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전의 이야기 #4
“혼자라는 느낌과 외로움이란 전혀 다른 감정이다.”
- 피터 딘클리지, ‘Deadline' 紙 인터뷰 中
피터 딘클리지라는 왜소증 배우에 대해 알고 있나요? 정확한 이름까지는 모르더라도 얼굴을 보면 ‘아, 이 배우’하고 알아볼 사람들이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 HBO채널 인기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라니스터 가문의 차남, ‘난쟁이’ 티리온 라니스터 역을 맡아 수많은 영화제의 연기상을 휩쓴 배우. 그리고 <엑스맨>이나 마블스튜디오의 영화에도 주요 캐릭터로 출연해 활약한 배우, 피터 딘클리지. 왜소증이라는 불리한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중후한 목소리와 깊이있는 연기력으로 할리우드 대표 배우로 인정받는 그는 내 마음 속에 큰 의미를 남긴 배우이기도 하다. 한참이나 외롭기만 하던 시기, 내게 위안을 주었던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점차 병의 위세가 등등해짐에 따라 정신적인 상태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나날, 나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면 매일같이 노트북에 다운로드 받아두었던 영화 <스테이션 에이전트>를 보곤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듣지 않고 복학하면 나아질 거라며 복학해 지내다 학기 도중에 급작스레 휴학하기 전까지, 약 한달 반의 시간동안 자취방 생활을 하던 때. 그러니까 지칠 대로 지쳐 하루하루 버텨 나가기만 하던 그 때의 나는 일과를 마무리하며 마치 하나의 의식이라도 치르듯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스테이션 에이전트>를 되풀이해 보고 잠들었던 것이다. 별다른 이유랄 것도 없이 그저 그렇게.
오랜만에 생각이 나 영화 <스테이션 에이전트>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어째서 그 시기에 그렇게나 <스테이션 에이전트>라는 영화를 집착하듯 보았던 것인지를. 그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영화의 내용에 있었다. 몇몇의 인물들이 친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는 <스테이션 에이전트>라는 영화의 내용에 말이다.
그 때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떤 상태였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처음 뇌종양의 증세가 나타난 지로부터 일 년 정도가 지난 시기였으니까 병세가 한창 때였을 테고 그래서인지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던 때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때의 내가 무척이나 외로웠을 거라는 사실이다. 당시의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건 혼자라는 느낌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오롯이 혼자였던 내가 느꼈을 고립감과 그로부터 비롯된 깊은 외로움. 제대로 된 사고는 불가능했을지언정 나에게 감정만은, 외로움을 느끼는 그런 감정만큼은 남아 있었다.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들을 때면, 내가 수업을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딴생각만 하고 있는 건지 정신없이 멍 한 상태로 그저 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다가 강의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강의실로 찾아가곤 하면서도 필기는 전혀 (정말이지 단 한 자도) 하지 못했다. 교수님의 말씀이 귀에는 들어와도 머릿속까지는 입력되지 않으니 무슨 필기를 하겠는가. 그렇게 하루의 수업을 다 마치면 다른 뭔가를 할 생각은 전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졌다. 그렇게 저녁도 거르고 몇 시간을 자다 깨어나곤 했다. 그런 상태로 지내던 그 시기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누굴 만날 수 있었겠으며 만난다 한들 대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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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에이전트>는 친구가 되어 가는 방법에 대한 영화라고 해도 좋을 영화다. 부제로 <스테이션 에이전트 : 친구가 되는 방법>이라고 붙여 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유일한 친구 헨리와 함께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던 난쟁이 핀(피터 딘클리지 扮)은 헨리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그가 유산으로 남긴 한적한 시골의 폐쇄된 기차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왜소증이라는 신체적 조건 탓에 어딜 가든 반갑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던 핀은, 그곳에서 고독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기차역 바로 옆에서 핫도그 트럭을 운영하는 수다쟁이 죠를 만나게 되고, 그렇게 핀과 죠 그리고 또 한 명의 동네 주민 올리비아는 서로의 취미생활을 함께 공유하며 친해져 간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기만 했던 그들이 친해져 가는 과정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취미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함께 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는 데서 시작된다.
아, 이 부분에서 정말 죠를 칭찬해 주고 싶다. 그처럼 취미를 함께하는 ‘의지를 보이는’ 건 전부 죠가 도맡아 이끌어 나가고 있으니까. 강가의 벤치에 앉아 한 시간도 넘는 스케줄로 한 대씩 지나가는 열차를 관찰하는 것(핀의 취미생활)에도 참여하고, 철길을 따라 무작정 할일 없이 걸어가는 것(역시 핀의 취미생활)에도 올리비아까지 불러들여 함께 참여하고 말이다. 나는 핀의 뒤에 죠만 따라가던 철길 걷기 장면으로부터 얼마 후쯤 이어지는 핀의 뒤에 죠-죠의 뒤에 올리비아가 따라가는 그 장면이 그렇게나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죠는 자신의 취미생활에도 핀과 올리비아를 참여시킨다. 죠의 취미생활이 뭐냐고? 요리다 요리. 죠는 자신의 취미생활인 요리에, 그 요리의 시식자로서 핀과 올리비아를 기꺼이 동참시킨다.
그리고 올리비아도 핀의 취미인 철길 걷기에 동참하고 그녀의 집을 핀의 취미인(취미라 할 수 있겠지?) 죠와 함께 촬영한 열차 쫓는 비디오 감상에, 그리고 죠의 취미인 요리를 하는 데에 흔쾌히 제공한다. 그렇게 핀과 죠 올리비아는 서로의 취미 생활을 함께 공유해 가며 처음 느꼈던 서먹함도 사라지고 친해져 간다. 올리비아가 던진 “왜 뉴 파운드랜드(핀이 사는 곳)를 선택한 거야?” 라는 질문에, 초반엔 죠를 별로 기꺼워하지도 않던 핀이 “죠하고 가까이 살고 싶어서요”하며 농담처럼 대답할 정도로 말이다. 이후 웃기는 소리 그만하자는 듯 올리비아와 죠가 함께 웃는 장면은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는 명장면이다.
아, 이렇게 핀과 죠 그리고 올리비아만 얘기하면 섭섭해 할 인물이 한 명 있다. 그건 바로 클레오다. 초등학생인 클레오는 어쩜 그렇게나 어른스러운지 모르겠다. 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러나 핀의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는 작은 키에 대해서는 언급을 자제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핀을 자신이 속한 그룹(학교의 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클레오가 다니는 학교의 반에 찾아가 클레오의 친구들 앞에서 일일교사를 하는 핀의 모습을 보면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또 그 일이라는 게 자신이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철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니 그에 대해 꽤나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그 장면 역시도 너무나 좋은 장면이다.
<스테이션 에이전트>의 마지막 장면은, 핀과 죠 올리비아 셋이 밤의 정원에서 의자에 느긋이 앉은 채로 담배를 피우며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다. 자취방에서의 나는 매일같이 <스테이션 에이전트> 속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따듯한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의 친구되어감을 지켜보면서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감상하면서 아마 나는 역시나 핀과 죠 그리고 올리비아처럼 편안한 마음이 되어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마음 속 솟아오르는 외로운 마음일랑은 훌훌 털어버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