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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젊은이와, 위로와 위안

치료중의 이야기 #6

by 이대


“여러분은 위로와 위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타인의 따듯한 손길,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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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예정된 이야기 순서의 다섯 번째 차례였던 젊은이가 가만히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 젊은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저 평범한 외모를 가진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둥그렇게 모여 앉아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곤 자신의 배꼽 부위에 모아 둔 손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간은 젊은이 앞에 이야기를 했던 네 사람의 시간이 지나 저녁 아홉시 삼십 분 경을 가리키고 있었고 어두운 조명의, 이번 모임의 장소인 작은 방 하나로 이루어진 숲 속의 오두막은 도시의 콘크리트 건물과는 전혀 다른 낯선 숲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녁식사 이후에 시작된 이야기 순서들 이었기에 아무도 배고파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일을 하려 움직이지도 않은 채 조용히 집중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제가 위로와 위안의 손길을 받았던 것은 병원에서였습니다.” 젊은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군대를 제대한지 1년쯤 지난 후였을까요, 저는 제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잠을 자도 계속해 잠이 오고 결코 졸음이 가시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몇 달간 계속해서 제 하루 수면 시간은 열두 시간을 훨씬 넘었습니다. 아무리 잠을 일찍 청해도 눈을 뜨는 시각은 다음날 정오 이후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뜬다고 해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몽롱한 정신으로 그저 붕 뜬 채로 생활하며 틈이 날 때마다 쓰러져 잠들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넘게 잠을 자고 다음 날 일어나 또 그와 똑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입니다. 마치 몽유병자와도 같은 하루하루를 말입니다. 그렇게 지내던 저는, 몇 달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대학병원을 찾았고 MRI촬영을 통해 뇌에 있는 작은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종양이었습니다.


뇌종양을 발견한 후 저는 곧바로 입원했습니다. 솔직히 놀라긴 했습니다만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잠이 계속해 오는 것보다는 ‘뇌종양 때문’이라는 원인이 명확히 밝혀졌다는 사실에 솔직히 후련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뇌종양이라는 저의 질병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래서 얘가 그렇게 졸려 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는지 별반 걱정하시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당시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부모님의 걱정 없는 태도를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대학병원에 입원한 저는 다섯 달 가량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았던 다섯 달의 기억은, 저에게는 매우 긍정적인 분위기로 남아 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그렇게 오랜 시간 병원 신세를 져 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은 꽤 넓어서 심심하지 않게 돌아다닐 곳이 많기도 했습니다. 또 간호사 누나들도 모두 다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이라서 병원에 있는 시간동안 저는 매일같이 항상 웃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간병을 위해 병원에 와 있던 엄마와도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생활했던 것이 중학교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것도 참 행복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힘들었던 점이 있었는데, 첫째로는 책을 읽기가 참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신체에 뇌종양의 증상, 다시 말해 잠이 쏟아져 오기 시작했던 입원하기 일 년 전 즈음부터 책을 읽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에 익숙해져서 그렇게까지 힘든 점은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밥을 먹기가 굉장히 힘들고 하루에도 십수차례 구토가 나온다는 점이었습니다. 먹은 것도 없이 하는 구토는 물밖에는 나올 것이 없어서인지 나중에는 노란 위액이 그대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식판들이 배식 카트에 실려 병실에 배달되어 오면 저는 멀리 휴게실로 도망쳐 가 있었습니다. 음식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배달된 식사는 대부분 엄마가 드셨습니다. 제가 먹을 수 있었던 건 물 그리고 음료 중에서도 포카리스웨트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포카리스웨트만을 먹을 수 있었던 저였지만 그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병원에 입원하기 전의 저는 몸무게가 지금보다 15킬로그램은 더 무거웠었고 그랬기에 살이 빠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원 측에서도 포도당을 주사해 줄 뿐 별반 그것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별로 문제될 것이 병원 측에서도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뿐만 아니라 항암치료 중에는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는 게 그리 큰 고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섯 달의 항암치료가 끝나 가고 방사선 치료를 앞두고 있던 때였습니다. 항암 치료를 담당하신 의사 선생님과 앞으로 방사선 치료를 담당할 의사 선생님은 다른 분이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요, 약물을 통한 항암치료는 종양내과가 담당하고 방사선 치료는 방사선 종양학과가 담당하는 치료일 테니까요.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맡아 보실 나이 지긋한 의사선생님께서 제 종양의 종류가 정확히 무엇인지 판단하기 위해, 제 뇌에 발생한 암 세포의 조직검사를 해 보아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뇌수술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제 부모님은 그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몇 가지 검사를 통해 제 뇌종양이 어떤 종류의 뇌종양인지, 저와 제 부모님도 그리고 병원 측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사선 치료를 맡은 의사 선생님은 무척이나 정확한 치료를 중시하시는 분이었는지 종양의 조직을 들여다보지 않은 검사 결과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이셨습니다. 종양의 종류를 정확히 알아야 방사선을 쬐는 방식이나 종류도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말씀이셨지요. 하지만 조직검사를 위한 뇌수술을 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저희 가족에게 맡기셨습니다. 저와 저의 부모님은 방사선치료에 들어가기 전, 병원에서 마지막 며칠 남은 항암치료를 받으며 결정을 고민했습니다. 신체 다른 부위의 수술이었다면 그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수술 부위가 두개골 속의 뇌라는 사실 때문에 놀라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사람은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저였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님은 뇌수술이라는 걱정에 만류하기도 하셨지만 제 신체에 대한 결정은 제가 내릴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정확히 어떤 마음에서 수술을 받기로 결심한 것인지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때까지도 붕 뜬 기분으로 새로운, 그리고 뇌수술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한 번쯤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수술 준비는 신속히 이루어졌습니다.


한 젊은 의사 선생님께서 저를 간호사실 옆의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가더니 두피에 마취 주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수술을 하는 중에 머리가 움직이면 뇌가 상할 염려가 있으므로 머리를 고정시켜 둘 틀을 나사를 이용해서 두개골에 고정해 두는데, 두개골에 나사를 박을 때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마취 주사였습니다. 그 마취 주사는 보통의 마취 주사와는 다른 종류의 주사인 것 같았습니다. 머리에 놓는 과정이 꽤나 아팠습니다. 상당히 뻐근하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그동안 아픔을 잘 참아 오던 저도 ‘아… 아픈데요’ 하는 말을 의사 선생님께 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취 주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나사를 박는 틀 고정 작업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야말로 ‘두개골에 나사를 박는’ 작업이었으니까요. 뼈가 약한 노인들은 그 과정에서 두개골에 금이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과정이었습니다.


총 네 개의 나사가 두개골에 박혔습니다. 세 개가 박힐 때까지는 정말로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만을 내며 참았지만 마지막 네 번째의 나사가 박히는 끝 무렵에서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제 생애에 있어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꼽으라면 저는 두말할 것 없이 그 순간을 꼽을 것입니다.


나사로 박은 틀을 머리에 끼운 채로 저는 침상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저는 뇌수술을 받는다는 바로 그 사실보다, 제가 이제 들어갈 수술실의 차가운 벽의 색과 금속성의 수술 기구들 그리고 초록빛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의 차가운 인상이 더욱 더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긴장해 들어간 수술실은 그러나 따듯한 밝은 빛이었고 금속성의 수술 기구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온 의사 선생님들도 분홍색의 수술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그 정도 수술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듯 가벼운 소재의 이야기들을 서로 잠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뇌수술 전의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 머리의 틀을 수술대에 고정시키고 수술 중에 무의식중으로 움직일 수 있는 팔을 수술대에 묶고 눈을 거즈로 가린 채 수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뇌수술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습니다. 뇌라는 신체 부위에는 고통을 느끼는 통증 수용체가 없어 수술 시 고통이 없기 때문에 마취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있어 수술 과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귀는 열려 있었기에 수술 과정의 모든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도 기억나는 소리는 두개골을 잘라 구멍을 내는 것인지 아니면 드릴로 뚫어 구멍을 내는 것인지 모를, 제 두개골에 닿는 전동기계의 맹렬한 회전 소리였습니다. 수술하는 과정에서의 고통은 두개골에 나사를 박고 틀을 고정하는 과정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 기계의 회전 소리만큼은 정말로 두려웠습니다. 기계의 회전이 끝나고 몇 십 분쯤 지났다는 생각이 들 무렵 수술이 끝나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의사들은 수술을 마친 제 신체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혈압이나 체온이나 뭐 여타의 그런 것들을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의 신체 수치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의사들은 제 눈을 가리고 있던 거즈도 치워 주지 않고 저를 수술실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던 저에게 조금씩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심장 박동도 그런 제 두려움에 따라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심장이 빨리 뛰면 혈압도 따라 올라갈 텐데…’ 하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두려움과 심장 박동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걱정이 계속되던 그 순간, 위로와 위안의 손길이 저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눈을 가린 채 아무런 말없이 두려움에 떨고만 있던 제 손을 한 의사 선생님이 꼭 잡아 주었던 것입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어떤 의사 선생님일지 상상이 되었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와 눈을 가리기 전 보았던 30대 초반 정도로 짐작되는 남자 선생님의 손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손은 저에게 아무 걱정 말라며 모든 일이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듯 따듯하고 굳건했습니다. 저는 제 손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역시나 힘주어 꼭 붙잡았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손을 잡고 있었을까요. 제 신체 수치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수술실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술실 안에서, 그 의사선생님도 그리고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 마음은 저에게 분명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에게도 제 마음이 전해졌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 의지하여 위로와 위안을 받아 걱정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안정되어 가는 제 마음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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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젊은이는 거기에서 말을 끊고, 계속해 숙이고만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주위의 사람들을 천천히 그러나 꼼꼼히 둘러보았다. 밤은 어느새 꽤나 깊어져 있었다. 달은 이미 중천 가까이 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젊은이는 말을 이었다.


“저는 그렇게 위로와 위안이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위로와 위안을 필요로 한다면 이제 저는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을 담은 따듯한 손길,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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