영을 통해 살펴본, 그간의 항암치료를 통한 종양의 크기가 별반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약물을 통한 항암치료, 그리고 이어질 방사선치료로 치료가 종료될 것으로만 알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뇌수술을 위한 마음의 준비란, 그야말로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의사선생님께서는 그렇다고 수술을 강제할 수는 없으니 나와 부모님에게 수술을 할지 하지 않을지 선택을 맡긴다고 말씀하셨다. 선택에 주어진 시간은 2~3일 정도로 길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수술 여부에 대한 부모님의 의견은 극구 반대였다. 뇌종양의 종류를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고 종양의 샘플 채취를 통한 검사는 아니었어도 몇 차례의 검사 끝에 생식세포종양이라는 결과가 나왔는데 왜 그런 수술까지 필요하냐는 말씀이었다. 만약 병이 난 위치가 신체의 다른 곳이었다면 아마 부모님도 그렇게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수술의 위치가 다름 아닌 두개골 속 뇌였으므로 그랬던 것일 테다. 자기 자식의 뇌라는 신체부위에 칼을 댄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부모가 과연 존재할까?
진단 전, 병인 줄도 모르고 이상해진 내 상태에 걱정과 고민을 계속하다 그것이 뇌종양이라는 병 때문임을 알고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던 우리 가족. 치료만 마치면 내가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란 강한 희망을 갖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나에게 앞으로 더는 없을 줄로만 알았던 깊은 고민의 시간이 다시금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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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하나를 꼽아 보라 한다면 아무래도 ‘당신이 경험한 가장 큰 일탈은 어떤 것이었나요?’ 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일상적인 일은 아니지만 종종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들로부터 그런 비슷한 질문을 받곤 했는데, 그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평소에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깊은 숙고에 돌입하게 된다. 내가 경험해 본 ‘가장 큰 일탈행동’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내가 해 보았던 일탈 행동은 무엇이었나에 관한 고찰을 시작하는 것이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착실한 모범생이었다고는 양심상 말 못하겠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에 충실히 잘 따르는 학생이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겁이 많아서(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해도 된다고 명시된 일이거나 남들도 다들 하는 것들만 겨우 따라 하는 그런 아이였다. 또한 욕설을 금기하다시피 했던 집안 분위기 탓에 다른 아이들은 간투사나 부사쯤으로 여기고 사용하던 욕설마저도 가급적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언제나 내가 세운 계획 하에서만 하루하루를 살아 나갈 수 있는 사람인데(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답답하게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의 나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타의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정해진 생활의 계획에서 벗어나는, 그리고 사회적 시선에서 질서와 평안을 유지하는 데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탈’이라 할 행동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지금과 같은 성인으로 자라나 버린 것이다.
제대 후 복학해 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 축제 기간이었나 강의를 들었던 국문과 권보드래 교수님과 수강한 학생 몇 명이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다. 다들 술기운으로 어느 정도 달아올랐을 무렵,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바로 그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이 해 봤던 가장 큰 일탈은 무엇이었나요?’ 교수님의 질문에 역시나 우물쭈물 대고만 있던 와중, 한 여학생이 먼저 나서 질문에 대답했다. 갓 새로 사귄 남자친구와 깜깜한 한밤중에 이화여대에서 학교까지 걸어 온 적 있다고. 그게 자신이 해 본 큰 일탈이었다고. 나보다 한참이나 나이 어린 것으로 보이는 그 여학생은 붉은 빛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은 뭐랄까, 이화여대에서 학교까지 충분히 걸어올 수 있을 만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학생의 대답을 들은 교수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도 실망이었지 싶다. 가장 큰 일탈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겨우 나온 그 정도의 대답으로는. 그러나 나는 그녀가 꺼낸 대답에 깜짝 놀랐다. 이화여대가 있는 신촌에서 우리 학교가 있는 안암동까지 기껏해야 걸어서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인데, 그걸 걷는 게 뭐 그리 대단하길래 깜짝 놀란 거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거리를 걸었다는 데서 놀랐던 것이 아니라 이화여대에서 학교까지 걷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놀랐던 것이었다. 나라면 아마 한밤중이 아닌 밝기만 한 한낮이었더라도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 못했을 텐데. 아니, 버스가 끊겼으면 택시를 타면 되지 왜 걸어? 갓 새로 생긴 남자친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가능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그녀의 대답에, 내가 서울에서의 삶을 시작한 후 가장 많이 걸어본 것이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나를 생각해 보았다. 역시 있으나 마나 한 결과가 떠오르던 그 순간, 내게 찾아온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분명히 정해진 기준 안에서만 살아가던, 그리고 그 기준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 나에 대한 부끄러움. 어린 시절에는 그렇다 쳐도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무런 용기를 내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만 살아 온, 나라는 시시하기만 한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이.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건 내가 착하다거나 혹은 올바른 마음을 가진 청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소심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오토바이 가게 앞의 고등학생들로부터 느꼈던 부러움과 붉은 빛깔 머리카락을 가진 여학생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결국 같은 것일 테다. 한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이기만 한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날 이후, 교수님의 질문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 있어 하나의 과제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본 가장 큰 일탈행동은 어떤 것이었나요?”
우리 가족에게 수술의 선택권이 쥐어진 그날 밤, 불 꺼진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내게 문득 교수님의 그 질문이 떠올랐다. 삶의 무거운 과제와도 같은 그 질문이. 다음 날 아침, 나는 엄마에게 수술을 받겠다 말했다. 걱정에 한사코 만류하던 엄마였지만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뇌수술이라는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할 커다란 경험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껏 한 번도 해 볼 용기를 내지 못했던 커다란 일탈을 해 보기로 말이다. 그것이 작은 인간이기만 한 나에게 찾아온 성장의 기회라고,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 뇌수술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