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친정에 갔다가 집안 구석구석 바닥에서 천정까지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웠던 건 집안이 물건들로 빽빽이 들어차 편히 앉을 공간조차 찾기 어려운 이 상황이 엄마와 아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의 일상이라는 사실이다.
친정집엔 늘 물건이 많았던 건 맞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봐도 우리 집은 좀 정신이 없이 어질러져 있었던 것 같다. 그땐 내가 어려서 잘 느끼지 못했는데, 내 기억 속에 낮잠을 자는 엄마는 있어도 청소하는 엄마는 없다. 화장하는 엄마는 있어도 정리하는 엄마는 없다.
초등학생 시절 활동적이지 않았던 나의 주 놀이터 중 하나는 엄마 화장대였다. 거울에 붙어 있던 엄마의 새치를 크리넥스로 훔치고 화장대 위에 놓여있는 로션과 스킨들의 자리를 조금씩 바꿔가며 바닥에 앉은 먼지를 치운 후 키순서대로 정렬했다. 화장대에 붙어 있는 두 개의 서랍을 차례로 뒤집어 어떻게 그 속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먼지들과 허연 가루들을 닦아 버리고, 서랍 속 립스틱과 펜슬, 이름을 알 수 없었던 뚜껑이 사라진 색조화장품 케이스들을 그저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면 환했던 안방이 어둑해져 있곤 했다.
나에겐 화장대가 따로 없다. 지금은 화장을 하지 않으니 필요도 없지만, 화장을 하던 때에도 내겐 화장대라는 게 필요하지 않았다. 로션 한 개, 스킨 한 개 그리고 콤팩트 한 개, 마스카라 한 개, 펜슬 두 자루, 립스틱 서너 개만 있으면 그 어떤 색조화장도 할 수 있었다. 이 정도의 것을 놓기 위해 별도의 거울 달린 가구를 좁은 방 안에 세워둘 필요가 있을까. 화장을 해야 한다면 화장실의 커다란 거울 앞이 적격일 게다.
검은색 자개로 된 엄마의 화장대를 다시 떠 올려보자. 엄마의 화장대는 왜 그렇게 가득 차 있었을까. 눈을 감고 그때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알았다! 엄마의 화장대 위엔 로션이 서너 개, 스킨도 서너 개 있었다. 왜? 똑같은 로션이 두 개 있는 경우도 있었다.왜? 그때는 1+1으로 물건을 팔 정도로 물자가 흔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엄마는 왜 그렇게 많은 화장품을 두고 썼을까? 우리 집이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었는데. 부자였다 치고 같은 화장품이 세 개일 수 있다 쳐도, 왜 엄마는 그 로션들을 다 꺼내놓고 썼을까? 한 개만 꺼내놓고 쓰다가 다 쓴 다음 새것을 꺼내 쓰면 되지 않을까?
친정집의 물건들이 내 목구멍에 걸려 며칠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니 매사에 짜증이 나고 별일 아닌데도 신경질을 내게 됐다. 남편이 이런 나를 감지하고 제안을 했다.
"장모님께 말씀드려봐. 계속 집안에 물건이 쌓이니 명절에도 자고 갈 수도 없고 식구들이 편히 앉아 있을 데도 없으니 점점 가고 싶지 않다고."
이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면 여고생의 감성을 아직 벗지 못한 엄마는,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말라,며 삐칠 게 뻔하다. 하고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상책.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일. 내 목구멍의 가시는 아직 빠질 기미도 내려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Maximalist 엄마와 Minimalist 나
어쩌면 좋단 말인가!
추석 연휴 마지막날 엄마랑 크게 싸우더라도 무조건 대청소를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친정집에 다시 방문했다. 내 손에 들린 청소 도구와 비장한 얼굴표정을 본 엄마는 평소와 달리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내게 집을 내주셨다.
청소 후 번듯해질 친정집을 상상하며 신이 나서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책장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서류봉투가 눈에 띄였다. 내용물을 확인하고 버릴 심산으로 서류 안을 들여다 보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엄마! 이게 다 뭐야? 하고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서류봉투 안에는 나의 대학입학 수험표와 대학입학요강, 고3 시험 성적표와 상장들, 그리고 어버이날이면 담임선생님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써야했던 손발이 오글거리는 감사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비명에 가까운 내 목소리에 엄마는, 왜, 왜, 무슨 일이야? 하시면 헐레벌떡 달려오셨다.
"왜 이딴 걸 지금까지 갖고 있어? 이러니 집안이 쓰레기장 같지."
엄마는 아무 댓구없이 내 손에서 서류봉투를 낚아채 다시 책장 위에 올려놓으시곤 다시 거실로 나가 버리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의식하고엄마를 좇아 거실로 나왔다. 엄마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눈에선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니가 잠도 못자고 공부하느라 얼마나 고생해서 들어간 대학이니. 대신 공부해 줄수 있나, 엄마는 매일 노심초사였어. 그때 생각하면... 그래서 그건 못 버려. 절대."
그러고 보니 친정집을 채우고 있는 낡고 먼지 쌓인 것들엔 모두 사연이 담겨 있었다. 내 고3시절 역사 봉투 옆에는 서른도 안된 오빠가 사업을 하겠다며 만들어댄 사업계획서와 회사 홍보물 쪼가리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뿐이랴. 언니, 오빠, 나의 청첩장들도 봉투에 담겨 줄지어 책장에 서 있었다. 내 눈엔 내다버릴쓰레기로 보이는이것들이 엄마의 눈엔 엄마가 이겨낸 세월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념품들이었다. 엄마의 먼지 쌓인 짐들 속엔 내가 모르는 보석들이 숨어서 반짝거리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목에 박혔던 가시가 쑥 빠진 것처럼 시원해진 느낌이들었다, 엄마의 훌쩍임이 잦아들었다.
"엄마, 나 배고파. 점심 먹으러 나가요."
청소는 무슨. 엄마랑 시원한 냉면이나먹으면서 그 동안 엄마에게 짜증냈던 거 사과해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