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힘들 때
마음이 힘들 때면 하는 일이 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은 앞서 인생을 살았던 명사들의 인터뷰를 찾아본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적인 고민과 함께 늘 이 길이 자신에게 맞는지 의심했고, 고난과 역경이 있었으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 막막함에 몸을 움츠렸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인터뷰를 읽는 내내,
연기를 한다는 것은
연출을 한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그릇을 넓히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나는, 칠흑 같은 터널 속을 걷는 중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혹은 끝이라는 게 있긴 한 건지 모른다. 오디션은 늘 불확실하고, 카메라는 내 앞에서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데, 나는 정지 화면 속에 갇힌 느낌이다.
어떤 이들은 종종 말한다.
"인생은 운이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인생이란 건,
기회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일들과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 말이 마치 '네 잘못은 아니야'라고 위로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는 선택받지 못했어'라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말처럼 들릴 때도 있다.
그럴 땐, 애써 노력하고 힘쓰고, 버티며 지켜온 시간들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기분이다.
연기를 한다는 건,
어쩌면 도를 닦는 일과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매일 감정을 비우고 또 채우고, 삶을 해체하고 타인의 마음을 입어보며, 묵묵히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세상의 기준과 속도를 버텨내는 인내, 나를 믿는다는 외로운 확신,
그게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어렵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확신조차 사라지는 날이 온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
부모님 세대만 해도
지금도 그렇지만
가족과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시절이 있었고
어쩌면
심장이 뛰지 않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철없는 꿈을 꾸는 것일까.
그럴 때면 나도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라서 흔들리고, 부서지고, 주저앉는다.
하지만 앞서 길을 걸어간 분들도, 그런 힘겨운 시간을 지나왔다는 말을 듣고 나니
그들도 한때는 나처럼 어둠 속에 있었구나, 싶다.
그러면 조금은 안도하게 된다.
그들도 버티다 여기까지 왔구나.
나도, 조금만 더 버텨볼까.
며칠 전,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생 시절에 처음으로 내게 연기를 가르쳐 주셨던 극단의 부단장님께 들은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어요.
선생님은 이름이 알려진 분은 아니지만 연극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있으신 분이었고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대사 한 줄을 대할 때의 진지함, 무대 위에서 숨 쉬는 법을 아는 배우.
그런 분이 해주신 말이기에 더 무겁게 다가왔다.
배우라는 직업은, 누구보다 많은 삶을 살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은 뿌연 안갯속에 있는 듯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길 위에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걷고 있다.
어쩌면 진짜 배우는,
그 어둠을 견딘 사람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빛을 만나게 될 것을,
아직은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