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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금이 Nov 05. 2020

하얀 숲 003

수사

“거기, 현장 보존해주세요. 이렇게 사람들 통제가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예?”

“아니, 여기 환자랑 보호자들 드나드는 병원 입구인데 이렇게 폴리스 라인 치고 출입통제를 하시면 안 되죠”

“누구시죠? 여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입니다.”

“여기 병원 관계자입니다.”

“병원 관계자 분들께는 나중에 수사협조 부탁드릴 테니 그때 얘기하시죠.”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일단 빨리 시신 치우고 최대한 빠르게 주변정리 좀 합시다. 여기 환자분들도 많은데 이런 끔찍한 장면 보고 쓰러지는 사람이라도 생기면 형사님이 책임 지실 겁니까? 예?”

“하~~~~”


병원 관계자 입장에서 사후 처리가 빨리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죽은 사람에 대한 수사도 허투루 할 없는 상황이라 이만식은 양쪽 관자놀이가 뻐근해져 옴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데 이곳저곳에서 사건, 사고가 뻥뻥 터지니 아마도 올해 아홉 수를 제대로 치르고 넘어갈 모양이었다. 49세의 이만식은 경기 지방 경찰성의 베테랑 형사였지만 오늘 같이 젊은 여성이 꽃도 피어 보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건을 접할 때면 찜찜하고 안 좋은 기분에 며칠은 꿈자리가 사나웠다. 하필 요 며칠 새 20대 초반의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평소라면 질색팔색 했을 부적이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안쓰럽고 불쌍하지만, 자식 먼저 저승길 앞세운 저 여자의 부모는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이래저래 씁쓸한 기분에 위속에서 역류해 오는 신물이 이만식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점퍼 안쪽에 어딘가 쟁여 둔 제산제가 있지 않나 싶어 속주머니를 뒤지려는 찰나 팀의 막내 구인호가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숨 가쁘게 뛰어왔다.

 

“반장님, 사망자 신원 확인됐습니다. 이름 정은안, 나이 24세, 작년 7월 동아종합병원에 입사해 지금까지 중환자실 간호사로 근무했답니다. 어제 오후 9시 30분부터 오늘 오전 4시까지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가 같이 일하는 조무사가 화장실 간 사이 갑자기 사라졌답니다. 연락도 되지 않고 밤 근무 인력이 정은안이랑 같이 일하는 조무사 한 명뿐이라 찾으러 나갈 수도 없었답니다.”

“유서는?”

“현장에서 발견된 것은 없습니다.”

“CCTV는?”

“좀 더 확인해 봐야 하긴 하는데 사망 추정 시각 포함 전, 후 1시간 동안은 정은안을 제외하고 옥상을 출입한 사람은 없습니다.”

“흠...쩝...휴대폰은?”

“정은안이 가지고 있긴 했는데 투신하면서 같이 떨어지는 바람이 박살 났습니다. 복구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근데... 반장님, 이 사건 자살 맞죠? 죽고는 싶은데 뛰어내리기 무서워서 세탁물 주머니 뒤집어쓰고 자살한 거. 세탁물 주머니 매듭 끈도 안쪽으로 향해 있고요.”

“글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렇게 시켰을 수도 있지. 일단, 통신기록도 조회해봐. 주변인 탐문 조사는?”

“10층 사무실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


만식과 인호는 간호부에서 마련해준 내실로 들어갔다. 3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가니 지난밤 정은안과 같이 일했다는 간호조무사 설미현이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형사가 미현과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설미현은 한눈에 보기에도 또릿또릿 한 인상에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한창 시절에는 꽤나 미인 소리를 듣고 다녔을 법했지만 지금은 눈가에 보톡스를 넣었는지 아니면 다른 시술을 했는지 안 그래도 찢어진 눈매가 날카로움을 더했다.

밤새, 사라진 동료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시달린 덕분인지 아니면 밤 근무로 인한 것인지 미현은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거뭇거뭇한 눈가와 까칠한 피부, 부서질 듯 푸석푸석한 모발은 누가 환자이고 직원인지 구분하기 애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피곤한 와중에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일하던 동료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미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얼이 빠져 있었다.   

.   

“안녕하세요. 구인호입니다. 경기지방경찰청 형사과에서 나왔고요. 지난밤 정은안 씨 사망사건 관련해서 몇 가지 여쭤 보겠습니다.”

“저...아무것도 모르는데...”

“아~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어려운 거 아니구요. 알고 있는 사실만 간단히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정은안 씨 어제 마지막으로 본 게 몇 시였습니까?”

“음...아마 새벽 4시 전후...? 보통 매 시각 정각에 환자들 혈압 재고 소변량 체크하는데 제가 화장실 다녀와서 보니까 체크가 안 돼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뒤늦게 환자들 혈압 재고 소변량 체크했던 게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설미현씨는 새벽 4시 전에 중환자실에서 나가 화장실을 갔고, 용무를 끝내고 돌아오니 정은안 씨가 없었다?”

“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럼, 어제 정은안씨 출근부터 사라질 때까지 뭐 특이한 점 없었습니까? 평소랑 행동 패턴이 다르다던가, 안 하던 말을 한다던가 하는...”

“글쎄요. 일하는 중에 행동 패턴을 따로 볼 일이 있나요? 저도 너무 바빠서...그리고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에요.

“평소 일하시면서 대화 안 하세요?”

“네. 서로... 많이 바빠서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혹시 중환자실 내부에 세탁물 주머니가 있습니까?”

“네? 아니요. “

“그럼, 평소 세탁물은 어떻게 옮기나요?”

“데이, 이브닝, 나이트 하고 나서 나온 침대보나 베개 커버, 환자복 같은 것들은 바퀴 달린 바구니에 담아서 세탁실로 가져다줘요. 세탁물 무게가 꽤 나가서 주머니에 담아서 옮기는 건 힘들거든요.”

“아… 그럼 세탁실은 몇 시에 문을 여나요?”

“글쎄요. 제가 항상 새벽 6시 정도에 가니까…..한 5시 30분 정도?”

“네, 알겠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

“네...그럼.”



다음 참고인은 중환자실 부서장 유영선이었다. 이른 새벽, 당직 간호장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오느라 한눈에 봐도 정돈되지 못한 옷 차림새였다. 부하 직원의 사망 소식을 듣고 침통한 표정으로 들어온 유영선은 깊은 한 숨을 내쉬며 두 손을 맞잡은 채 잠시 잠깐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평소, 정은안씨한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 같은 것 있었습니까?”

“사실...은안샘이 중환자실에서 적응하기 좀 힘들어했어요. 중환자실이 특수 파트라 일 배우기도 어렵고...또 힘들고 해서 신규 간호사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부서 중의 하나고요. 그중에서 은안 샘은 특히...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업무 능력이 다른 동기에 비해서 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사고들이 종종 일어났고 신규 입장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직장 생활하는 데 있어 크게 다가왔을 겁니다.”

“크고 작은 사고라면 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환자분들 개인정보도 연관되어 있고 업무상 내용이라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좋습니다. 그럼, 정은안씨, 평소 동료들이랑은 관계가 어땠습니까?”

“딱히 모나거나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지 않았어요. 저 같은 경우, 아침 조회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중환자실에 없기 때문에 세세한 사항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두루두루 잘 지냈던 걸로 알고 있어요. ”

“네...그럼 그중에서 특별히 친한 사람은 없었나요?”

“음.. 차인선 선생님이 은안 샘을 많이 챙겨줬어요. 프리셉터가 아닌데도 끝까지 남아서 은안 샘 일을 봐주기도 했고요.”

“프리셉터요?”

“아~ 일반 회사로 치면 신입직원한테 붙는 사수 같은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차 선생님이랑 잠깐 대화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저... 그런데 이 사건 언제쯤 마무리가 될까요?”

“왜 그러시죠?”

“그게…. 은안 샘 일은 안됐지만, 저희 중환자실 식구들도 맘 다잡고 다시 일해야 하고, 저희 힘든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계속 이런 상태면 환자분들한테 피해가 가서요. 얘기 들어보니까 자살인 것 같다고 다들 그러시던데...”

“수사 중이라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저희도 빨리 처리하면 좋은데, 절차라는 것이 있어서요. 아마 중환자실 직원분들 모두 참고인 조사는 하셔야 할 겁니다. “

“네...”


환자한테 피해가 가니 빨리 수사를 마무리해달라는 허울 좋은 구실이 거짓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이쯤에서 정리하자는 마음의 소리였다. 계속 더 끌어봤자 서로 피곤하고 좋을 것 없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게 자살로 사건을 종결하자는 병원 상부에서 내려오는 무언의 지시 내지는 명령. 이만식은 중간 관리자로서 곤란한 위치에 있는 유영선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변사자 처리를 허술하게 할 수도 없었다.


“협조만 잘해 주시면 수사는 신속하게 끝납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죠.”


만식의 의례적인 답변에 영선은 다소 실망한 듯 보였다. 방금 전까지 부하직원의 비극에 눈물을 보이며 깊은 후회와 자책을 하던 부서장의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정은안이 죽은 것은 죽은 것이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래도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월급을 받아야 하기에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돌발 사건은 얼른 묻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부탁하는 영선의 태도가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만식이었다. 영선이 나가고 난 후, 다음 참고인은 차인선이었다. 빨리 조사를 끝내는 것을 조건으로 오전 근무 간호사인 인선과 만날 수 있었다. 중간에 일을 하다가 급하게 달려온 것인지 인선은 가쁜 숨을 내 쉬며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몇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평소 정은안씨가 우울해 보인다거나 힘들어하거나 하는 일들이 있었나요?”

“글쎄요. 저는 잘...”

“듣기로는, 평소 정은안씨를 상당히 잘 챙겨주셨다고 하던데요?”

“네?! 누가 그래요?”


구인호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차인선의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 마냥 초조해 보였다. 차인선 본인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무의식적으로 낀 그녀의 팔짱이 구인호를 경계하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어떤 톤의 높낮이나 의도가 없는 단순한 질문에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니 이만식은 차인선에게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그런 선배의 눈빛을 알아챈 구인호는 차인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차인선씨, 오늘 새벽 4시에서 6시 30분 사이 어디 계셨습니까?”

“네? 그걸 왜...지금 저 의심하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분들도 알리바이 확인 차원에서 같은 질문을 받게 될 겁니다.”

“당연히 자고 있었죠. 그 시간에는. 오늘 데이 근무라서 6시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하고 7시 20분에 병원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거 참고인 조사 맞아요?”

“정은안 씨랑 최근에 다투거나 둘 사이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차차...너무 나갔다.’


이만식은 안 그래도 까칠한 인선이 구인호의 질문에 더욱 벽을 칠 것이란 생각을 했고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인선은 구인호로부터 알리바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고 느꼈는지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에 더해 자신과 정은안 사이에 불화를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의 질문을 받자 차인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기가 차는 듯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팔을 더욱 단단하게 조이고는 다리를 꼰 채 몸을 사선으로 돌려버렸다. 허공을 응시하는 인선의 눈에는 초조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듯했고 종국에는 어쩌질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인선의 태도 변화에 놀란 신출내기 형사 인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휴지를 인선에게 건넸다.


“어떻게..저를 의심하실 수 있으세요? 흑흑... 남편한테 물어보세요. 끄억....저는 그 시간에 오빠랑 같이 있었어요.”

“저... 차인선 씨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절차상...”

“자, 차인선 씨 진정하시고요. 꼭 필요한 행정절차일 뿐입니다. 이쪽 병원에서도 무슨 일 생기면 매뉴얼대로 하시잖아요. 저희도 매뉴얼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심적으로 괴롭고 힘드신 건 알지만 정은 안 씨를 위한다고 생각하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이만식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자, 차인선은 눈물, 콧물을 닦은 후 깊은 심호흡을 하고 다시금 조사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조금 전 구인호에게 받은 취조에 가까운 질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시선은 줄곧 이만식에게 고정되었다.


“질문이 뭐였죠?”

“차인선 씨와 정은안 씨 사이에 최근 다툼이나 문제가 있었나요?”

“다툼이 있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요. 걔랑 저랑은 싸우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니에요!!”


강조하듯 눈을 부라리는 인선은 은안의 사망사건과 엮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싫은 지 기가 차다는 듯 이만식과 구인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지 매일 까먹고, 잊어먹고... 항상 일처리에 구멍이 있어서 제가 좀 많이 봐줬어요. 실수한 거 챙겨주고 틀린 거 지적해 주면서요. 그런 저한테 걔랑 다툼이나 문제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러면 차인선 씨는 정은안 씨한테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관계라고 볼 수 있겠네요?”

“뭐...그렇죠. 아무래도 신규고 모르는 게 많아서 실수도 많이 하니까요.”

“그러면 아무래도 정은안씨가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네요?”

“받겠죠!!!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집안이 금수저가 아닌 이상 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직장 생활하는 거죠. 제가 일 가르치면서 신규 스트레스 관리까지 해줘야 해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정은안씨가 사망하게 된 동기를 찾으려고 다각도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뻔하죠~! 자기 때문에 환자가 죽었는데 안 힘들고 배겨요? 아!.....”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순간적으로 저지른 말실수에 ‘아차’ 싶은 인선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으면서 인중과 턱이 맞닿은 하관이 잠시 두드러져 보였다. 두 형사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굴리는 눈동자는 조금 전 거칠 것 없던 모습과는 다르게 그 빛이 약간 사그라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은안씨 때문에 환자가 죽었다니?”

“………………”

“차인선 씨. 사람이 죽었습니다.”


차인선은 낭패감에 젖어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은 확실했고, 여기서 어설픈 거짓말을 했다가는 일이 더 꼬일 것만 같았다.


 “최근에 걔가 크게 투약사고를 냈어요. 그것 때문에 환자 사망하고 유가족 와서 중환자실에서 난리치고….휴~~~~ 걔 때문에 저희들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마 염치가 없어서 말은 못 했겠지만 걔도 그 사고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받고 힘들었을 거예요. 언젠가 한 번은 감기나 지병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약 먹는 것도 봤어요. 아마 우울증 약일 거예요. 제가 그 상황이라도 약 안 먹고 못 버티죠.”

“그럼 아까는 정은안씨한테 힘든 일 있는지 물어봤을 때 왜 모른다고 했습니까?”

“솔직히, 병원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마당에 저 같은 평간호사가 형사님들한테 말해서 좋을 게 뭐가 있는데요? 괜히 안 좋은 일 밖으로 새 나가게 했다고 나중에 수 샘이나 과장님한테 혼나기만 하죠.”


이제는 체념한 듯, 최근에 일어났던 투약사고에 대해 진술한 차인선은 귀찮은 일에 휘말려 짜증이 날 대로 난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원체 짜증이 많은 성격인 것인지, 아니면 망자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 때 같이 일했던 동료에 대한 애도나 슬픔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도의상 대놓고 좋아하지는 못하지만 성가시고 귀찮은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안심하는 모양새였다. 차인선과의 조사가 끝나고 다음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 구인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들어보니, 자살 동기는 확실한 것 같은데요? 보니까, 우울증 약도 먹은 것 같고요.”

“일단, 정은안 의료기록도 조회해보지. 유가족 연락은 어떻게 됐지?”

“지금 병원으로 오고 있답니다.”

“시신 확인시켜드리고 부검 조심스레 여쭤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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