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주춤한 틈을 타서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반려동물 1천만 시대를 증명하듯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도너츠 모양의 머리를 한 귀여운 흰 강아지가 자주 눈에 띄는 걸 보면 요즘은 비숑이 대세인가 보다. 그런데 그들 사이로 땅에 닿일 듯 은빛 털을 길게 늘이고 주인을 따라 잔걸음을 치는 강아지가 보였다. “낑낑이다.” 나는 소리치며 그 강아지를 따라갔다.
낑낑이는 내가 중학생 때 엄마가 데려온 강아지다.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땐 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만큼 너무나도 작았다. 까만 실뭉치 같아 보이는 강아지가 행여나 밟혀서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나는 매일 안고 다녔다. 요크셔테리어라고 당시엔 보기 힘든 고급 견종이었고 족보까지 있는 아주 귀한 강아지라고 엄마가 말해주셨다. 진짜 이름은 ‘로자’였지만, 나는 ‘낑낑이’라고 불렀다. 너무 빨리 엄마개와 떨어져서인지, 늘 낑낑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멀리있는 학교에 다닌 탓에 방과 후 친구와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대학생인 언니는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늘 외롭고 심심하던 내게 드디어 함께 놀 동생이 생긴 거였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뭐든 낑낑이와 함께 했다. 내가 책을 읽을 때 낑낑이는 내 무릎 위에 앉아 낮잠을 잤고, 내가 피아노를 칠 때면 월월월~ 노래를 불러서 나를 웃겼다. 낑낑이를 안고 밖에 나가면 한번 안아보고 싶어 모두들 안달이 났다. 난 셀럽이라도 된양 한껏 으쓱했고, 낑낑이를 학교에 데려갈 수 없는 게 무척 아쉬웠다. 고3 수험생이 되어 새벽 공부를 하다 잠이 쏟아지면 나는 망설임없이 내 방 구석에 놓인 방석에서 쿨쿨 자고 있는 낑낑이를 흔들어 깨웠다. 낑낑이는 군소리 없이 내게 배를 내밀고는 내 졸음이 달아날 때까지 함께 놀아줬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내게 더 이상 낑낑이가 필요없어졌다. 낑낑이는 늘 하듯 내게 안아달라 달려들며 스타킹에 구멍을 냈고, 옷에 달라붙은 낑낑이의 긴 털들은 나를 창피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낑낑이의 방석을 거실로 내쳐버렸다.
회사원이 되어 야근과 회식이 잦았던 나는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면 자정이 가까워서야 돌아왔다. 숙취에 늦잠을 자던 어느 주말 아침, 나는 낑낑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비몽사몽간에 방문을 열어주니 낑낑이는 아주 아주 느린 걸음으로 내 방에 들어와서는 나를 향해 배를 내밀었다. “낑낑아,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윤기 하나 없이 부스스한 털을 손가락으로 빗질해주며 배를 만져주는데, 배에서 이상한 덩어리들이 만져졌다. “종양 덩어리래. 노견이라 수술도 안된데.”라며 엄마는 울먹였다. 그때 낑낑이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날 나는 낑낑이의 배웅을 받으며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은빛 긴 털을 우아하게 흔들며 멀어져 가는 요크셔테리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옆에 있던 남편이 깜짝 놀라며 갑자기 왜 우냐고 물었다.
집밖 생활이 다채로와진 내가 외톨이던 시절 내 곁을 지켜준 낑낑이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마음이 쓰라렸다. 나는 낑낑이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낑낑이의 배에서 종양을 처음 보았던 주말 아침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취소하고 낑낑이와 예전처럼 실컷 놀고 싶다. 내가 피아노를 치면 낑낑이는 월월월~ 이상한 노래를 하겠지. 낑낑이를 안고 외출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우릴 부러워할 거야. 그러다 피곤해지면 난 책을 읽고 낑낑이는 내 무릎에 누워 쉬다가 잠이 들 거다.
“낑낑아, 언니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지. 정말 미안해. 내가 외롭지 않게 내 동생도 되고 친구도 되어줘서 고맙다. 사랑한다, 내 동생 낑낑아.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