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3.
이 글은 2021.09.23.에 작성하였습니다.
“배틀그라운드 신화를 만든 10년의 도전”이라는 부제목의 “크래프톤 웨이”를 읽었습니다. 읽으면서도, 그리고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크래프톤(당시 블루홀)은 NC소프트 출신의 개발자 몇 분과 함께 3년 간 300억의 예산 계획을 통해 ‘테라’를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모바일 게임이 주류가 아니던 시절이라 PC MMORPG 게임으로 개발이 진행됐습니다.
초기 시작은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발 역량이 우수한 분들이 계셨고, 맵과 아이템, 캐릭터의 규모가 경쟁작 대비 1.5~2배 가량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기대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이는 유저가 소비할 컨텐츠가 많다는 의미이고, 이는 유저가 지불할 금액 또한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non-targeting 기반의 전투 특성을 도입하여 PC MMORPG 매니아층의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시작이 너무 순조로운 나머지, 개발기간 중후반에는 다소의 방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테라는 제한된 기간 내에 많은 컨텐츠와 코드를 생산하기 위해 모듈 단위의 개발을 진행했고, 하나의 게임으로 통합하는 작업은 개발 막바지에 접어 진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통합 작업이 순조로울 리가 없습니다(대규모 프로젝트를 해본 분은 직감적으로 느끼실 겁니다.). 개발기간 막바지 접어 통합하기 시작한 코드는 버그가 많았고, 통합하면서 새로운 문제도 다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테라는 전투 액션에 집중한 나머지 스토리라인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게임 내에서 소비할 수 있는 스토리가 없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급하게 스토리라인을 정비하다 보니 이런저런 밸런스 문제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복잡한 MMORPG라는 특성이 여러 부정적 사이드 이펙트를 만들어 내었다고 하고요.
이런저런 일들로, 테라의 개발 리더십이 훼손되고 개발 기간도 지연되며 대규모의 예정되지 않은 적자를 발생합니다. 어찌저찌 테라를 겨우 런칭하지만, 국내에서의 흥행은 리텐션이 너무 낮았습니다. 그 이후로 북미 진출, 일본 진출, 중국 진출 등 다양한 판로를 모색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테라로 인해 대규모의 적자가 발생하며 어려움이 시작됩니다. 창업이라는 일이 정말 이렇게까지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NC소프트에서 이직해온 분들로 인해 국내외의 여러 형사 및 민사 소송까지 휘말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비용만 해도 수십억원이 지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돈 한푼이 없는 크래프톤의 재정 상황에 더 부담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도 게임 제작 과정에서의 자금 조달 문제, 리더십 훼손의 문제, 각종 인사의 문제 등 끊임 없이 문제가 터져 나옵니다. 공동 창업자 간의 신뢰 문제도 여러 차례 발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달아 게임 제작 및 흥행에 실패하자, 장병규님을 비롯한 경영진은 크래프톤을 ‘게임 제작사 연합’으로 경영 방침을 변경합니다. 역량은 우수하지만 당장 자금 조달 능력에 문제가 있는 소규모 게임 제작사를 인수하여 크래프톤 산하 게임 제작 팀으로 꾸리는 전략입니다.
이렇게 인수한 몇몇 게임은 작게나마 순이익을 내며 크래프톤의 재무에 긍정적인 이득을 줍니다만, 기울어가는 크래프톤의 회사에 미래는 없어 보입니다. 2016년에는 170명이 입사하고 200명이 퇴사했다고 합니다. 상당히 안 좋은 시그널이죠. 그러던 중 크래프톤 산하 ‘지노게임즈’의 김창한님이 배틀로열 장르의 게임(현 배틀그라운드) 제작을 크래프톤 경영진에게 제안합니다.
크래프톤 경영진은 김창한님의 PT를 긍정적으로 들었으나, 장병규님은 ‘너무 말이 된다’는 이유로 당장 게임 제작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배틀로열 게임의 창시자 격인 ‘브렌던 그린’의 제작 팀 합류를 조건으로 배틀그라운드 제작 승인을 고려해 보겠다고 합니다.
김창한님은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브렌던 그린을 한국으로 데려옵니다. 과정에서 많은 설득을 하셨던 것으로 보이고, 이를 바라보는 경영진의 눈초리는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렵사리 브렌던 그린이 합류한 배틀그라운드 제작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포함하여 10여명 내외의 규모로 1년여의 기간 동안 제작에 돌입합니다.
크래프톤의 재무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어 갑니다. 2017년 5월이면 크래프톤이 보유한 현금은 1자릿수(10억 미만)로 감소할 예정이라는 추계가 나왔습니다. 배틀그라운드는 2017년 3월에 런칭, 4월 부터 본격적인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공식 런칭 전, 김창한님은 트위치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배틀그라운드의 대규모 흥행을 예상했습니다. 첫년도 예상한 40만장을 훨씬 상회하는 판매고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크래프톤이 그토록 바라던 ‘글로벌 게임시장에서의 성공’을 배틀그라운드가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최종 런칭 직전, 김창한님은 글로벌 마케팅을 위한 인력 충원을 경영진에게 요청합니다만, 배틀그라운드의 정식 런칭 전 까지는 인력 확충이 어렵다는 뉘앙스의 회신을 받습니다. 이 시기에 크래프톤의 경영진에게 쌓인 분노가 폭발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크래프톤의 경영진이 배틀그라운드 투자에 인색했던 이유는 두가지로 보입니다. 첫째는 책에서도 밝혔듯 크래프톤 경영진에서 의뢰하여 평가한 게임 매니아 집단의 배틀그라운드 평가가 나빴습니다. 너무 매니악한 게임이라 대중성을 얻기 힘들다는 평이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퍼블리셔도 같은 뉘앙스의 피드백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크래프톤의 방식인 ‘크래프톤 내부에서 재미있다고 느껴야 런칭할 수 있다.’는 방침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기준으로 인해 크래프톤에서는 수많은 게임 제작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팀원들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배틀그라운드는 크래프톤 내부에서도 ‘재미 없는 게임’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경영진이 초기에 힘을 실어주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배틀그라운드의 정식 런칭 이후 180도 뒤집어 집니다. 김창한님도 예상하지 못한 ‘시청자 위주의 게임’, ‘게임 파트너(트위치 등)가 돈을 벌 수 있는 게임’ 등 여러 장점이 발견되며 배틀그라운드는 e-sports의 한 종목으로 자리잡고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올립니다. 10억 미만으로 떨어진 크래프톤의 현금을 순식간에 조단위로 올립니다. 10년 간 고생한 크래프톤은 배틀그라운드의 흥행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읽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 책입니다.
우선은 이 책을 읽고 나면 장병규님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생길 것인데, 솔직하고 담백하게 책을 출간하신 크래프톤 공동 창업자 분들의 용기에 대단함을 느낍니다. 장병규님은 네오위즈, 첫눈, 본앤젤스 등 트랙 레코드 자체가 대한민국 IT의 역사인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심에도 많은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겪으셨고, 의심했던 ‘배틀그라운드’를 통해 파산 직전의 크래프톤이 시가총액 25조의 기업으로 변한 경험을 큰 각색 없이 전달해 주셨습니다.
장병규님을 비롯한 크래프톤의 공동 창업자분들은 좋은 기업문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지만, ‘테라’를 비롯한 여러 게임의 흥행에 실패하며 곳간이 비어가고 크래프톤의 매각도 여러 차례 고민하셨던 것이 현실입니다. 배틀그라운드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 또한 책에서 여러 차례 밝히십니다. 그러한 판단 착오를 기술하시고, 김창한님께서 회사에 터닝 포인트를 제공하셨다는 점을 잘 전달해 준 부분에서 용기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크래프톤 웨이가 옳은 방식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배틀그라운드는 출시 직전 빌드에서도 크래프톤 내부 평가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코어 게이머 5명을 섭외하여 평가하고 여러 퍼블리셔를 통해 평가한 결과가 ‘너무 매니악한 게임이라 흥행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평가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흥행을 올렸습니다. 게임은 본질적으로 흥행산업이라, 일단 출시해 봐야 아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책에서는 ‘내부에서도 재미있다고 느껴야 흥행의 희망을 갖고 출시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의사결정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지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이시기에 이미 진행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검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이유는 ‘매니아의 눈과 대중의 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몇몇 분야의 매니아입니다. 대표적으로 ‘자동차’에서도 저는 고르는 눈이 까다롭습니다. 현대차는 잘 안타는데요, 그 이유가 ‘현대파워텍의 토크컨버터식 변속기 직결감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매니아들은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직결감 좋은 BMW가 세팅한 ZF 변속기가 들어간 차를 삽니다.
반면, 대중은 이런 포인트에 별 신경을 안씁니다. 정확히는 변속기 직결감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무리 ‘현대차 토크컨버터식 변속기 안좋다’고 얘기해 봐야 대중성 하나도 없는 소리일 뿐이고, 흥행 여부 판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매니아 평가는 대중의 평가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죠.
크래프톤에서도 내부 평가가 흥해야 게임으로 런칭할 수 있다는 의사결정이 옳은지 점검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내부적으로 재미없다고 평가되어 사장된 게임이 상당히 많아 보이는데, 우선은 런칭한 뒤에 고객 반응을 실제로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사장된 게임 중 몇몇은 실제로 빛을 보았다면 잘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책 전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장병규님의 말씀이 와닿았습니다. ‘노동자’와 ‘인재’의 차이입니다.
‘노동자’는 대체 가능한 인력이고, 생산성이 근로 시간에 비례한다고 하십니다.
반면 ‘인재’는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고, 생산성이 근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현대사회의 많은 사람은 노동자가 아닌 인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게임 제작자는 ‘인재’를 추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가 IT분야에 종사하기 때문에 장병규님이 말씀하신 배경과 저의 경험이 오버랩되며 더욱 공감되었습니다.
한편, 소문대로 장병규님은 엄격한 기준의 말씀도 여러 차례 하십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에, 인재라 하더라도 의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일하며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를 인재라 생각하며 적은 시간 일하며 높은 생산성을 낸다고 생각하는 바람직하지 않다. 인재는 많은 시간 일하며 훨씬 더 높은 생산성을 발휘해야 한다. 인재는 시간이 아닌 결과로 평가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책 구석구석에서 장병규님의 엄격함이 묻어 나옵니다. 배울 점이 많은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그동안 그려온 여러 꿈이 현실이라는 파도 속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마음을 가다듬고 재정비하려 합니다. 김창한님은 “바람이 부는데,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배틀그라운드를 미친 듯 만드셨다고 합니다. 저의 인생에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현실에 휩쓸려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성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좋은 책을 출간해 주신 크래프톤 구성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