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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의 일기들

진단 전의 이야기 #3

by 이대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김연수, 『시절일기』 발간 인터뷰 中


자신의 몸과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갖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행복한 일이다. 인생에서 그런 물건을 발견한다는 건 그야말로 커다란 행운이기도 하다.

나는 꽤 오래전부터 메모장 겸 일기장으로 쓰기 위한 수첩을 꾸준히 구입해 왔는데, 매번 고르고 또 골라 봐도 정말 ‘마음에 쏙 든다’하는 수첩은 찾기가 힘들었다. 항상 사게 되는 것은 그저 차선책에 불과한 것이었다. 별로 취향이 까다로운 편도 아닌데 마음에 쏙 드는 수첩을 찾는다는 일이 어째서 그렇게 힘든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뭐 표지가 예뻐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이 질을 따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만 나는 손바닥 만한 크기에, 일주일쯤이면 읽을 소설책 정도의 두께, 넓지도 좁지도 않은 6밀리미터 정도의 줄 간격을 요구할 뿐이다. 물론 속지에 일러스트 같은 건 전혀 없어야 한다. 주별 월별 계획 페이지도 있어서는 안 되며 모눈종이 페이지 역시 있어서는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6밀리미터 줄 간격의 유선 노트로만 성실하게 채워져 있으면 족하다. 아, 그리고 앞 페이지와 뒤 페이지가 똑같이 쓰기 편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작은 사이즈의 수첩들은 뒤 페이지에 무언가를 적기가 불편한 경우가 있는데, 그런 수첩도 마땅찮다. 나는 다만 그 정도의 단순한 수첩을 원할 뿐인데 어째서 문구 회사들은 그런 수첩을 만들지 않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처럼 이해할 수 없는 문구 세계에 대해 회의를 품고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명동의 한 문구점에서 꿈에 그리던 몸과 마음에 쏙 드는 수첩을 발견했다. 사이즈며 두께, 심지어는 줄 간격까지 내가 원하는 딱 그대로에 속지에도 쓸데없는 일러스트 따위는 전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한 유선 노트로만 가득 채워진 수첩을. 게다가 정가운데가 활짝 펼쳐져 뒤 페이지 역시 앞 페이지와 마찬가지로 쓰기 편한 그런 수첩을. 말하자면 그 수첩은 내가 원하는 수첩의 이데아(idea)와도 같은 것이었다.


처음 한 권을 구매해 반년가량 적어나가자 수첩은 거의 가득 찼고 나는 때마침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즈음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둔 친구로부터 입대 선물로 똑같은 수첩을 받게 되었고 복역을 위해 소방서에 배치된 후부터는 그 수첩을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수첩 역시 6개월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득 차버렸다.


세 번째 수첩은 정말이지 여러 노고를 거친 뒤에야 구매할 수 있었다. 제작회사가 망해버려(전화 통화를 통해 망한 사실을 알게 됐다) 오프라인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고 한참 동안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한 온라인 매장에서 그 수첩과 재회할 수 있었다. 재고가 딱 한 권 남아있다던 수첩을 주문했고 그렇게 받아든 수첩을 나는 그저 ‘이데아와도 같은 수첩’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의 상징으로 언제까지나 빈 상태로 남겨두고자 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던 연인의 품으로 다시금 돌아가는 커플들처럼, 나는 결국 완벽한 이상형의 수첩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다 적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의 일이란 쉽사리 예견할 수 없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제껏 입원 한 번 해보지 않았던 내가 뇌종양이라는 병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정말 오랜만에 펼쳐 본 세 번째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군에서의 제대 후 반년이 지난 날짜가 기재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휘청거리기만 하던 무렵이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 시기의 일들이 수첩에는 적혀 있었다. 당시 내가 겪은 일들과 내가 했던 생각들, 병인 줄도 몰랐던 무지와 내 몸에 대한 오해들이 수첩에는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이다.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하나도 남김 없이 잊혀 버렸을 일들이.


작가 김연수가 인터뷰에서 말했듯, 일기를 쓴다는 것은 확실히 인생을 돌이켜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기록된 그 나날들의 일기가 없었더라면 내가 겪은 시간들은 어디에도 남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기록한 그 무렵의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내가 버텨낸 삶과 투병의 흔적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수첩 전반부의 메모들과 일기는 또렷한 글씨체로 적혀 있다. 수첩의 뒤로 갈수록 글씨는 점차 흩어지고 지저분해져 갔다. 병의 증상이 신체에까지 번져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수첩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나조차도 뭐라고 적은 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씨체가 엉망이다. 일기 글씨체의 변화로부터도 내 상태의 악화를 느낄 수 있다.


당시의 내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수첩의 일기들을 이곳에 옮긴다. 하단의 문장은 지금의 내가 남긴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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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2月
5월 말 제대 후 이제 반년이 흘렀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 다닌 것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하지도·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시간동안 그저 나 자신을 유지하고만 있었을 뿐이다. 올해의 시간이 겨우 한 달 남았다. 나는 아직도 도무지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 해도 무엇을 위해? 나에게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더 나은 상태라는 게 있기는 있는 걸까?

*몸의 상태에 대한 고민과 동반된 군 제대 이후,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그래도 몸상태 말고 다른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글씨체가 뚜렷하다. 정신도 그나마 괜찮았던 것 같다. 물론 아직까지는.


완벽한 나날이란
내일 아침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나날.

*그저 평범한 말투로 적힌 문장이지만 저 문장을 쓰던 나는 얼마나 절실했을까, 말끔한 정신으로 깨어나는 아침이. 새로운 하루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깨어날 수 있는 아침이. 점차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무렵의 일기였던 듯싶다.


(…) 약속시간에 좀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별반 대수로울 것도 없는 정도의 달리기로 그렇게 10분쯤 뛰는 동안 내내 엉겨 붙는 듯한 가슴의 답답함이 나를 괴롭혔다. 정류장에 도착해 숨을 고르는 동안에도 답답함은 여간해선 사라질 줄을 몰랐다.
하루의 약속을 마무리 짓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한낮의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꿈에서의 나도 잘 쉬어지지 않는 호흡에 괴로워하며 나를 앞질러 달려 나가는 친구들을 따라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운동장에서 솟아나온 손들에 붙들리기라도 하듯 느린 속도로 겨우겨우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나는 그런 내 상태를 다른 아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질을 받으며 놀림거리가 될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달려 나가려 했지만 아이들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갈 뿐이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결국 나는 아이들을 따라잡지 못한 채 잠에서 깼다. 꿈속에서 운동장을 달리던 오랜 시간만큼이나, 창밖엔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병이 왔음을 도무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게 SOS신호를 보내던 뇌는, 그럼에도 내가 몸의 이상을 깨닫지 못하자 꿈을 통해서라도 전하려 했던 모양이다.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줘’하고.


O에게서 들은 충고
(…) 어째서 난 요즘 그렇게나 혼자 있기를 싫어하고 내 시간을 소비시켜 줄 누군가를 이렇게 계속해서 구하고만 있는 것일까? 그건 전부 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내 안에 쌓여 있던 모든 것은 바스라져 흩어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나 혼자임을 버텨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힘을 길러야만 한다. 모든 순간의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하고 매 순간의 마무리를 충실하게 하고 정신을 놓아두지 말아야 한다. 그로써 나 자신이 나의 의지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금 나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기르자.

*후배에게 혼난 날 적었던 일기.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기력하기만 한 나 자신에게 아무래도 화가 났던 것 같다. 병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그 모든 것을 내 탓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나 자신에게 너무나 미안하기만 하다.


아,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 건가?
왜 이렇게 뭔가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건가.

*정말 얼마나 울고 싶은 날이 많았었는지. 내 상태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답답함에, 설명하더라도 아무도 내 상태를 알지 못할 거라는 갑갑함에.


AM 11:00
오늘도 늦잠을 자버렸네. 밤에 침대에 누우면 뒤척일 것도 없이 바로 정신을 잃어버리는데 이렇게 항상 일어나기 힘든 걸 보면 피곤하긴 한 모양이다.

*부드러운 글투로 적힌 문장은 체념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그저 신체적 피곤함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2주간의 평균 취침시간은 하루에 열두 시간씩이었다. 일찍 잠자리에 누워도 다음 날 침대에서 빠져나오는 시각은 정오를 지난 시간이곤 했다. 대체 어째서일까? 반복되는 과잉 취침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은 매번 허사로 돌아가곤 했다. 요 며칠, 잠의 막바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들은 그 이전까지 내가 꿔 왔던 꿈들과는 달랐다. 내가 꾸는 꿈이란 결국 내 무의식의 발현일 텐데 그런 것들이 내 무의식에 가라앉아 있었던 걸까? 의아한 기분이 들 정도로 기분 묘한 꿈들이었다. 수면 폭주가 이제 끝난 건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물들이 변화한 것만은 틀림없다는 기분이 든다.

*몸이 보내오는 SOS신호를 희미하게나마 느꼈던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 일기 이후부터 다이어리의 글씨체는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나를 놓아버리고 살았나.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 시간이 너무나도 아쉽고 안타깝고 아깝고 그렇다. 더 이상은 그렇게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다. 일차 기한은 10월 3일. 연정이 누나의 결혼식 예정일로 잡겠다. 그때까지 할 일은,

一. 글 열 개를 쓰겠다.
一. 매일매일 운동하겠다.
一. 매일매일 명상하겠다.
一. 매일매일 책을 읽겠다.

이 일들을 반드시 지켜내겠다. 반드시.

*마치 눈물을 흘리는 듯한 느낌의 글씨체로 적혀 있던 일기. 일본 만화 <도로헤도로>에는 ‘신(心)’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마법사’들은 검지손가락 끝의 구멍에서 나오는 연기로 마법을 부리는데, 일반인 아버지와 마법사 어머니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신은 마법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분명 마법사일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고 손을 자르고 심지어 어깨죽지까지 이르는 팔 전체를 잘라내는 처절한 행위 끝에 마침내 연기 구멍을 찾아내고야 만다. 저 때의 일기, 우는 듯한 글씨체의 일기로부터 그러한 처절함이 전해진다. 스스로가 정한 기한이 다한 뒤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정말 무슨 큰일을 벌이기라도 하겠다는 처절함이.


그러나, 이후의 일기장은 한동안 공백이다.




내가 남긴 일기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건, 인간은 자신을 오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조금이 아닌 한참이나. 내가 뒤집어쓰고 있던 피곤함을 병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내가 몸 관리를 못한 탓’으로만 여기던 시간들. 나는 나 자신에게 왜 그렇게나 가혹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자책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때의 나 자신에게 다시 한 번 너무나 미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일기로부터 또 하나 알 수 있는 건 그때의 내가 정말로 외로웠다는 것. 다만 홀로 서 있을 힘도 부족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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