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 더위 속 한낮 해를 품고 태어난 남편은 설거지하기를 좋아한다. 여름만 되면 팬티 한 장 위에 뭔가 하나 더 입기를 힘들어하는 그는 시원한 물장난을 끝낸 후에 마누라의 감사인사까지 받을 수 있는 설거지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런데 남편이 절대 씻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채반이다.
국수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점심으로 늘 국수를 먹어서 매일 한 번은 채반을 씻어야 하는데, 남편은 늘 그 채반만은 씻지 않고 남겨둔 채 설거지 끝~을 외치고 엄청나게 고단한 일을 끝낸 사람처럼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왜 채반은 씻지 않느냐고 남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남편의 대답은 이랬다.
“채반은 어떻게 씻어야 할 지 모르겠어. 세제를 묻히면 그 촘촘한 그물망에 걸린 세제들이 물에 잘 씻겼는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물로만 헹궈서는 안될 것 같고. 아무튼 아주 곤란한 놈이야.”
그러던 남편이 오늘은 그 채반마저 닦아 엎어 놓은 것을 보았다. 못한다 하던 걸 해냈기에 남편에게 "밤새 업그레이드된 거냐?" 물었더니, 그렇단다. 장난기 발동한 나는 "그럼 이제 버전 몇이냐?" 물었다. 그랬더니 글쎄, 버전 1.0이란다.
뭐라고? 이제 겨우 버전 1.0이라고?
속으론 버전 5.0쯤은 되려나 기대했던 나는 “나이 오십에 이제야 정식버전이 된 거냐, 그럼 어제까진 베타 버전이었냐” 물었더니 "아직 버그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 하며 웃는다.
베타 버전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함께 산 지난 20여년의 시간이 문득 휘리릭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스물다섯에 만나 3년 연애하고 결혼한 우리 부부. 맞벌이로, 해외출장으로 때론 1년에 6개월 이상 떨어져 산 적도 있지만, 힘든 일이 있어도 늘 유머를 잊지 않는 남편 덕분에 어려운 고고들을 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식버전 남편과는 오늘부터 1일. 앞으로 펼쳐질 더욱 멋진 날을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웃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