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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진단 전의 이야기 #2

by 이대


“가끔 밤중에 잠이 깨면, 견딜 수 없이 무서워질 때가 있어.”
나오코는 내 팔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이렇게 비뚤어진 채로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이대로 여기서 늙어 죽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야.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 고통스럽고 몸이 차가워지고.”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


그 시기 초여름 무렵의 일이다. 잠이 쏟아지는 증세가 완연했을 때다. 무슨 병인지 짐작도, 아니 이 잠이 오는 증세가 병 때문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가고만 있던 그때. 당시 나는 서울의 자취방에서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잠이 오고 잠기운 때문인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몽롱하기만 하고 아무리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깨어나는 시간은 언제나 정오 이후이기만 하던 그 즈음의 상황 하에서는 공부 뿐 아니라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심지어 ‘취미 생활’이라 부를 수 있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펼치면 책에 적힌 글자는 눈에 들어오더라도 그 내용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즈음 읽었던 몇 권 되지 않는 책 가운데 재미있게 읽었다고 기억하는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아니, 내용이 기억나는 책은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까. 음악을 듣는다 쳐도 뭐랄까 음악 듣는 시간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건 그 시기가 유일한 시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 두려웠던 것은 글쓰기마저 불가능했다는 사실이다.


20대 시절의 나는 일정 분량을 가진 에세이 형식의 글을 취미처럼 꾸준히 적어오곤 했었다. 다른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저 정말로 취미처럼. 그처럼 취미삼아 하던 글쓰기는 군에 입대한 후에도 계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단 한 편의 글도 적지 못했다. 뭐라도 글이라는 것을 쓸 수 있을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두렵게도 내가 이제껏 쌓아 왔던 나라는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고 부정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병의 증세는 그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취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취미 생활조차 할 수 없는 삶이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몽롱한 정신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기만 하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또 기원하곤 했다, ‘오늘 밤 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는 시간은 이른 아침일 것이며 나는 매우 푹 잔 개운한 기분과 맑은 정신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고. 그러나 다음날 눈을 뜨면 밤의 생각과 다짐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했던 것인지 깨닫곤 하는 것이었다.

눈을 뜬 침대에 가만히 누워 얼마나 자주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두려워서, 너무나 두려워서. 이런 상태로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영영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이런 피곤함이 계속되면 어쩌지?

이대로 나이만 드는 채,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그리고 그런 내 증세, 내 몸과 정신의 상태를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답답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지금 내 상태가 이렇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타인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몸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짐작밖에는 할 수 없다. 아무도 내 몸의 상태를 모른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병원의 의사 선생님도 심지어는 엄마, 조차도.


그 시기 나는 나 자신 그리고 가족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기만 한 말이지만, 나와는 정말로 멀고 먼 세계의 일이라고만 여겼던 자살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이 있다. 전까지는 이렇게 재미있는 일들, 하고 싶은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언제나 의아해 하기만 하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사람들이 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인지 그 심정이 막연하나마 조금은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삶을 사는 것이 정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 삶이 죽음과 별반 다를 것 없겠다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존재하는 법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생각도 불가능한 채 하루의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던 나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산다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이.




복학을 준비하던 시간이 흘러 방학 무렵이 되어 잠시 내려갔던 집에서도 나는 내내 잠만 자기만 했다.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너무나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와중 한 대학 친구로부터 '곧 있으면 지산밸리 락 페스티벌이라는 음악제가 열리는데 함께 가지 않을래?'라는 말을 들었고, 나는 뭐라도 하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친구를 따라 페스티벌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렇게 갔던 현장에서도 내 몸은 집에서나 매한가지였다. 그때 락페에서의 경험들 가운데 지금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무려 3일 일정으로 열리던 행사에 전부 참석해 관람했는데 말이다. 어떤 밴드가 공연했는지, 관람은 무대 앞에서 봤는지 멀찌감치에서 봤는지, 식사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등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3일간의 헤드라이너(메인 공연자)가 누구였는지 조차도 전혀. 겨우 기억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한 밴드의 공연이 끝나면 다음 공연을 기다리며 잔디밭에 누워 잠을 자던 내 모습뿐이다. 그냥 공연도 아니고 무려 락 페스티벌 현장에서 잠을 자다니….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때 그런 내 모습에 실은 화가 났었다고 한다.


지산 락페에는 친구와 둘이서만 갔던 것이 아니라 친구의 지인 둘과 함께 갔었다. 지인 중 한 명이 차를 가지고 있어 3일의 행사 기간 동안 낮이면 행사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행사가 끝난 밤이 되면 미리 예약해 둔, 행사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모텔로 차를 몰고 가 숙박을 하고 다음 날 다시 행사장으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가는 그 5인승 구형 갤로퍼의 뒷좌석에서 나는 늘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까지 가는 길을 알지 못할 거야,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고 달려가다가 결국엔 죽어버리고 말거야. 분명히 그럴 거야.’


숙소로 달려가는 차 안에서 나는, 몰려오는 두려움에 이를 꽉 깨물고 그런 문장들만 속으로 계속해 되뇌며 앉아 있었다. 왜였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은 못했지만 그 두려움은 3일 내내 차에 올라 탈 때마다 나를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차는 언제나 별 일 아니라는 듯 숙소를 찾아가곤 했으며 그렇게 도착한 숙소에서 나는 그제서야 온 몸을 꽉 붙들고 있던 긴장을 풀고 쓰러져 잠이 들 수 있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유 없는 공포감은 뇌종양 환자들에게서 흔히 보고되는 증상 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나 전두엽이나 측두엽에 종양이 발생한 환자들에게서 두려움이 발생한다고. 또한 종양이 자라나며 두개골 안의 뇌압이 높아지는 것 역시 환자들에게 막연한 압박감과 불안감을 체감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뇌종양으로 인해 뇌에 문제가 생겨 병을 자각하는 능력이 저하되면 ‘내게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라는 직감은 오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 그러면 몸은 그것을 공포감으로 표현한다. ‘지금 뭔가가 잘못다는 걸 알아줘’하고. 다시 말해 그때 차 안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는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SOS신호였다. 두려움에는 사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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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고 이렇듯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기억은 아직도 가끔씩 나를 찾아오곤 한다. 아마도 나에게 찾아왔던 병의 자장으로부터 나는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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