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의 이야기 #8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방사선치료의 시작
별 문제 없이 마무리된 뇌수술 후 귀가한 다음 날 아침, 여섯 시를 살짝 넘긴 시간에 눈이 떠졌다. 알람을 맞춰둔 것도 아니고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나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다니. 잠이 쏟아지는 증세에 시달리던 시기 평균 취침시간이 12시간 이상이던 것을 떠올려 본다면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갑작스런 수면의 정상화가 찾아온 이유는 뇌수술 과정에서 종양 샘플 채취와 함께 이루어진, 종양이 둘러싸고 있던 낭종(囊腫) 속 피를 빼낸 덕분 아니었을까 하고 (개인적으로) 짐작한다.
그렇게나 이른 아침, 방에서 걸어나오는 나를 본 아빠의 놀란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겹도록 잠을 자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아빠의 표정이.
수술의 목적은 내가 앓는 뇌종양이 정확히 어떤 종양인지 확인하고자 함이었지만, 수술로 판명된 종양의 종류는 역시나 뇌내 생식세포종양으로 이전 수술외적 검사로 진단받았던 것과 동일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뇌수술은 굳이 받을 필요가 없던 것일까? 뇌에 칼을 댄다는 부담을 무릅쓸 이유는 결코 없었던 것이었을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동안 나를 끈질기게 괴롭혀 온 ‘과잉수면’ 증상이 수술을 받고 나자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맘 먹고 결심했던 뇌수술은 잘 한 결정이었다.
수술을 위해 구멍을 뚫었던 왼이마 윗부분에는 지금도 움푹함이 남아있다.
2월에 시작해 5월 말에 끝난 항암치료, 그리고 6월 초에 받은 뇌수술에 이어 곧장 방사선치료가 시작됐다.
방사선치료는 고에너지 방사선을 종양에 조사(照射)해 종양 세포의 DNA를 손상시켜 더 이상의 세포분열을 막는 치료법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약물을 통한 항암치료는 함암제가 전신을 순환하면서 세포를 공격해 암세포를 비롯한 온몸의 세포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치료라면, 방사선치료는 방사선으로 정해진 부위만, 다시 말해 암세포만 정확히 겨냥해 공격하는 치료법이라 한다. 뇌종양의 한 가지인 교모세포종을 앓고 있다는, 장강명 작가의 아내이자 독서 플랫폼 그믐의 대표 김새섬 님의 언급을 빌리자면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개미에 쬐는 것‘ 같은 치료가 바로 방사선치료다. 항암치료를 통해 먼저 종양의 크기를 줄이고 다음으로 이어진 방사선치료로 남아있을 수 있는 미세 암세포까지 제거하는 것. 이것이 일반적인 암 환자 치료의 스케줄이다.
그러고 보면 뇌수술에 앞서 이루어진 MRI촬영은 정확하고 안전한 수술 지도를 만드는 과정이었음과 동시에 방사선치료의 사전작업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방사선을 쏠 종양의 위치와 주변의 뇌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지도를 만드는 작업. MRI촬영으로 그렇게 내 머리의 지도를 작성하고 나서 본격적인 방사선치료를 시작하기 전, 방사선사 선생님은 내 두피와 척추 부분에 의료용 매직펜으로 뭔가를 그려 넣었다. 아마 방사선을 쏠 자리를 표시했던 것이지 싶다. 표시한 자리가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샤워할 때도 그쪽은 물로만 씻고 수건으로도 톡톡 물기만 제거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었지만 치료를 받은 계절은 6월의 한여름이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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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치료는 MRI촬영기와 비슷하게 생긴 방사선 치료기를 사용한다고 한다(직접 치료를 받았음에도 어째서 ‘~~라고 한다’라고 적은 건지는 뒤에서 말하겠다). MRI촬영으로 구성한 뇌 지도를 바탕으로 방사선의 강도와 조사 범위, 각도, 횟수 등을 결정한 뒤 방사선 치료기에 누운 환자 주위를 치료기가 회전하면서 방사선을 조사한다. 실제로 방사선이 쏘아지는 시간은 1~3분 내외로 짧으며 한 회 치료의 전체적인 소요 시간은 10~20분 정도. 이런 치료를 보통은 한 주에 수회씩, 몇 주간 반복하는 것이 방사선치료의 일정이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기 때문에 환자들은 보통 입원치료가 아닌 통원치료를 받는다.
며칠간 치료를 받은 뒤, 방사선사 선생님은 이제부터 방사선치료가 전체치료로 넘어간다는 말씀을 하셨다. 뇌 뿐 아니라 척추에도 방사선을 쏠 거라는 말씀이셨다(그래서 척추에도 매직으로 표시했던 것이다). 뇌와 척추는 따로 떨어져 있는 기관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뇌와 척수 사이를 뇌척수액이라는 액체가 순환하며 영양소를 뇌에 공급하거나 동시에 찌꺼기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를 가리켜 중추신경계라고 일컫는 것이라 한다.
모든 뇌종양에 척추방사선치료(전체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앓은 생식세포종양은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에 반응이 좋은 종양인 동시에 뇌척수액을 따라 퍼질 가능성(전이 가능성)이 있는 종양이었다. 혈관을 타지 않아도 뇌척수액을 따라 종양이 흘러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생식세포종양의 경우 방사선 전체치료는 보편적인 치료 과정이었다.
전체치료는 아마 힘들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체치료를 받은 첫날 저녁식사를 하던 도중에 토해버렸다. 집이었고 화장실로 달려가 처리할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밖에서 밥 먹다 그랬으면 어쩔 뻔 했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 후 삼 주간 전체치료를 받으며 나는 정신없이 보냈다. 바쁘게 보냈다는 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정신 없이’ 보낸 것이다. 뇌와 척추를 대상으로 한 방사선치료는 깊은 피로감을 불러 왔고 그 때문에 방사선치료를 받은 날들의 기억은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내가 정말 방사선치료라는 치료를 받았던 걸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래서 치료가 어떻게 이루어졌던 것인지, 방사선 치료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치료를 위한 통원은 어떻게 했던 것인지 등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불편할 것 없었던 항암치료와는 달리 방사선치료는 그저 참으로 고단한 치료였다는 기억밖에는.
죽음에 대한 생각들
몇 주차 째였더라? 방사선치료를 받으러 엄마와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암병동 방사선치료실 앞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피로에 지쳐 몽롱한 기분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어떤 아저씨에게 “어?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거는 게 아닌가. 누군가 싶어 살펴봐도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통 알아볼 수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불거진 눈두덩 그리고 새까만 피부. 그야말로 '초췌하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모습을 하고 있던 아저씨. ‘혹시 나도 아는 사람인가?’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누구인지 깨닫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엄마가 인사한 아저씨는 내가 뇌종양 진단을 받고 처음 입원했던 2인 병실에서 만난 바로 그 아저씨(08화 ‘당신은 엄마와 친하신가요?’참고)였다. 다시 만난 아저씨도 방사선치료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림프종 암을 앓고 있다 말씀하셨던 아저씨는 처음 만났을 땐 분명 목소리나 혈색, 체구 등 겉으로는 암 환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그저 건강해 보이기만 하던 아저씨였다. 그런데 불과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저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항암치료가 그렇게나 아저씨를 괴롭혔던 것일까?
다시 만난 아저씨로부터는 다름 아닌 죽음의 그림자가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돌이켜 떠올려 보건대, 어쩌면 그때 나를 본 아저씨의 생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통했던 그 나이대 보통의 청년에서 다 빠져버린 민머리를 감춘 흰색 비니를 쓴, 야위어버린 나를 마주한 아저씨의 생각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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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혹은 친족의 죽음이 다가오는 시점이면 사람들은 많이들 신에게 의탁하게 된다고 한다. ‘시대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무신론자였지만 고명딸의 위암 투병과 실명 위기를 계기로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됐다고 하며, 종교에 대한 질문에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 밝혔던 장강명 작가 역시 아내의 뇌종양 투병을 계기로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암병동 4인실에서 지내던 어떤 날. 기억하기로는 분명 특이할 정도로 차분한 날이었다. 창으로부터는 따듯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고 다른 환자들은 병실을 비웠던 건지 잠들어 있던 건지 조용하기만 했다. 간병을 해주던 엄마도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병실에 그저 나 혼자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차분함을 즐기며 그렇게 침대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는데 남성 두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
차분한 검정색 의상에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을 보니 아마 교회에서 온 분들인 것 같았다. 전도사 분들 이었을까, 아니면 장로님들? 가만히 들어온 목회자 분들은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죽음을 준비함에 앞서 그리스도의 돌보심을 받으실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려 하는데 괜찮겠냐는 말을 꺼냈다. 암병동의 입원실들을 하나씩 모두 방문하고 있는 것 같았던 그 둘은 내가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그런 짧은 성사를 ‘병자성사(病者聖事)’라 한다던가? 특별히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따지자면 불교적 성향에 가까운 나는 ‘뭐, 나쁠 것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그러시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곧이어 기도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하나님,
지금 이 사람을 당신 앞에 데려옵니다.
그의 몸은 오랜 시간 병을 견뎌 왔고,
그의 마음은 말로 다 하지 못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지나왔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그가 겪어온 모든 밤을 알고 계시고,
혼자 버텨야 했던 순간들 또한 이미 보고 계십니다.
이 사람의 아픔을 없애 달라고만 청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 아픔 속에서도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몸이 약해질수록 마음까지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주시고,
이 사람이 자신을 탓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미안함으로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가 살아온 시간은 충분히 성실했고,
이미 많은 것을 견뎌냈음을 그 스스로도 알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두 목회자 분들이 내 앞에서 그렇게 읊어주는 기도문을 들으며 나는 그때까지 해보지 않았던 죽음에 관한 생각을, 그리 심각하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죽음 이후 나는 어떤 신의 보살핌을 받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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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치료에 앞서 병실에 입원해 항암치료를 받던 시기, 여러 친구들이 병원을 찾아 주었고 학교 박물관에서 함께 아르바이트했던 이들도 문병을 와 주었는데 S누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누나는 내가 뇌종양을 앓고 있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을 찾아 주었는데, 왜 이제서야 병원에 온 것인지에 대해 말하며 누나는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뇌종양에 걸렸다면 어차피 금방 죽을 아이인데 굳이 병문안을 갈 필요가 있을까?” 라고 말했다던 누나의 남자친구. 그래도 이제 헤어졌으니 이렇게 병문안을 올 수 있었어, 라고 웃으며 말을 잇는 S누나의 이야기를 병실 침대에 기대앉아 들으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정확히 무슨 생각이었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뇌종양이란 병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 속에선 그만큼이나 죽음과 가까이에 있는 병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겨우 떠올렸던 듯싶다.
어쩌면 내 뇌종양 진단에 대한 우리 가족의 반응이 절망이 아닌 희망에 가까울 수 있었던 건, 전까지 가까이에서 암환자의 투병 고통과 암으로 인한 죽음을 경험한 적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저 한없이 나이브하기만 한 태도로 '치료만 받으면 낫겠지'하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만약 뇌종양이라는 병명을 들었을 때 우리 가족이 완치가 아닌 죽음을 먼저 떠올렸다면, 그래서 생에 대한 내 의지가 꺾여버렸다면 지금의 상황은 아마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나, 그리고 우리 가족이 결정한 뇌종양이란 짐을 짊어지는 방식은 분명한 희망과 기대였다. 덕분에 나는 지금 이렇듯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살아나갈 수 있게 된 것이지 싶다. 뇌종양에 따른 항암치료와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뇌수술을 누구도 쉽게 경험해 볼 수 없는, 인생에 있어 커다랗고 귀중한 경험이었다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