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의 이야기 #1
나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나와 동생 중 한 명이라도 딸이었다면 엄마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마도 세상 모든 아들이 그런 것처럼, 나는 엄마에게 감정 표현이 서툰 큰아들이었다. 어쩌면 다른 아들들보다 더 그랬을지도 모르는데, 중학교 졸업 후 가족 품을 떠나 3년간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했었으니 말이다. 태어나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중학교 시절엔 그저 친구가 전부고, 가족의 사랑을 알 만한 고등학생 땐 집을 떠나 있었으니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가까워질 시간이 어디 있었을까. 게다가 대학도 집에서 먼 서울의 학교로 진학해 혼자만의 삶을 꾸려나갔으니 더더욱. 돌이켜보면 나는 엄마에게 미안할 만큼이나 무뚝뚝하기만 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와 꽤 친해졌다. 누군가 나에게 ‘엄마와 친하신가요?’하고 묻는다면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엄마와 함께했던 병원에서의 생활 덕분이다. 환자와 간병인으로서 엄마와 함께 지냈던 약 6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 말이다.
MRI촬영 후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좌뇌에 종양이 보인다는 진단을 받곤 부랴부랴 짐을 꾸려 서울대학교병원 암병동에 입원했다. 급하게 결정된 입원이었던 터라 병실에 여유가 없어 처음 배정받은 병실은 2인실이었다. 간병인으로 엄마와 함께 입실한 병실에는 나보다 먼저 들어와 치료를 받고 있던 아저씨가 한 분 계셨다. 림프종(혈액암의 일종)을 앓고 있다던 아저씨는 내 또래 나이쯤으로 보이는 따님이 간병인으로 함께였는데, 말씀하시는 아저씨의 목소리나 얼굴의 혈색을 봐도 암 환자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건강해 보이기만 하는 아저씨였을 뿐. 겉모습으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로 신체 건강한 청년이었을 것이다. 살집 통통한 그 나이대 보통의 청년. 입원한 병실에서는 병원 특유의 냄새가 났다.
어렸을 때부터 별 탈 없이 자랐던 덕에 큰 병으로든 작은 병으로든 그렇게 여러 날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병객으로서 병원을 찾은 적은 몇 차례 있었어도 환자로서의 병원 생활은 첫 경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앞으로 지낼 병원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걱정보다 오히려 설렘으로 다가왔다.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에 대한 두근대는 기대감과 아주 약간의 불안감. 서울대학교병원이라는 대형 병원의 병실에서 느낌 내 첫 감상은 그랬다. 아마 엄마도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든 생각은, 문병 차 방문했던 병원과 환자로서 입원한 병원이라는 공간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사실이었다.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문병을 갔을 땐 오직 보러 간 사람(입원한 환자)만이 내가 관심을 줄 대상이었다면, 환자 본인이 되어 입원한 병실에는 신경쓰고 관심가져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같은 병실의 아저씨 역시 관심을 갖고 함께해야 할 대상 중의 하나였다.
들어선 병실에서 달리 할 것도 없이 침대에 앉아 옆 침대의 아저씨 그리고 따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를 담당하는 혈액종양내과 의사선생님께서 검진을 오셨다. 뇌종양의 발병 위치를 한 번 더 이야기해 주시고(좌뇌의 기저핵 부근에 종양이 발생해 있습니다) 내 뇌의 뇌종양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뇌종양인지 알기 위해 뇌척수액 검사를 진행할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뇌척수액 검사란 몸 속에서 뇌와 척수를 순환하는 뇌척수액을 척추에 바늘을 삽입해 채취하는 검사로, 내가 있는 입원실의 침대 위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검사라 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젊은 의사가 병실을 찾아와 검사를 수행했다.
‘요추천자(腰椎穿刺)’라는 낯설기만 한 이름의 검사방식으로 진행된 검사의 구체적인 과정은 이랬다. 우선 침대에서 몸을 돌려 옆으로 눕는다. 그리고 마치 새우처럼 머리와 무릎이 닿도록 충분히 다리와 몸을 구부린다. 구부려 튀어나온 척추 가운데 엉덩이뼈 위쪽 요추에 긴 바늘을 찔러 넣는다. 이어지는 의사선생님의 말씀.
“환자분, 숨을 흡- 흡- 하고 등 뒤쪽으로 밀어내듯이 호흡해 주세요.”
그러고는 내 척추에 찔러 넣어진 바늘로부터 ‘쭈욱-’ 하고 뇌척수액은 뽑혀 나왔을 것이다. 척추에 들어온 바늘은 아프다기보단 약간 시큰한 느낌이었다.
검사를 통해 판단된 내가 걸린 뇌종양의 종류는 ‘뇌 내 생식세포종양(Intracranial germinoma)’이라는 종양이라 했다. 이 종양은 정자나 난자를 만드는 생식세포가 내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뇌로 잘못 이동해 종양으로 자라난 것이며, 10대에서 20대 젊은 청년들에게서 많이 진단되는 종양이라 한다. 병에 걸렸던, 딱 내 나이 즈음이다. 생식세포종양이 뇌의 다른 부분이 아니고 기저핵 부위에 발생하는 것은 드문 일인데, 이 부위에 발생 시 나타나는 증상으로는 ‘극심한 졸림’이 대표적이었다. 이것 역시도 내가 겼은 증상과 동일하다. 의학적으로 악성 뇌종양으로 분류되지만 다른 악성 뇌종양에 비해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에 따른 반응이 좋아 완치율이 높은 종양이라는 사실은 최근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솔직히 그런 건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 생존율이나 완치율, 치료 예후 등은 그저 부차적이기만 한 문제일 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그간 지겹도록 겪어 왔던 나의 지독한 졸림 증세가 완치될 거라는 희망만을 갖고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던 것이다. 치료는 당연할 거라는 거라는 무조건적인 희망을 품고서.
종양의 정확한 종류가 판단된 뒤부터 본격적인 항암치료는 시작되었다. 본격적이라고 적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수로울 건 없었다. 수액걸이(링거대)에 걸린 항암제와 몇 종류의 수액을 내 왼팔 팔오금에 바늘로 꽂고 그저 가만히 누워있으면 그만이었다. 걸이에 걸린 여러 개의 주머니로부터 한 방울 한 방울씩 느긋하게 떨어지는 약방울은 꼭 내 마음을 비추는 것 같았다. 지난날의 벗어날 수 없이 밀려오던 잠에 대한 두려움과 그로 인해 캄캄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오로지 치료의 기대감만으로 가득한 여유로운 내 마음.
2인실에서 시작된 항암치료는 4인실로, 4인실에서 6인실로 병실을 옮기며 계속됐다. 그렇게 병원에서 보내던 시간 동안 나는 엄마와 정말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아빠 젊었던 시절 연애하던 이야기, 신혼 때부터 10년 동안 할머니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이야기, 태어난 나와 동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 내 대학생활 이야기 등등. 병실 침대와 바로 곁의 간병인 침대, 그렇게나 엄마와 가까이에서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눈 건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6개월 간 바로 곁에서 함께 대화하고 함께 생활하는 동안 엄마와 나는 언제나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다른 복잡한 생각들은 저 멀리 치워둔 채, 아무런 걱정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입원실에서의 어느 날, 가만히 다가온 엄마는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대훈아, 그런데 병실 사람들 다 암환자들인데 우리가 너무 웃는다고 흉볼 것 같아.”
그런 걱정이 들었을 만큼이나 엄마와 함께했던 병원 생활은 지금까지도 행복하기만 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2인실이든 6인실이든, 병원에서 보내던 생활은 불편함이라곤 전혀 없었다. 샤워도 병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답답하다 싶으면 수액걸이를 끌고 넓은 병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지하로 연결된 연결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병원 내부의 다양한 검사실도 지나치며 볼 수 있었고 환자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여러 시설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린이병원은 참 볼거리가 많았다. 나이어린 환자들을 위해 병원 내부 벽면에 그려둔 여러 캐릭터들과 달이나 별 같은 색색깔의 문양들, 휴게실에 놓여 있던 장난감들과 동화책들도 이 곳이 다른 곳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 때로는 간호사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암병동 건물 밖으로 나가 병원 부지 내에 있는 의학박물관에 구경을 가기도 했다. 병동 밖 나들이는 엄마와 함께였는데, 마치 데이트라도 하듯 오른팔로 작은 체구의 엄마를 포옥 안고서였다. 뭐 왼팔로는 수액걸이를 끌고 있긴 했지만. 참, 그러고보니 엄마를 그렇게 연인처럼 내 품 가까이 꼭 껴안고 걸었던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지 싶다.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누나들도 모두 다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서 병원 생활에 있어 정말 불평할 만한 것이라곤 없었다. 딱 한 가지, 밥을 전혀 먹을 수 없었다는 것 빼고는.
대학 시절, 운동권과 가까웠던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단식시위를 하는 현장에서 식사시간이면 가장 많이 들려오는 소리가 구토하는 소리라고.
사람이 밥을 먹지 않고 이틀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후각이 굉장히 예민해져서 멀리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다가온 후각적인 자극은 텅 비어있는 내장을 자극해 구역질을 유발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텅 빈 헛된 구역질을.
항암제가 투여되는 몸도 단식시위를 하는 시위대와 비슷하다. 몸으로 들어간 항암제는 뇌와 장을 자극해 체내의 여러 물질을 분비시키고, 그런 물질들은 신경과 결합하면서 오심과 구토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내 몸으로 항암제가 투여되기 시작하자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냄새에 대한 자극에 극도로 민감해져 밥 냄새나 기름 냄새같은 음식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식사시간이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배식 카트의 냄새를 내 코는 어떻게 알아챘는지 곧바로 구역질이 밀려왔다. 그럴 때면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구토를 하곤 했는데 처음에는 먹었던 음식들이 입밖으로 토해져 나오다 워낙 구토를 많이 하니 나중에는 나올 게 없어 십이지장에서 역류한 담즙이 나왔다. 담즙의 색깔이 예쁜 샛노란 색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 항구토제를 처방받았음에도 구토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식사시간이 다가오면 진작에 수액걸이를 끌고 멀리 있는 휴게장소로 도망쳐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나에게 배정된 식사는 대신 엄마가 먹었다. 팔뚝에는 주렁주렁 링거를 꽂은 채,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잖은가, 엄마는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밥때만 되면 구토를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당시 과체중이었던 내가 살을 뺄 기회라고 여겨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사실 밥을 먹지 못해도 포도당 등 수액으로 영양분은 공급되고 있었으니 건강에도 특별히 문제될 건 없었다. 항암치료 시 젊은 사람들이 나이든 어르신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라 한다. 젊은이들은 그래도 체력이 나이든 이들보다 나아 음식을 못 먹어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는 것. 물 외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포카리스웨트와 몇 종류의 과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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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개월간의 항암치료라 했지만, 여섯 달 내내 치료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서 이주일간 병원에 입원해 항암제를 투여하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 이후 2~3주 동안 치료받느라 밥을 못 먹어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고(돌아간 집에서도 남아있는 약기운 탓에 일주일 정도는 밥을 먹지 못한다), 그렇게 보충된 체력으로 다시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고 또 퇴원해 체력 보충하고….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이것의 반복이었다.
암에 걸려 치료를 받는 환자들 가운데에는 치료기간 동안 심리적 스트레스와 신체적 피로가 겹쳐져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였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보다 훨씬 더 밝아졌고 말이 많아졌으며 웃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전까지 내향적이고 살갑지 못했던 내 성격도 상당 부분 외향적으로변했고 또 훨씬 더 많이 밝아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전부 함께했던 엄마 덕분이다.
병원에서 보낸 반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내 인생에 있어 그 이전까지 엄마와 이야기 나눴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야기 나누었다. 뇌종양은 그렇게 엄마와 아들이라는 나 사이에 어쩌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거리감을 없애주었던 것이다. 과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나와 동생, 둘 중에 한 명이라도 딸이었다면 엄마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내가 만약 딸이었다면 같은 성(性)으로서의 공감과 동질감으로 엄마와 조금 더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뇌종양 치료를 받으며 엄마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나는, 지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엄마와 친하신가요? 저는 꽤 친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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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꾹질에는 딸기를
병원 생활 중에 밥을 전혀 먹을 수 없었다는 것 외에는 불평할 만한 점이라곤 없다고 했지만, 사실 불편했던 것이 딱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바로 계속되는 딸꾹질이었다. 약물 치료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이유 모를 딸꾹질이 이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은, 나 말고도 많은 항암 치료 환자들이 딸국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환자들에게 발생하는 딸국질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항암제와 함께 투여되는 항구토제가 딸꾹질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암제가 뇌 또는 중추신경계를 자극해 뇌가 몸에게 보내는 '일정하게 호흡할 것'이란 신호가 흐트러지는 것 역시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에게 딸꾹질은 흔한 치료의 반응이었다.
내게도 찾아온 딸꾹질 반응을 멈추기 위해 엄마와 나는 이 방법도 써 보고 저 방법도 사용해 보다가 확실한 비법 한 가지를 알아냈는데 그건 바로 딸기다.
반복되는 딸꾹질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던 엄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울대학교병원 1층(지금은 지하1층으로 바뀌었지 싶다)에 있던 매점에서 딸기 한 팩을 사들고 올라왔다. 엄마가 사 온 딸기를 나는 목구멍에 간신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만큼, 두어 번 정도만 씹고는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삼켰는데 그렇게 반 팩 정도의 딸기를 씹어넘기다 보면 딸꾹질은 어느새 멈춰버리는 게 아닌가. 이것 역시도 병원 생활로부터 얻은 하나의 생활 포인트라면 포인트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