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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수면클리닉과 서울대학교병원

진단 전의 이야기 #6

by 이대


병식(病識)이 불가능한 사람이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하는 걸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큰 계기가 필요하다. 하나의 폭탄과도 같은, 자신의 사고를 뒤엎어 버릴 만한 커다란 계기가. 나에게 있어 그것은 대학에서의 중간고사 시험이었다.




병식의 결여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볼까? 정신적인 병에 걸린 사람이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는 대개 네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하나, 무엇보다도 뇌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병을 인식하는 건 뇌의 기능인데, 뇌가 병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는 기능도 함께 약화되는 것이다.


둘, 신체적인 병과 달리 눈에 보이는 증상이 없기 때문에. 보통 정신질환은 서서히 진행되고 피곤함이나 무기력함처럼 누구나 일상적으로 겪을 수 있는 증상과 겹친다. 따라서 환자 스스로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기 때문이야’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셋, 사회적 낙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 뇌에 문제가 생겼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를 인정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방어기제로 작동해 병이 아니라고 부정하게 된다.


넷, 자아와 병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에. 감기나 상처처럼 ‘나에게 외부의 문제가 온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문제’라고 느껴져 병의 인정은 곧 자기 부정으로 이어진다. 결국 자존심과 자아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병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 사람들은 주변의 설득에도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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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을 앓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진료를 극심히 거부하는 나를 보다 못한 아빠는 답답한 마음에 굿을 했다고 한다. 이상해진 아들을 어떻게든 원상복귀 시켜놓고자 하는 마음에서. 미신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아빠가,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도 아니라 용한 박수무당이 있다는 먼 동네에까지 가서 굿을 했단다. 치병굿이었는지 푸닥거리였는지 300만 원이라는 큰돈을 굿값으로 무당에게 줄 때, 아빠는 얼마나 답답한 마음이었을까 얼마나 절실한 마음이었을까.

굿자리에는 당사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박수무당의 말에 아빠는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도 끝끝내 가기 싫다며 가지 않았다고 한다. 기억에 없는데 엄마의 말에 따르면 그랬단다. 결국 굿자리에는 내 대신 내 사진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렇게 굿판까지 벌였음에도 내 상태는 전혀 나아질 줄을 몰랐다. 귀신에 씌었던 것이 아니라 뇌에 생긴 병 때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려나. 용하다는 무당의 힘은 아무래도 내 뇌까지는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개강이 다가와 다시 서울의 학교로 올라갔지만 괜찮아질 거라 기대했던 나의 수면 폭주는 전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정신적인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로 그렇다고 별다른 도리도 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9월의 시간들. 그런 정신으로 생활한 나날은 내 생에 처음이었고 아마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10월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때 어떤 강의들을 수강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마치 <반지의 제왕>속 나즈굴처럼 혼백이 빠져나간 몸뚱아리로, 그저 캠퍼스를 어슬렁거리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중간고사 기간이 찾아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신기했던 건, 시험공부가 그야말로 ‘1도’ 되지 않는데 불안함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책 한 글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저 이러나저러나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내 마음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텅 빈 머리와 고요한 마음으로 두 과목인가를 이름과 학번만 적은 채, 답안지엔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한 백지를 제출하고 나왔다. 그렇게 시험장에서 나온 그 순간, 뭔가가 머리를 ‘쿵’하고 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뭔가 잘못되긴 잘못된 모양이다’하는 생각이 그제서야 비로소 찾아온 것이다.

곧장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집에서 잠을 이기지 못하던 내 모습을 질리도록 봐 왔던 부모님은 두말없이 휴학 결정을 내려 주셨다. 10월 말, 몇백만 원이었던 계약한 방의 보증금조차도 돌려받지 못한 채 그렇게 나는 집으로 내려왔다.




늦었지만 탈이 났음을 인정한 나를 위해 아빠는 여러 병원의 문을 두드렸다. 처음 찾은 병원은 동네의 작은 병원이었다. 무슨 내과였었나? 아니면 의료원? 어떤 곳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진료의뢰서를 받아 두 번째로 간 병원은 서울 아산병원이었는데 의사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우선 일주일 간 수면시간을 일지에 기재하라는 말씀과 수면 중 움직임 기록을 위한 시계 비슷한 것을 차고 있으라는 말씀을 하셨다. 수면 기록을 먼저 정리한 후에 검사를 진행하자는 이야기였다. 진료실 의자에 앉아 가만히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뭔가, 그런 기록들이 모두 번거롭고 무의미할 것처럼만 느껴졌다. 그런 잡다하기만 한(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검사 말고 더욱 더 직접적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일주일간의 행동들이 귀찮기만 할 거라는 예감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교수님께 도저히 못 하겠다는 말을 꺼냈고, 서울 아산병원에서의 진료는 그렇게 흐지부지 종료되었다.


다음 찾은 병원은 강남의 전문 수면클리닉이었다. 아빠와 함께 서울에 올라가 클리닉의 원장 선생님에게 내 증세를 말했고 당장 그날 밤 수면다원검사(PSG, Polysomnography) 일정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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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하는 일도 없이 오후 시간은 흘러갔다. 검사가 진행될 동안 아빠가 묵을 숙소를 잡고 저녁 무렵 다시 병원을 찾아 기본적인 서류 작성 후 진료실에 딸려 있던, 수면검사실이라 적힌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간 방은 마치 작은 숙소처럼 꾸며져 있었다. 하지만 천장 구석에 매달려 있던 카메라와 벽면에 연결된 모니터, 그리고 침대 옆의 의료기구가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 줬다.


잠자리에 들기 전,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 내 몸에 센서를 붙였다. 머리에는 젤이 발려진 수면단계 파악을 위한 뇌파전극들이 붙었고 눈가 옆에도 전극이 달라붙었다. 가슴에는 심전도 패치가 붙었고 손가락에는 산소포화도 측정기가 끼워졌다. 코와 입 주변엔 호흡을 감지하는 튜브가 걸렸다. 그렇게, 여러 튜브와 센서들이 붙어 있는 내 몸을 보고 있자니 살짝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검사를 받을 날이 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과연 이런 상태로 잠이 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모든 검사 준비가 끝나자 불이 꺼진 어둑어둑한 방에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문득, 옆방의 기록실에서 누군가가 내 뇌파와 심장 박동, 호흡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았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인 피로함은 평소처럼 내 의식을 삼켜버렸고 나는 깊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잠을 자는 동안 내 수면 상황은 기록되었을 것이다. 얕은 잠과 깊은 잠, 꿈의 경계라는 렘수면까지 모두. 무의식 중 들이쉬었다 내쉰 호흡과 잠결의 뒤척임도 전부 숫자와 그래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날 밤,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아침이 밝자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 센서들을 떼어냈다. 간밤에 검사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딱히 실감나지 않았다. 그저 다른 밤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는 느낌밖에는. 그러나 분명 지난 밤 동안 내 수면에 대한 사항들은 낱낱이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묘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들었다. 과연 나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 문제는 고쳐질 수 있는 문제일까?


진료실에서 다시 만난 수면클리닉 원장 선생님은 그러나, 별다른 이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씀하셨다. 수면다원검사의 기록으로는 어떤 이유로 잠이 쏟아지는 것인지 알기 힘들다고.

실망한 모습을 보이는 나와 아빠에게 선생님은 큰 병원에 가서 MRI촬영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을 꺼냈다. 원하는 병원이 있다면 진료의뢰서를 써 주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렇게 제안 받은 몇 군데 대형병원의 이름 가운데에서 나와 아빠는 그나마 귀에 익숙한 서울대학교병원으로의 진료의뢰서를 부탁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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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을 위해 찾았던 여러 병원 중, 마지막으로 방문한 병원은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의 서울대학교병원이었다.


서울대학교병원은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몰리는 상급 종합병원이라서 예약을 하더라도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까지는 최소 몇 개월의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수면클리닉 원장님의 인맥 덕인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뇌의 문제가 의심된다는 진료의뢰서의 문장 때문이었는지 서울대학교병원에서의 MRI촬영은 금방 이루어졌다. 그 해 12월 촬영을 했고 결과 확인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2월로 잡혔다.


아직 한겨울의 추위가 다 물러가지 않은 2월의 어느 날. 그날의 서울 방문은 엄마와 함께였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 혜화역 서울대학교병원 암병동을 찾았다. 방문한 진료실에서 의사선생님은 엄마와 나에게 촬영한 MRI 결과지를 보여줬고 그 결과지에 나타난 내 뇌에는, 엄마와 나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분명하게 검은 부분이 보였다. 의사선생님께서는 그 부분을 짚으며 좌뇌 기저핵 부분에 낭성 종양(囊腫)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좌뇌에 뇌종양이 발병해 있다고.


뇌종양이라는 병은 다른 장기와는 달리 두개골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 뇌에 발생한 종양이기 때문에 주위에 여유가 없어 양성이라 하더라도 위치나 크기에 따라 생명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병이라 한다. 그리고 악성 뇌종양의 경우 평균 생존 기간 2년이 채 안 되는, 현대 의학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질환 중 하나라 한다.


뇌종양 진단을 받은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 병의 낌새가 느껴진 지로부터 2년이 지났고 군대를 제대한 때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가족이 뇌종양 진단을 받는다면, 그것도 아직 살아갈 앞날이 창창하게 남은 20대의 자녀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면 다른 가족들의 반응은 어때야 하는 것이 보편적인 것일까?


고뇌? 체념? 비관? 좌절? 절망?


그런 여러 반응들 가운데에서 우리 엄마가 선택한 것은 ‘희망’이었다. 우리 큰아들이 이상해졌던 이유가 바로 뇌종양이라는 병 때문이었구나. 이제 그 원인을 찾았으니까 뇌종양이라는 병만 치료하면 아들은 다시 괜찮아지겠지? 얼마나 다행이야.


뇌종양 진단에 대한 엄마의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내가 떠올린 것 역시 희망이었다. 치료를 마치면 다시금 과거의 나로, 정상적인 나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렇게 엄마와 내가 품은 희망과 함께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이루어진 약 6개월간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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