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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Jan 20. 2020

오늘, 밥값은 했습니까?

저는 밥 먹을 가치가 없어요

  지난 연말의 어느 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듣게 된 수상 소감에 격하게 공감하게 됐다. 여배우는 울면서 "촬영 현장에 갈 때마다 밥값은 하고 있는지 힘들었는데"로 시작하는 말을 했는데 이 구절이 오랫동안 내가 해왔던 생각이랑 똑같아서 잠시 멈춰 멍하니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발령을 받고 나서 보니 중학교에서는 시험 기간에도 꼭 아이들이 점심을 먹고 하교하도록 하고 있었다. 4교시 이전에 시험이 끝나기 때문에 밥을 안 먹고 하교하는 편이 아이들에게도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디 학교나 점심을 먹게 하고 종례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하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는 학부모님들의 요청이 많았다는 게 이유라고 했다. 그런데 교실에 가보면 꼭 점심을 안 먹고 남아있는 아이들이 있다. 저마다 이유는 다양했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으려고(너무 행복한 이유), 배가 안 고파서(배부른 이유), 다이어트 중이라(언제까지 안 먹으려나), 그 와중에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아이들이 가끔 있는데 그 아이들은 왜 밥을 안 먹냐고 물어보면 울상을 하고 이런 말을 한다. 

 

 "저는 밥 먹을 가치가 없어요."


 그날의 시험을 망치고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이까짓 시험이 얼마나 가벼운 건지 우리의 목표는 결국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거라고 애써 우스갯말을 늘어놓고 급식실로 등을 떠밀기는 하지만, 밥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말이 스스로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진다.


오늘, 밥값은 했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소중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공부가 인생에 전부는 아니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이런 말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적지 않은 선생님들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줄 세우기에만 바빴고 어떻게 해서라도 시험을 잘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소란스러운 교실에 들어온 담임선생님은 "00이 서울대학교 가야 되는데 너네가 이렇게 떠들면서 방해를 하면 어떻게 하냐?"라고 이야기했고, 공부를 잘하는 친구와 내 보고서 내용이 같았을 때 선생님은 묻지도 않고 내가 친구 것을 베꼈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게 학창 시절 선생님들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부모님은 예나 지금이나 부족하지 않게 나를 사랑해주셨다. 시험을 못 봤다고 혼내거나 공부를 하라고 닦달하신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시험을 못 보고 점수가 안 나오면 '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다'는 생각을 종종 했던 것 같다. 


 스무 살 때 돈을 벌기 위해 동네 볶음밥 집에서 서빙 알바를 세 달 정도 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돈 버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걸 뼈 속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돈을 쓰러 갔을 때와 돈을 벌러 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사장님이 볶음밥 그릇 세 개를 한 번에 드는 걸 연습하라고 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너무 당당하게도 그냥 빨리 한 번 더 왔다 갔다 하겠다고 말했었고, 결과는 보나 마나. 사장님은 내가 반항하는 걸로 보였는지 몹시 기분 나빠하셨다. 나는 다른 뜻은 없었고 손가락도 짧고 손도 작아서 여러 개를 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 빨리 한 번 더 왔다 갔다 하겠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힘들었다. 알바를 가기 싫었다. 그런데 수능이 끝나고 나서의 백수 생활 밥값을 하기 위한 의무감 때문이었는지 대학교 입학 전까지 꾸역꾸역 결국 알바를 해냈다. 당시 시급은 3천 원. 그 이후엔 친구들이랑 맛있는 걸 먹으러 가면 가격부터 보게 됐고 이 음식이 나의 몇 시간인지 계산을 하게 됐다. 


 뭐니 뭐니 해도, 자존감이 바닥을 지나 지각을 뚫고 맨틀을 지나 핵에 도달할 것 같았던 때는 수험생 시절.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경제적 능력이 없어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쓰던 시절. 매일 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부러 늦게 일어나 한 끼를 건너뛰기도 했던 웃픈 기억이 있다. 어쩌다가 용돈을 모아 오랫동안 먹고 싶어 했던 치킨이나 피자를 사 먹은 날이면 왠지 모르게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서 보시기 전에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기도 했다.(이유는 무엇이든 엄청 많이 먹은 것이 결과) 수험생이라고 면박을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도 뭐가 그렇게도 다 눈치가 보이고 서럽고 나 자신이 작아 보였는지. 





 당당하게 밥값은 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 내가 한 밥값은, 작정하고 집안일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집에 남아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한 일은 빨래 3번 돌리기(벼르고 별렀던 발판도 드디어 빨았다!), 진공청소기 돌리기, 화장실 청소, 가습기 청소, 침구 청소기 돌리기였다. 내 딴에는 한다고 했던 청소가 끝나고 뒤돌아 보면 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무선 청소기를 가져와 그 부분을 다시 청소하고 또 뒤를 돌아보면 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머리숱도 별로 없는데 머리가 너무 많이 빠진다. 집안일은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확 난다는 말이 실감 났다. 엄마들은 치우고 치워도 어느새 금방 더러워진 집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이 밥값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자책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밥값도 못해, 나는 밥 먹을 가치도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람은 누구나 소중해."라는 말처럼 뜬구름 같은 단어들은 조금도 와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밥을 안 먹으면 나중에 병원비가 더 드니까 일단 밥을 먹자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일단 밥을 먹고 내일은 밥값을 하자고 해야 할까.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이걸 보고 여러 사람이 끼니를 걸렀다고 한다 (출처: @이지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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