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의 이야기 #4
‘네 글은’ 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을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내가 얻을 수 있었던 행복이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친구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런 문장을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한 것은, 나에게 있어 큰 행운이었다.
- 다이어리의 기록 中
정말이지 철없기만 하던 어린 시절엔 팔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학교에 오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깁스한 팔을 걸친 팔걸이를 목에 두르고 오거나 또는 목발을 짚은 채 깁스한 다리를 끌고 오는 친구들. 그런 친구가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학급 아이들의 관심은 한순간에 그 아이에게로 쏠리기 마련이었거든. 그리고 골절상을 입은 아이의 하얀색 석고 깁스 위에 반 아이들이 적어주던 위로의 문장들. ‘○○아 빨리 나아서 같이 축구하자’ ‘많이 아프지? 그래도 금방 나을 거야’ ‘어서 나아라 ○○아!’ 하나같이 시시하기만 한 아이들의 그런 문장들이, 바꿔 말해 그렇게 받을 수 있는 친구들의 관심이 나는 어찌나 부러웠는지.
그런 관심에의 욕구를 가슴에 품고 지내던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어느 날, 체육시간에 축구를 하다 공을 밟고 하늘로 붕- 떴다 떨어져 왼팔목 뼈에 금이 가버렸지 뭐야. 욱신거리는 팔목을 부여잡고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던 길에서 나는 아픈 팔에 대한 걱정보다 팔에 하게 될 깁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던 것 같아.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금이 갔다는 진단을 받고는 ‘나도 드디어 깁스를 하는구나’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의사선생님이 들고 오는 건 흰색의 석고 찰흙이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초록색의 플라스틱이지 뭐야. 의사선생님은 새로 나온 유리섬유 재질의 깁스용 붕대라며 가볍고 때도 안탄다고 말씀하셨는데 가벼운 건 둘째 치고 ‘이런 방충망 같은 플라스틱 붕대에는 글씨 쓰기 불편할 텐데’ 하는 걱정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어.
다음 날, 팔에 깁스를 하고 교실에 들어선 나에게 친구들의 관심은 얼마간 찾아왔지만(‘너 깁스했구나?’ ‘팔에 금갔다면서?’ ‘공 밟고 넘어질 때 그럴 것 같더라’) 검정 매직으로도 글씨가 쉽게 적히지 않고 적힌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초록색 유리섬유 깁스에는, 반 친구들의 위로 문구가 석고깁스에 남긴 그것들보다 한참이나 부족할 따름이었어.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일들이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어찌나 서운하기만 했는지.
입 안에서 조용히 녹아내린 사탕처럼 내 곁에 머무르던 친구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던, 병의 증세가 완연했던 시기의 나날들. 그런데 나는 내 곁으로부터 떠나간 친구들을 단 한 번도 탓한 적 없어. 정말이야.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버린 건 전부 내 탓이었으니까. 텅 빈 멍한 눈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자아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정물(靜物)처럼, 단지 존재만 하고 있던 그 시기의 나. 그런 내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가 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거야. ‘친구’ 라는 이름으로 관계 맺어진 사람들은, 다시 말해 그만큼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있잖아, 지금이야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때 나는 무척 외로웠었어. 오롯이 혼자가 되어버렸던 내가 느꼈던 고립감과 그로부터 비롯된 깊고 깊은 외로움. 그런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나를 떠나간 친구들을 향해 손을 뻗을 엄두를 낼 수 없었어. 내 상태가 무너져버리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고 따라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멀어져 가는 친구들에게 손을 뻗을 힘이, 과거처럼 친구들을 대할 정신적인 힘이 내게는 없었던 거야.
그렇게 나와 친구라 불리던 이들과의 관계는 소멸되어 버렸어.
한참의 시간을 혼자서 허우적대다 뇌종양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고 그간의 정상적이지 않았던 내 상태가 뇌종양이라는 병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 후, 내게서 사라진 것은 자책감과 부담감이었어. 끝없이 몰려오던 피곤함이 몸관리를 제대로 못한 내 탓이라고만 생각하던 자책감과 망가져버린 정신 상태를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부담감. 뇌종양 진단을 받고 나니까 나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던 그런 것들이 툭- 하고 끊어지더니 사라져 버리더라. 그렇게 자책감과 부담감이 사라진 자리에 용기가 피어났어. 친구들에게 신호를 보낼 용기가, 여기 내가 있다고 반짝이는 신호를 보낼 용기가 말이야.
‘내가 하나도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던 건 내 탓이 아니었어. 뇌종양이라는 병 때문이었어. 그걸 이해해 줘. 그러니 나를 다시 찾아줘. 내게 다시 돌아와 줘.’
다시금 용기가 생긴 나는 몇몇의 친구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 뭐라고 적어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과 지금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은 메시지에 적어서 보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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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병원을 찾아와 준 것은 뜻밖에도 고등학교 친구들이었어.
병실 침대에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기척에 깨어났는데 내 눈 앞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가득 채우고 있길래 깜짝 놀랬지 뭐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던 친구들이었어. 고등학교 친구들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문자를 보냈던 학생회장 명구(아마 다른 아이들에게는 명구가 연락을 돌렸을 거야), 키가 큰 딸부잣집 막내아들 용욱이, 언제나 밝은 종황이, 진지하고 어른 같은 경택이, 기숙사 동기이자 고향 친구이기도 한 현진이 그리고 기숙사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인호까지. 녀석들은 투명한 비닐로 덮인 과일바구니를 들고 문병을 와 주었어.
한없이 개인적이고 나밖에 모르는 성격이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이 넘는 시간동안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는데, 그런 나를 위해 찾아와 준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문병을 와 준 고등학교 친구들과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한참이나 웃었던 것 같아.
다음으로 문병을 온 건 대학에서 나름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하던 친구들, 돌고래와 꼬지였어. 문병을 와서는 학교에서처럼 별 것 아닌 태도로 그저 신통찮은 이야기들만 엄마와 내 앞에서 늘어놓았지만 걔들이 보여준, 암환자를 대한다는 ‘특별한’ 태도가 아니라 뇌종양이 뭐 대수롭냐는 듯한 그런 자연스러움이 나를 참 마음 편하게 해 주었어. 치료를 마친다면 그들과 다시금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는 점에서 말이야.
돌고래와 꼬지는 두 번 병원에 찾아와 주었어. 한 번은 병실에서 나 그리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고 또 한 번은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며 골방에 틀어박힌 게으름뱅이 친구를 끌고 나가기라도 하듯 병원 앞뜰로 나가 이야기를 나눴어. 으레 해줄 법한 걱정의 인사 따위는 전혀 없는 시원찮은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그런 것이 바로 일상의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뭔가 특별한 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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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낸 문자를 받고 J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려 휘청거리던 시기에 나는 많은 걸 잃었던 것 같아. 20대라는 풋풋한 나이에 몇 년이라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 그리고 내가 잃은 것들 가운데 가장 큰 건 아마도 J라는 친구일 거야.
내가 제대한 후 어쩌면 J는 나와 함께 보낼 시간에 대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때의 나는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었고 나의 그런 상태, 정신적으로 텅 비어버린 내 상태는 J에게 아마도 실망과 상처로 다가갔던 것 같아. 이후 J와의 관계는 마치 따듯한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슬그머니 녹아 흩어져 버렸어.
내 문자를 받고 J는 아마 이제는 별 상관없는 이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생각했지 싶어. 만약 아직까지 나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분명 혼자서 문병을 왔을 테니까. 내 병실을 찾은 J는 혼자서 온 게 아니라 내가 문자를 보내지 않은 다른 한 명과 함께였어. 그렇게 혼자서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병실 문을 들어서는 J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이제 너는 나와 더 이상 친구가 아니구나.’ 함께 왔던 아이 역시 나와 가까운 친구였지만 그날만큼은 그가 그렇게나 밉지 뭐야. ‘왜 J를 따라온 거야. 왜 J를 혼자 보내지 않은 거야. 왜 나를 이렇게 실망하게 만든 거야’
그래도 내가 보낸 문자를 무시하지 않고 병실에 찾아와 준 건 고마운 일이라 생각해. 그날, 어쩌면 J가 혼자 오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들어. 혼자 왔다면 내가 갖고 있던 기대가 언제까지 이어졌을지 모르니까. 이루어질 확률이 희박하기만 한 기대가 말이야. J와의 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던 내게, 그 날 이후 그런 기대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그렇게 J는 내 인생에서 졸업한 존재로 남게 되었어.
문병을 와 준 사람들 가운데에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교 박물관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두 명 있었는데 N누나도 그 중 한 명이었어. 내가 보낸 문자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N누나는 병실을 찾아왔어. 귤 한 봉지를 손에 들고서.
짧은 단발머리에 가방은 항상 백팩, 치마는 안 입고 오직 바지만을 입는 누나는 입고 다니는 모든 바지의 밑단을 한 단 접어 직접 바느질을 해 입곤 했더랬어. 9부바지처럼. 그리고 얼굴에는 아이 같은 순수한 미소가 언제나 한가득이던 N누나. 누나는 내 문병을 세 차롄가 네 차례 와 주었던 것 같아. 퇴원 후 나는 N누나와 얼마간 사귀게 되었는데 왜 나와 사귈 마음이 들었는지 묻는 물음에 누나는 ‘병실에서 본 나와 엄마의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참 좋아보여서’라고 대답해 주었어. 정말 마음 따듯한 고마운 말 아니야?
언젠가 심심풀이로 사주를 보러 갔던 적이 있어. 누구였더라? 친구랑 같이 갔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봤던 사주에서 내 인생은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 인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만나 온 사람들은 다들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
가깝게 지내는 어떤 이에게 내가 “지금껏 제가 만나 온 사람들은 정말로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라고 말했더니 그 사람은 “그건 대훈씨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라고 대답해 주더라. 그런데 아마 반대일 거야. 그이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지금의 내가 좋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내 곁에 있어 주었던 좋은 사람들 덕분이라 생각해.
그런데 말야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받아 온 고마움들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것 같아. 아마도 그래서 하늘은 나에게 큰 병이라는 기회를 준 게 아닐까 싶어. 내 곁에 있어 준 고마웠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 고마움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말이야.
있잖아, 나는 앞으로 내 곁에 있어준 고마운 이들에게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생각이야. 그저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겉으로 드러내서. 정말이야. 약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