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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Jan 27. 2020

왜 나는 명절마다 아플까

남편은 내 증상이 '명절증후군'이라고 했다

 솔직히 고백해본다. 나는 연애 때 남편 집안의 명절 풍경을 듣고 어쩌면 그 이유로 조금 더 결혼을 망설였었다. 결혼 전 나는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어가면서 명절 도로 상황에도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고 점점 간소화된 제사상에 명절은 쉬는 날이라는 생각을 살짝 가지게 됐었다. 그런데 남편이 이야기하는 명절 집안 풍경은 들을수록 나를 겁먹게 했다.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우리 집은 교자상을 3개 붙인다'였다. 우리 집에서 사용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긴 교자상을 생각한 나는 그걸 세 개 붙인다는 게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두 번째로 들었던 이야기가 '전 종류가 10가지가 넘는다'였다. 헉!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남편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시댁의 교자상은 직사각형 모양이 아니고 정사각형 모양이라는 것. 정사각형 모양의 교자상을 3개 붙여 제사를 지내니 보통 규모보다 1.5배 정도라고 하면 될까. 3배를 떠올렸던 나는 실제 제사상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전 종류가 10가지가 넘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근에 종류를 몇 가지 줄였다는데도 10가지는 훌쩍 넘어갔다. 명절 전날 아침 일찍부터 어머님과 작은어머니들이 모여 앉으셔서 12 종류의 전을 부쳐내고 계셨다. 고기전, 생선전, 산적, 고구마전, 우엉전, 연근전, 버섯전, 두부전, 동그랑땡, 파전, 부추전, 시금치전, 이렇게 12가지 종류의 전이었다. 심지어 나는 우엉전, 시금치전 같은 종류는 처음으로 접해보는 거였다. 가족들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양도 어마어마했다. 


 잔뜩 긴장해서 갔던 결혼 후 첫 명절,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니들은 첫 명절에는 일하는 게 아니라면서 부엌에 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번 다섯 번째 명절까지도 계속, 보실 때마다 부엌 밖으로 나가서 쉬라는 말씀만 반복하신다. 내보내시니 부엌 밖으로 나가기는 하는데 방에만 앉아있기도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배려해주시니 감사하기도 하면서, 30년 넘게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니들만 떠안고 있는 저 많은 음식에 숨이 막힐 것도 같으면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전을 앞에 놓고 앉아있긴 하지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아들만 있는 시어머니는 딸 가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며 웰컴 투 시월드, 동치미 같은 프로그램을 일부러 챙겨보셨다고 하셨다. 게다가 명절에 대한 반감이 무지 심한 남편의 사촌 동생은 명절에 드러나는 남녀의 역할에 대해 불합리하다며 수시로 거품을 물고는 한다. 그래서 형님과 내게는 일을 안 시키시려고 하시는 걸까. 단순히 내가 복이 많은 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하시지만 어쩌다가 형님이 먼저 자리를 잡고 계시면 슬그머니 가서 눈치껏 조금씩 일을 도왔다. 지난 명절에 처음으로 설거지를 하는데 그릇이 정말 많기는 많더라. 식사한 인원만 해도 20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형님이랑 같이 설거지를 하는데 쌓인 걸 끝내면 뒤에서 또 넘어오고, 끝내면 또 넘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었다. 키에 맞지 않는 싱크대는 또 왜 이리 불편한지. 사실 설거지를 시작하기 전부터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좀 안 좋았는데 빨리 끝내고 쉬자는 생각으로 말도 없이 열심히 그릇을 헹궜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속도 불편한데 점점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갑자기 입이 마르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쓰러져도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형님한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갔다. 동네에 있는 카페에 가서 앉는 순간 마음이 왜 이렇게도 편해졌는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몇 분을 쉬다가 겨우 돌아온 게 지난 추석이었다. 


 이번 명절은 더 스펙터클했다. 전날 저녁에 덜 익은 순대를 먹은 것부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코스트코에서 산 냉장 순대가 유통기한이 다 되어간다며 안 땡기지만 저녁을 순대로 먹기로 했는데, 늦은 시간에 마음이 급해졌던 우리는 푹 익지 않은 상태로 순대를 몇 점 먹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늦잠을 자버려서 아침을 못 먹은 상태로 바로 시골집에 갔고 점심으로 먹은 게 전이랑 떡이었다. 빈속에 기름진 걸 먹으면 안 좋다는 건 어린이들도 다 아는 사실일 텐데 나는 너무 배가 고팠을 뿐이었다. 작은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비어있는 자리에 형님이랑 내가 들어가서 전 부치는 일을 처음으로 도왔다.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뒤늦게 합류해서 전 부치는 일을 도왔을 뿐인데 바닥에 앉아서 프라이팬에 집중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속도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전을 다 부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남편이랑 나가서 활명수를 사 먹고 카페에 가서 에이드도 마셨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계속 속이 좋지 않았다. 일찍부터 누워서 버티고 참아보는데 바닥도 딱딱하고 미칠 것 같았다. 머리에 손도 올려보고 두 손으로 머리를 안마도 해보고 열심히 손을 지압해보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눕는 순간 토해버릴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동네에 카페가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명절 때문에 이디야 멤버십을 만들어야 할 판, 흑흑 


 조금만 늦었으면 안방에 큰일을 치를 뻔했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작은어머니, 건넌방에 계시던 작은아버지들까지 깜짝 놀라 다 나오셨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만한 여유도 없었다. 시원하게 토해버렸다. 다음 날까지 몸이 계속 안 좋았던 나는 결국 새해 첫날 떡국 대신 죽을 먹으며 환자 대접을 받았다. 흑흑. 시어른들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왜 나는 안 괜찮으면서 괜찮다는 대답을 했을까. 밤새 잠이 그렇게도 안 오더니 다음 날 낮잠은 어찌나 쏟아지는지, 푹 자고 일어나니 갈 시간이 되었다.



명절증후군



 남편은 제사가 끝나고 내 안색이 확연히 좋아졌다며 이건 <명절증후군>인 것 같다고 했다. 명절 때 받는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육체적, 정신적 증상. 대표적으로 두통, 어지러움, 위장장애, 소화불량과 같은 신체적 증상. 헉, 작년부터 겪은 내 증상이랑 똑같다! 그런데, 나는 명절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늘 이렇게나 배려해주시는 어른들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일을 하면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겠지만, 일을 안 하는데도 마음은 많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나. 아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평소에 내가 이 정도로 약질은 아니지 않았나. 




 명절증후군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검색해보니 스트레칭을 자주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란다. 일단 이번 명절 소화불량의 문제 원인은 알 수 있는 것 같아 남편은 다음 명절부터 나를 일찍 깨워 아침밥을 꼭 먹이겠단다. 규칙적인 식사를 하면 괜찮을까. 그보다 아직 내가 시댁에서의 분위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탓이 크지 않을까? 다들 잘해주시고 이젠 편해졌다고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답지 않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시간들이 긴장되고 부담스러운 걸까. 긴장하고 있다는 건 은연중에 시가족 앞에서 흉 잡히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왜 나는 잘 보이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 아직 며느라기 시절이란 말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명절이 끝나 몸도 마음도 그저 편안한 밤이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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