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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에 Sep 19. 2020

작은숲 산책

하루 40분 산책이 가져온 변화

작은숲 산책로


집 가까이에 작은 산책로가 생겼어요.

비록 한쪽은 지하철이 다니고 또 한쪽에는 차가 다니는 대로변이기는 하지만 나무들이 있고 흙을 밟을 수 있으며 별다른 준비없이 나갈 수 있어 소중한 곳이죠. 이 곳에서 두달 전부터 자폐범주성장애를 가진 딸 아이 제이와 산책을 합니다.


제이가 치료 센터 주차장에서 낮게 나는 헬리곱터 소리에 놀란 이후로 오토바이 소리를 무서워하게 되었어요. 동네 마트를 가려고 해도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놀라 제대로 걷지를 못할 정도로 심했죠. 그래서 감각통합에 좋다는 등산을 하자니 부담스러워 대신 적당한 소음과 가까운 위치의 산책로에서 산책을 하기로 했어요. 우리는 그 산책로를 작은숲 산책로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하루 40분 숲 산책하기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 제이의 변화를 가져온 작은숲 산책로는 더없이 소중한 곳이 되었어요. 제이에게 필요하던 것이 치료실 안에서의 치료가 아니라 밖에서의 경험이었다는 것을 어리석은 엄마는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이처럼 자폐성향을 가진 아이가 아니더라도 유난히 예민한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의 무언가를 만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에요. 제이는 탐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흙, 돌멩이, 나무열매 등을 만지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했어요. 뭔가 알려주려고 하면 어느새 저만치 가있고요, 심지어 시계꽃으로 반지를 만들어 끼우려고 해도 강하게 거부했어요.


산책하는 날이 켜켜이 쌓일수록 제이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나무의 단단한 껍질을 만져보기도 하고 그루터기에 관심을 갖습니다. 드디어 풀 위에 털썩 주저 앉기도 해요. 그러나 여전히 솔방울이나 돌을 만지기 무서워합니다. 솔방울을 손에 쥐여주니 질색팔색해서 대신 곳곳에 떨어진 솔방울을 발로 차기로 유도했더니 곧잘 따라하며 즐거워해요.



두 달여동안의 변화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나무를 안고 "안녕?" 인사를 하고 그루터기를 가르키며 "나무가 잘렸어!" 하며 슬퍼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산책을 하며 변한 것 중에 하나가 언어예요. 자발적 발화가 어려웠던 제이가 산책하며 들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어요. 비록 짧지만 말이죠.  


시계꽃 반지를 완강히 거부했던 제이가 돌도 던지기도 하고 다른 돌로 깨기도 하고 솔방울을 찧기도 해요. 스스로 이것 저것 시도해보면 좋겠지만 제이는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고 제가 모델링을 해주면

이제는 거부하지 않고 곧잘 따라해요. 이것이 별 것 아니어 보여도 수용의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정말 중요한 키가 된답니다.


심지어 뭐든 만지고 봐서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깜짝 놀라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요. 장미 가지도 겁없이 만졌다가 가시에 찔려보기도 했고요, 풀숲에 들어갔다가 풀독이 올라 밤새 긁느라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답니다.


처음 이 곳에서 산책을 시작했을 때 제이는 주구장창 뛰었어요.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는 신념으로 풀숲이건 나무 사이건 마음가는대로 말이죠. 그랬던 아이가 관찰을 하기 시작했어요.  거짓말 조금 보태서 손바닥만한 개미를 보여줘도 관심이 없던 제이가 개미, 거미를 관찰하고 개미집을 없애기도 하고 거미줄을 뜯기도 해요. 거미와 개미에게 미안할 정도로 말이죠.


무엇보다 오토바이 소리 트라우마는 없어졌어요. 간간히 들리는 지하철 소리, 도로변에서 들리는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 등 아쉽게 느껴지던 주위의 소음이 제이에게는 오히려 약이 된 듯도 해요.



또 한 뼘 성장


작은숲 산책을 통해 제이는 또 한 뼘 성장했어요.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힘을 기르고 있고요,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와 나무들 사이의 파란 하늘을 발견하고 즐길 줄을 알게 되었어요.

사실 다양한 곳을 보여주려는 욕심에 새로운 곳을 찾아 다녔는데 제이는 익숙한 곳에서의 안정감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보니 관심이 확대되고 놀이가 발전하고 언어가 나오는 것 같아요.


큰 아이 키울 때는 너무도 당연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제이 덕분에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요? 앞으로 제이가 더 좋아지길 기대하며, 더불어 엄마도 날씬해지길 고대하며 작은 산책로에서의 산책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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