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이런 족속이 다 있어, 낼모레면 황천길 갈 쭈꿀탱이 늙인이가 멋을 부려도 유분수지. 자식들이 고생해서 버는 돈으로 용돈 주면 실속 있게 쓸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지내냐는 내 안부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아버지가 새로 산 베레모와 옷들이 어떤 색깔과 모양인지 고자질하듯이 늘어놓았다. 엄마의 목소리는 간헐적으로 멀어지다가 크게 들리곤 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장롱 속에 감추어둔 물건들을 뒤적일 때 전화기를 내려놓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었을 것이다. 못 보던 것을 장롱 속에서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엄마의 목소리는 큰 재난상황을 중계하는 뉴스의 리포터처럼 격하고 높아졌다.
“엄마, 이제 그런 거 때문에 아버지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지난번처럼 또 단식하시면 어쩌려고요. 원하는 옷들 있으면 맘껏 사시게 하세요”
이십여 분간 엄마와 통화한 후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의 성장기억에는 멋을 부리는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는 엄마의 타박은 흔한 일상이었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얼마나 많은 옷을 샀는지, 엄마의 과장된 표현대로라면 엄마가 하나 살 때 아버지는 천벌의 옷을 장만했단다. 비가 오는 날이나 농사일이 한가할 때 엄마는 늘 장롱을 정리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비밀은 엄마의 손에 여차 없이 까발려졌다.
학교를 파하고 장터 앞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저만치에서 멋진 신사와 몸빼바지를 입은 농촌 아낙이 머리에 큰 보따리를 이고 걸어오는 것을 자주 보곤 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몸빼바지 아낙의 양손엔 무엇인가 가득 들려 있어 걸음걸이조차도 무거워 보이지만 그 앞에는 줄이 올곧이 세워진 양복바지 신사가 마치 시녀라도 거느린 왕처럼 도무지 아낙의 무거운 짐은 개의치 않고 여유 있게 걸었다. 그것은 어린 나에게는 마치 아이러니한 그림 한 폭을 보는 것처럼 우습기도 한 기억이기도 했고 신사에 대한 미움이 작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들을 알아보는 동네 아줌마들이 몸빼바지 아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형님, 그게 먼 고생이래요. 서방님한테 짐 좀 넘겨주지 팔뚝 부러지겠어.”
그러자 신사는 아낙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으려 했지만 아낙은 신사의 양복이 혹여 때 타면 세탁비가 곱절은 될 것이라고 막무가내로 짐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낙의 옆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면서 두 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들을 받아 들었다. 엄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한 번이라도 아버지가 봐주기를, 저렇게 멋만 부리지 말고 다른 아버지들처럼 편안한 옷차림으로 엄마의 무거운 짐을 들어준다면 엄마도 오일장에 나올 땐 여느 아낙네들처럼 꽃무늬 원피스를 입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옷매가 남다르다고 했지만 오히려 난 그런 아버지가 시골장에 어울리지 않게 차려입는 것이 창피하기까지 했다. 허례허식으로만 꽉 차 있어 제 안 사람조차 보듬지 못하는 인정 없는 남편으로만 여겨졌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에서야 그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었고 엄마의 잦은 타박에 늘 아버지를 두둔하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네 아버지한테 무조건 시집을 가라고 했을 때 밥까지 굶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일하는 사람 네댓씩 두고 사는 소문난 부잣집, 우체국장 아들이라나. 서울 큰 회사에서도 잘 나가는 인재라고 하더라. 내 나이가 그때 열여덟이었는데 신랑이 서른이 다 됐다고 하니 돈에 눈이 멀어 늙은 총각한테 날 판다고 가출까지 하려 했었지. 그런데 혼삿말이 오간 지 채 달도 안돼서 그 총각이 우리 집엘 찾아왔지 뭐냐. 양복을 쭉 빼 입고 동네 느티나무에 들어서는데 동네 처녀들이 집집마다 대문에 서서 입을 벌리고 봤어. 영화배우처럼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옷도 폼나게 입고 나타난 남자가 내 신랑이 될 사람이라고 하니 얼마나 심장이 뛰던지. 그 신사의 목소리는 어쩌면 그리 중후하고 감미롭기까지 했는지 내 혼을 쏙 빼놨지. 그 뒤로는 울지도 않았고 가출하려 했던 마음을 깨끗이 접었어. 세상에, 그리 멋있는 사람을 내 생전 본 일이 없없어. 식 올리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양복 입은 네 아버지 모습이 어째 그리 밤마다 어른거리던지….”
잊을만하면 수없이 반복해서 듣던 엄마의 전설 같은 결혼이야기다. 그 멋진 신랑감이 종갓집 칠 남매의 장남에다가 그이의 엄마가 막내를 임신 중이고, 우체국장이라는 사돈 재목이 노름에 빠져 전답이 다 넘어갈 위기라는 소식을 들은 외할아버지가 혼사를 깨자고 했을 때 엄마는 오히려 이미 혼사가 왔다 갔다 했으니 절대 그럴 수 없다, 그 집으로 시집을 가겠노라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멋진 신랑이 큰 버팀목이 돼 주리라 믿고 있는 한 외할아버지가 걱정하던 시집살이나, 고생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증조부모, 조부모, 어린 삼촌들과, 고모들의 끼니를 챙기는 일부터 수십 번의 시사를 지내는 일까지도 오로지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의 몫이었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엄마를 시부모와 다른 가족들에게 남겨두고 따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해서 한 달이면 한 두 번 얼굴을 보기만 했을 뿐 정작 모진 일을 겪을 때마다 의지할 위인이 되질 못했다. 할아버지의 도박으로 인해 급기야 집안이 파산에 이르렀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곳으로 빚쟁이들이 몰려오면서 소위 잘 나가던 아버지의 앞길이 막혀 버렸다. 월급을 차압당하고 나니 처자식과 아직 출가하지 못한 동생들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던 아버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을 선택했다. 내가 바로 태어나던 해, 그때 아버지가 불혹을 갓 넘긴 나이였다. 집안 어르신들이 도지를 무는 조건으로 마련해 준 전답을 일구고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시에서 팬만 굴리던 아버지에겐 역부족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배우면서 짓는 농사일,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충을 어찌 설명하겠는가!
그러는 와중에도 아버지는 외출을 할 때면 환골탈태한 모습이 되었다. 입는 옷마다 다림질도 완벽하게 하고 양복을 입을 땐 세련된 넥타이와 핀도 잊지 않았다. 구두머리도 윤기가 줄줄 흐르게 닦고 신었다. 그렇게 성장을 하고 나서는 아버지에게 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곤 했다. 엄마는 그런 사람들이 시선이 불편해지더라는 것이다. 졸지에 가난한 농부가 된 마당에 그런 멋 부림은 사치이고 주위사람들이 겉으로는 멋있다고 치켜세워줘도 속으로는 주제도 모르는 인간이라 흉을 본다는 것이 엄마의 이론이었다. 빠듯한 살림에도 아버지는 어찌 돈을 융통해서 유행하는 남방셔츠, 바바리코트, 신발 등을 사들였다. 여간해서 십원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던 엄마는 이내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그것으로 인해 잦은 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중학교를 갓 입학했을 때 가정상담을 이유로 부모님 중 한 분을 학교에 모셔오라는 담임선생님의 권고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이 옷 저 옷 몇 번을 갈아입었는지, 사랑방 바닥이 옷으로 꽉 차 있었다. 담임 선생님을 만나는 중요한 날인 만큼 완벽하게 차려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늑장을 부리다 아침 등교버스를 놓쳐 버렸다. 그때 우리가 살던 시골에선 그 버스를 못 타면 십리길을 걸어 학교에 가야 해서 나는 잔뜩 짜증을 냈다.
아버지를 모시고 교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저만치서 교장선생님이 반색을 하며 아버지 쪽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그의 인사는 나라의 대통령이라도 만난 것처럼 절대적으로 공손했다. 교장선생님의 깍듯한 예우에 교무실 안의 모든 선생님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잘 차려입은 신사를 대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하도 공손해서 다른 선생님들은 아버지가 교육청에서 시찰 나온 장학사로 오해를 했다고 한다. 그날 나를 위한 가정상담은 뒷전이었고 아버지와 교장선생님의 해후로 담임선생님과 나는 그들의 수다를 경청하는 들러리처럼 앉아있었다. 명문학교 선후배사이인 두 사람은 아버지가 귀향을 하기 전까지도 동문모임에서 만나곤 했단다. 그 뒤로는 일상이 달라진 아버지가 지인들을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어 십여 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그들의 수다에 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교장선생님이 얼마나 고생이 심하냐,라고 물었고 무슨 고생이냐면서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쓸쓸하고 고독한 얼굴이었다. 사람이 웃고 있어도 지독하게 슬퍼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워낙 인물이 좋고 차림새가 좋아서 누가 농사꾼이라 보겠냐는 교장선생님의 농담에 아버지는 농사일을 잠시 놓고 외출을 할 때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고 답문 했다. 열심히 꿈을 향해 앞만 보고 가던 그 시절로. 아버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내 가슴에는 울컥 깊은 슬픔이 차올라왔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이루고 싶었던 일들, 지성과 열정이 넘쳐나던 젊은 시절 당신의 모습을, 행복한 그때의 시간들을 아버지는 멋진 옷을 입음으로써 반추하고 신산스럽고 고단한 농부의 삶을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실속 없이 허세가 많아 멋만 부린다고 오산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버지를 닮았으면 전교 일등은 맡아놓은 자리겠네,라고 교장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와락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엄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가 새로 사들인 옷을 보면 격하게 흥분을 한다. 아버지는 인생의 말로에 서 있는 지금에도 아버지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암탉처럼 쪼아대는 엄마에게 암묵리에 시위를 한다. 굶기. 팔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 하루 이틀 단식 시위를 하면 속이 타들어가는 건 엄마이고, 칼로 물 베기 같은 충돌은 아버지의 완패로 끝이 난다. 그런 일을 반복해서 겪었어도 엄마는 엄마대로 아버지에 대한 타박을 멈추지 못하는 억울한 이유가 있었다. 궁핍하게 산 시절에 아버지가 옷과 구두 살 돈만 아꼈어도 큰언니와 둘째 언니가 편하게 고등학교를 다녔을 거라고. 귀한 자식들이 집안 형편 생각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 다니느라 코피를 쏟고 손이 부르트는 것을 보고 있자니 양복 입은 번듯한 모습에 반해서 결혼 결심을 한 당신 스스로가 못나고 어리석은 생각이 들어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잘 차려입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새 옷들이 장롱 속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엄마는 그 억울한 심정을 아버지에게 심술부리듯 토해내는 것이었다.
나와 통화를 마친 엄마는 지금쯤 아버지가 사다 숨겨 놓은 옷들을 마룻바닥에 펼쳐놓고 이 화상,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면서 벼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사랑으로 대피를 하고 엄마의 잔소리가 길어지면 참다못해 문을 잠그고 단식투쟁을 불사할 것이리라. 보지 않아도 뻔한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릴 적에는 두 사람의 그런 다툼에 나마저도 시무룩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감사해한다. 어찌 됐든 멋쟁이 신사한테 반해 혼인한 엄마와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이루지 못한 꿈들을 되새김질하는 아버지는 무수한 세월의 굴곡을 동행하여 이제는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엄마의 심술과 아버지의 단식, 그들의 끊임없는 충돌은 두터운 나이테가 자리 잡은 고목처럼 의연하고 단단하여 어떤 흔들림이 없는 사랑이 된 것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최고 멋쟁이다. 흔히 요즘세대에 유행하는 말을 쓰자면 패션니스타. 베레모를 쓴 아버지의 뒤태는 어느 젊은 사람 못지않게 꼿꼿하고 세련돼 보인다. 그런 반면 엄마는 몸빼바지만큼 편하고 실용적인 옷이 없다고 예찬한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을 하는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은 생뚱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삶을 보아온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