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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순간이 영원으로 기억된다

part 3. 일찍 깨달았다면 훨씬 괜찮았을 말들

그렇게 5분 정도 명상에 빠져들면 무언가 에너지가 꽉 차오르면서 

가슴이 환해졌고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그 느낌이 너무 감미롭고 따뜻해 마치 필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필자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가을비도 

모든 것이 괜찮다며 필자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와는 전혀 상반되는 느낌을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겪는 인생의 시련이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지면서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치유되는 경험이었다.     

 

좋은 느낌이 특별한 인생을 만든다, 이장민 지음, 이담, 9쪽 



    

‘행복한 눈물’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팝아트 거장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명이다. 우리에게는 십수 년 전 어느 대기업의 비자금 문제로 뉴스에 거론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는 커다란 눈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그렁그렁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너무도 인상적인 여성이 만화처럼 그려져 있었다. 울기 직전이었지만 두 손은 무엇에 놀란 듯 양 볼을 감싸 쥐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환희에 가득한 표정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행복한 눈물은 어떤 눈물일까?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는 건 어떤 때일까? 미인대회에 1등으로 호명된 참가자가 터뜨리던 그 눈물일까? 아, 나도 그런 감격적인 순간을 한 번쯤 맛보았으면 좋겠어. 그런 순간이 나에게도 올까...’     


TV 화면을 통해 화제의 그림을 물끄러미 보던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혔고, 어느덧 ‘살면서 행복한 눈물을 한 번쯤은 흘려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으로 이어졌다.  

   

친정엄마, 늦둥이 아이, 남동생 내외와 함께 놀이공원에 놀러 간 어느 날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애초에 가기로 했던 과학관은 문이 닫혀 있었고 갈 곳을 몰라 잠시 방황하던 일행은 예정에 없던 근처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을 인원수대로 끊었다. 작년 이맘때 가본 기억과는 다르게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로 멀찌감치 띄엄띄엄 줄을 서야 했지만, 주중이라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몇몇 놀이기구는 아예 가동하지 않거나 롤러코스터처럼 보기에도 아슬아슬해서 아직 어린 나이의 아들과 다 같이 탈 수 있는 놀이기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이윽고 겁 많은 나와 조심성 많은 아이가 동시에 타도 괜찮겠다 싶은 걸 발견했다.   

   

동그란 원반에 두 자리씩 마련된 탈 것은 월미도의 ‘디스코 팡팡’처럼 생겼지만 마주 보며 타는 형태가 아니라서 중간에 큰 이변(?)은 없어 보였다. 먼저 착석한 동생 내외의 등을 보며 아이와 뒷자리에 올랐다. 혹시 몰라 바깥 자리에 앉은 나는 아들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우리는 빙글빙글 한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져 약간 무섭기는 했지만 ‘우와!’ 정도였지 ‘엄마야!’라고 비명을 지를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신나는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빙글거리던 놀이기구가 맥없이 멈춰 섰다. ‘이게 뭐지? 벌써 끝난 거야?’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던 차에 갑자기 ’착‘ 소리를 내며 머리 위로 비닐 장막이 씌워졌다.     


“형님, 키스타임이에요. 뽀뽀하세요!”      


장막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올케가 뒤돌아 앉아 우리 쪽으로 소리치는 게 들렸다.


‘뭐, 키스타임이라고?’  

   

상큼한 오렌지 빛이 아닌 칙칙한 주황빛의 비닐 천으로 느닷없이 둘러싸인 공간은 아늑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흡사 동네 허름한 포장마차 안이라고 하는 편에 더 가까웠다. 별안간 바뀐 음악은 감미로웠지만 그다지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이 마주친 아이와 나는 킥킥거리며 마스크를 쓴 입술을 마주 댔다.      


예상치 못한 뽀뽀 타임을 마치자 펄럭거리며 지붕을 만들어준 그 천이 쾌쾌한 먼지 냄새를 풍기며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도 그득하니 뒤따를 것만 같았다. 커다란 원반은 다시 물결을 타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을 돌았다.   

   

‘작년에는 같이 놀이기구를 타지도 못했는데... 녀석이 많이 컸구나.’   

  

여기저기 정처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를 쫓아다니느라 같이 놀러 간 것이 아니라 유격훈련을 받는 것만 같았던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잠자코 옆자리에 타고 있는 아이가 한층 의젓해 보였다.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는 ‘장난스러운 키스’를 나눌 정도로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문득 아이를 옆에 두고 빙그르르 돌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끝도 없이 굴러가는 것도 같다가 이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오래 기다려 13년 만에 어렵게 만난 아이가 벌써 이렇게 성장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 이게 바로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느낌이구나. 이게 바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그 짧은 찰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확정 짓는 감격의 순간, UN 연설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영광의 순간만큼이나 행복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부푼 가슴, 촉촉해진 눈시울을 바람을 타고 느끼며 한 손으로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고 또 한 손은 이 모습을 근처 벤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눈 침침한 친정엄마를 향해 가능한 한 크게, 크게 흔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음을, 소중한 사람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이 새삼스러워 코끝이 찡했던 그 순간이 사소하지만 위대한 인생의 한 토막으로 기억될 것 같다. 비록 평소에는 그 기억을 까맣게 잊은 채 아이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버럭하고 숙제 좀 제발 하라며 화도 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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