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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롭지 않다

진단 전의 이야기 #5

by 이대


예상치 못했던 어느 날의 일이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나를 덮쳐온 것은.


수업을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길을 걸어 미대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흐릿한 가로등의 불빛과 함께, 마치 모퉁이 너머에서 숨죽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하듯 외로움이라는 강렬한 감정이 갑작스레 나를 덮쳤다. 예상치 못한 그 감정의 습격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아래로 향한 내리막길을 앞에 두고 담에 기대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주위에 있는 것이라곤 잎이 다 져버린 커다란 포플러 나무와 흐릿한 초록빛을 발하고 있는 할로겐 가로등, 그리고 미대 건물 옆 한켠에 모여 있는 미대생들의 낡을 대로 낡은 실습작품들 뿐이었다. 그 어두운 공터에서, 어디까지나 나는 혼자였다. 양 옆으로 눈이 치워진 내리막길 아래로부터 나를 향해 바람이 불어 왔다. 그 차가운 바람에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괜스레 흘러나오려는 뜨거운 눈물을 참으며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슬러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방에 도착해 현관문을 잠그고 나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문간에 서서 어째서 갑자기 그런 감정이 나를 찾아온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당혹스럽기만 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천천히 생각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방 안의 어둠속에서 되짚고 있자니 어디로부터 그 감정이 나를 향해 다가왔던 것인지 조금씩 알 수 있게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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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이상스럽게도 일방적인 약속 취소가 이어졌다. 하나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신경한 태도의 약속 취소였다. 내가 어떻게 느낄지에 대해 자신은 전혀 상관할 바 아니라는 태도의 그런 일방적인 약속 취소들.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 날 오후에 날아온 그의 문자 메시지였다. 무려 몇 주 전부터 잡은 약속이었고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던 그 날 저녁의 약속이었는데, 그는 약속 시간을 겨우 몇 시간 앞두고서 문자로 약속 취소를 알려 온 것이었다. 그의 문자에는 어째서 약속을 지킬 수 없는지와 같은 이유나 변명 따위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리고 하다못해 약속 취소에 대한 내 의향에 대한 의례적인 물음조차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통보’였을 뿐이다. 나도 굳이 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에게로부터 온 그 약속 취소 통보 문자를 받고 나서 나는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모호한 감정이 스멀스멀 나에게로 다가왔지만 나는 그 감정이 대체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인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모호한 감정만을 품은 채, 텅 비어버린 듯한 머리로 나는 학교의 남은 강의시간을 버텼다. 수업이 다 끝나고, 단과대 건물로부터 나와 어느새 춥고 또 그만큼 어두워져 버린 길을 걸어 낡은 미술대학 건물 모퉁이를 돌았을 때, 불운하게도 나는 그 모호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달리 그 무엇이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분명한 외로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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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가방을 내려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 당혹스런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일까.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에게라도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 보았지만 이제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 누구도 나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그 누구에게라도 거절의 말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누군가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것임을. 누군가를 만나고 또 만날수록 외로음이라는 이 감정의 손아귀는 점점 더 강하게 나를 옥죄어 오기만 할 것임을.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싱크대에 서서 1인분의 쌀을 씻었다. 벗어두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슈퍼에서 감자와 양파, 당근, 두부 그리고 햄과 토마토 케첩, 생수를 샀다. 계산을 끝낸 물건을 봉지에 넣은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전기밥솥에서는 벌써 밥이 되어 가는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스 불을 켜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야채를 썰었다. 양파를 썰고 감자를 썰고 당근을 썰었다. 된장을 푼 냄비가 끓기 시작했고 나는 썰어 둔 야채와 두부를 냄비에 넣었다. 남은 야채는 사 온 햄과 함께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볶았다. 프라이팬으로부터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밥이 다 되었는지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밥솥의 취사 버튼이 위로 올라왔다. 밥상으로 사용하는 작은 상자에 신문지를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올렸다. 상 가운데에 된장찌개가 담긴 냄비를 올리고 그 옆에는 그릇에 담은 야채볶음을 올렸다. 냉장고에서 엄마가 보내어 준 김치와 밑반찬을 꺼내고 마지막으로 김이 나는 밥공기를 상 위에 올리고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라디오를 켰다.


나는 밥상을 마주하고 방바닥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막 지어져 따듯한 향기를 건네는 밥을 한 수저 떠 입에 넣고 된장찌개도 한 수저 입에 떠 넣었다. 입 안에 담긴 밥을 되도록이면 여러 번 씹으며, 그렇게 나는 천천히 한 수저 한 수저씩 밥그릇을 비워 나갔다. 마지막 한 숟가락의 밥을 넘기고 물을 마셨다. 나는 수저를 상 위에 내려놓고 잠깐 한숨을 아주 작게 내쉬었다.


남은 밑반찬들을 냉장고 안으로 되돌리고 밥상을 치웠다. 침대에 걸터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한 음색의 음악을 얼마간 듣고 나서 라디오와 함께 형광등을 껐다. 나는 침대 속으로 파고들어가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마음 안으로 아주 느리게, 방금 전 밥을 꼭꼭 씹어 넘길 때처럼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으며 되뇌었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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