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의 이야기 #3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을 이용하는 내가 이제껏 살면서 이발소에 가 봤던 적이 딱 두 번 있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한 번, 그리고 항암치료를 받던 중에 또 한 번. 둘 다 아빠와 함께였다.
첫 번째, 입대 전의 이발소
다니던 대학에 군휴학 서류를 제출하고 서울의 자취방에서 집으로 내려와 오래간만에 엄마가 해 준 집밥을 먹으며 입대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빠가 별다른 맥락도 없이 나더러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말했다. 아빠의 말에 달리 대꾸도 않은 채,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아빠를 따라 운동화를 꾸겨신고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아빠가 평소 어떤 미용실을 이용하는지, 어떤 이발소를 이용하는지 알고 있는 아들이 세상에 있을까? 그만큼이나 아빠와 친한 아들이 과연 존재할까? 뭐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아들이 한둘 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빠가 어디에서 머리를 자르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나 역시 세상의 일반적인 아들들처럼 아빠와 별반 가깝지 않았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다닐 고등학교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결정한 것은 엄마였다. ‘너는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으니 아빠와 떨어져 학교를 다니는 게 좋겠다’는 것이 엄마의 말이었다. 엄마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그 학교의 학생부장 선생님이었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테지만 그보다는 사춘기였던 나와 아빠 사이의 갈등이 분명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독립적인 삶을 조금 일찍 시작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곧장 서울의 학교로 진학해 아빠 엄마 그리고 동생, 이렇게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빠, 아빠, 아빠.
나라고 아빠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의 부모 세대는 요즈음의 부모들처럼 인터넷이나 유튜브, 기타 SNS로부터 자녀를 기르는 방법을 접할 기회가 부족했던 세대였다. 기회뿐만 아니라 시간도 없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들 양육에 온갖 관심을 기울이는 부모가 지금보다는 확실히 적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런 관심의 부족함이란 엄마보다 아빠들에게 더 그랬다.
자녀들에게 감정 표현하는 방법도 모르고 어린 자녀들의 아직 정돈되지 않은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르는 아빠들. 그리고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아빠들. 그런 아빠를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세대 자녀들 가운데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그 중에서 아들들은 더더욱. 그리고 나는 아빠의 첫 아이였으니까. 그러므로 아빠도 아빠는 처음이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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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따라 얼마쯤 걸어 도착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그마한 이발소는 아빠가 평소 다니던 이발소인 것 같았다. 낡은 미닫이문을 밀고 들어가 아빠는 이발사 아저씨와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고는 나를 소개시켜주었다. 큰아들이고 이번에 군대를 가게 됐고 그래서 머리를 자르러 왔다고. 내가 이발의자에 앉자 이발사 아저씨는 전자 바리깡을 들고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손놀림으로 한참이나 길었던 내 머리카락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목덜미와 구레나룻에 면도크림을 바른 뒤 날카로운 면도칼로 슥슥- 깔끔하게 이발을 마무리 지었다. 거울에 비친 까까머리가 된 내 머리는 중학생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아빠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내 이발값을 지불하고 이발사 아저씨와 다시 한 번 별 것 아닌 인사를 나눈 뒤, 나를 데리고 이발소에서 나왔다.
아빠의 입장에서 아들 군입대에 앞서 함께 이발소에 가 사회에서 길었던 머리를 잘라준다는 건 특별하다 할 수도 있을 일이겠지만 그 날의 이발소 방문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일상적이기만 한 느낌의 방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빠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들에게 하는 특별한 감정 표현(그것을 사랑이라고 할까?)의 방법이란 언제나 그렇게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예사롭기만 하다는 투의 행동이기만 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 집만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우리 동네 아이들이 다들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운동화는 한 켤레가 전부였다. 그 한 켤레의 운동화를 매일같이 신고 다니다 때가 타 더러워지면 깨끗이 빨래를 해 말려서는 다시 신고 다니곤 했다. 그러다 밑창이 다 닳거나 더는 못 신게 될 즈음이 되면 새 운동화를 사 신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다른 빨래는 몰라도 나와 내 동생의 운동화 빨래는 오로지 아빠 담당이었다는 것.
더러워진 우리의 운동화가 보이면 아빠는 별 말 없이 화장실로 가지고 들어가 운동화끈을 하나하나 풀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빨래를 시작했다. 속옷이나 일반 옷 빨래야 세탁기에게 맡기면 되지만 운동화 빨래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지만 아빠는 그저 묵묵히 별 것 아니라는 듯 나와 내 동생 운동화의 손빨래를 도맡아 해 주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나와 동생에 대한 아빠의 사랑의 표현이었지 싶다.
그 시절, 아빠가 화장실에서 빨래솔로 거품을 내 나 또는 동생 운동화 외피며 인솔을 닦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내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두 번째, 항암치료 중의 이발소
당연한 이야기일 테지만, 항암치료는 환자의 몸 속 암세포를 없애기 위해 행해지는 치료일 것이다. 하지만 칼을 대 암세포를 직접적으로 떼어내는 수술과는 달리 약물을 통해 이뤄지는 항암치료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온몸의 세포를 싹 새것으로 갈아 엎는 치료란 이야기를 어딘가로 부터 읽은 적이 있다. 과거의 낡은 세포들로부터 새로운 세포들로 싹 리뉴얼. 그 이야기를 읽고는 ‘그렇다면 과거의 내가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연 그것이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하는 생각도.
좋든 나쁘든, 암세포와 함께 온몸의 세포를 새것으로 바꿔내기 위해 이른바 ‘공격’하는 항암치료는 암세포 그리고 신체의 다른 곳과 함께 전신의 모낭(毛囊)세포마저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온몸의 털이 다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겨드랑이 털, 음모는 물론 눈썹, 속눈썹 심지어는 콧속에서 먼지를 튕겨내는 코털까지 전부.
첫 주차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빠진 머리카락이 베개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 항암치료를 받으면 머리가 빠진다더니 이렇게 빠지는 거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베개의 머리카락을 본 아빠는 나에게 또 한 번, 머리를 자르러 가자 하셨다. 이번에는 그래도 더 머리가 빠지기 전에 자르는 게 좋겠다는 맥락을 품고서. 역시나 별 말 없이 아빠를 따라 이발소로 향했다.
따라오는 사람은 생각도 않은 채 한참이나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멀찌감치에서 따라가던 나는 아빠의 등을 바라보며 가만히 한 번 떠올려 보았다. 지금까지 엄마나 동생 없이 아빠와 단 둘이서만, 지금처럼 어딘가로 함께 갔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를.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그 즈음에는 나나 동생의 생일날 저녁이면 엄마 아빠는 우리 동네에 두 곳밖에 없는 레스토랑인 ‘와당’이나 ‘백림 레스토랑’ 둘 중 한 곳에 가서 ‘돈까스’라는 메뉴를 사 주었다. 그렇게 레스토랑에 가서 돈까스를 먹는 날이면 왠지 모르게 나는 긴장을 했던 것 같다. 돈까스라고 해 봐야 도시락 반찬으로 엄마가 싸 주곤 하던, 케첩과 함께하는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미니 돈까스만 알던 나였으니까. 일단 그런 레스토랑은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어두침침하기만 하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우리 네 가족이 앉은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전등이 은은한 빛을 뿜으며 걸려 있기 마련이고, 그 빛은 커다란 꽃잎들이 그려진 테이블보를 덮은 묵직한 테이블유리에 엄마 아빠 나 그리고 동생의 약간 굳어 있는 얼굴을 비추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레스토랑의 배경음악(아마도 클래식이었을 것이다)을 들으며 아빠는 내게 뭐 먹을래? 하고 물었지만 메뉴판에 있는 함박 스테이크라든가 안심 스테이크라든가 하는 다른 음식은 엄두도 못 내는 채 나는 그저 돈까스, 하고 되뇌기만 했을 뿐이었다.
대학 시절,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든 가정은 아이들이 중학생일 무렵이 제일 사정이 어려울 때라고. 아마도 그래서였을까, 생일날 가운데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생일날이 있다. 그 날도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내 생일날이었다. 저녁 즈음, 아빠는 나를 조용히 불러 차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지금 어디에 간다는 이야기도 없이. 그러고는 그렇게 엄마도 집에 두고 동생도 집에 가만히 둔 채 나 혼자만을 조심스레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아무 말 없이 돈까스를 시켜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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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방문한 이발소에서 아빠는 이번에도 이발소 아저씨에게 나에 대한 소개를 했던가? 항암치료중인 아들이 머리가 빠져 머리를 다 밀고자 이발소에 왔다는 이야기를.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런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항암치료를 하며 빠진 머리카락이나 온몸의 털들은 항암치료를 마칠 때까지 다시 자라지 않는다. 털이 빠져 한없이 밋밋해진 머리와 얼굴. 그것들은 암환자임을 표상하는 구체적인 모습일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신의 머리 그리고 신체에 상실감과 무력함을 느끼는 암환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신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고.
이발소에서 바짝 민 머리와 솜털마저도 전부 빠져 매끈해져버린 전신. 그렇게나 매끈하기만 한 내 몸을 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비니(털모자)를 쓰면 가려지는 내 민머리가 별반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랬음에도 한 차례, 민망했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 것도 머리에 걸치지 않은 채로 동네 마트에 갔던 날의 기억이다.
당연히 비니를 쓰고 나온 줄로만 알고 집 근처 마트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계산대에 올려두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친 마트 아저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기상천외한 걸 눈앞에 두고 있는 표정이랄까? 머리카락이 났던 흔적도 없이 매끈하기만 한 민머리와 눈썹도 없어 밋밋하기만 한 얼굴. 그런 머리와 얼굴을 당연하다는 듯 들이밀고 있는 나를 본 마트 아저씨는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저씨의 생각이야 어떻든,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덧붙여 목욕탕에서의 기억 하나
아직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렸음을 인지하지 못하던, 정신적인 상태도 옳지 못하던 어느 날. 이 날도 아빠와 둘이서 목욕탕에 갔었다. 그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들어간 탕에서 몸을 불리곤 먼저 나와 씻는 자리에 앉아 몸을 씻고 있는데, 옆자리의 한 모르는 아저씨가 자신의 등을 때수건으로 밀어 줄 수 없겠냐고 말을 걸어 왔다. 자신의 등을 밀어주면 내 등도 밀어주겠다는 의미로. 아저씨 입장에서는 내가 목욕탕에 혼자 온 줄 알고 물었던 것일 테고 아빠라는 동행이 있는 나로서는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던 당시의 나는 아무런 상황 판단도 못 한 채 아저씨의 말을 따랐다. 잠시 후 탕에서 나와 생면부지인 남자의 등을 밀고 있는 나를 본 아빠의 표정. 웃는 것도 그렇다고 찡그린 것도 아닌 당황한 아빠의 그 표정이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아마도 그날이 아니었을까? 아빠가 엄마에게 내가 뭔가 이상해졌다고 말했던 날이. 아빠의 말을 들은 엄마가 괜히 화를 내며 아니라고 부정하곤 동생 방으로 들어가 동생에게 네가 봐도 형이 이상해진 것 같은지 물었던 날이. 그리고 동생의 그런 것 같다는 대답에 침대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는 바로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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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들은 씁쓸한 기억이 밝은 그것들보다 아무래도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건 그 모든 기억들이 이제는 전부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들이라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